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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6/26 12:15:27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9화- [-도움이 안되는 놈'들'-]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9화.
[-도움이 안되는 놈'들'-]

#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아 몰라. 뛰기나 해!”
“형! 형이 좀 어떻게 해봐!”
“미쳤냐? 저 정도 숫자는 나 혼자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거기다 고블린도 아닌 오크다. 오크! 싸우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상대하고 있는 동안 너희들은 어쩔 건데!?”
“켈모리아아아안!!!! 너 이 자식아아아아!!”“젠장. 화낼 힘 있으면 달리기나 하라고오!”

  태양은 아직 정점에 다다르지 못한 어중간한 시간의 아침. 우리는 그다지 맛은 없지만 어쨌든 여유 있는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여정을 다시 시작하려던 계획을 급작스럽게 버리고 지금 달리는 이 길이 라임턴으로 향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이게 다 저 망할 사기꾼 덕분에.

#.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눈을 뜬 나는 보기 흉하게 땅바닥에 퍼져 자고 있는 아크 옆에 있어야 할 켈모리안이 보이지 않아 혹시 뭐라도 훔쳐 도망간 것이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곧장 짐꾸러미를 정리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어진 것도 없고 그제야 보인 그의 작은 가방을 발견하곤 아침부터 어딜 돌아다니는 것인지에 대한 장황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자고 있는 아크가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덕분에 깨우기는 했다. 잠긴 눈을 비비며 켈모리안은 어딜 갔냐며 묻자마자 나는 기회다 싶어 신나게 뒷담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별 관심 없다는 듯 대강 식사 준비나 빨리 하라며 벗어둔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주변에서 쉽게 주워 모은 나뭇가지들에 불이 붙기 시작한 후였다.

“도망쳐어!”

  뭐라고 소리 지르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로 다가왔을 무렵엔 그게 아침부터 행방이 묘연했던 켈모리안의 목소리였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다급하게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뭔가 사고를 치고 돌아왔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밥 먹을 시간 없어!!! 뛰어!! 빨리 다 챙겨!!”
“어이. 어이. 그렇게 말해봤자. 뭐야. 아침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다 와서는 무슨 사고를 쳤길래.”
“살고 싶으면 뛰라고!!!”

  목숨까지 걸고 도망쳐야 할 일이라니. 워낙 녀석의 목소리가 다급했기에 우리는 일단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정말 대강 짐을 챙겨 어느 정도 속도를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가 무슨 이유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달려와선 도망갈 것을 강요했는데 알 수 있었다.

“히이이익!”

  맨 앞에서 앞서가던 켈모리안이 갑자기 기겁을 하며 멈춰서는 바람에 나와 아크는 허겁지겁 들고 달린 짐더미에 발리 말려 보기 좋게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이 자식. 너 지금 일부러 서버린거지.

“사…….사사…….사…….사람 살려어어어!”

  아무 말도 못하고선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다시 내달리는 켈모리안의 비명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가 쳐다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세 좋게 두꺼운 나무에 박힌 배틀 엑스. 그 힘이 워낙에 강했던 모양인지 아직도 처음 나무에 박혔던 그 순간 마냥 흔들거리는 자루가 가관이다.

“혀...형…….뭐…….뭐야 저건?”

  그것이 날아왔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등진 거대한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그러나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그 형상은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으며 그것은 아마도 거칠게 숨을 내쉬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오크. 오크다.”

  뭐라?

“말도 안 돼. 좀 벗어난 술이라고 해도 대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여행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며!”
“나중에 따지고 보자. 뛰어!”

  형이 갖고 있는 여행자를 위한 대륙을 관통하는 믿을만한 안내서에 적혀있는 내용 상 이곳 북서로는 레인저들의 정기적인 순찰로 안전이 보장된 곳이었다. 비록 우리가 대로에서 조금 벗어난 숲으로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오크와 같은 대형 몬스터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식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연출할 정도로 외진 곳이거나 레인저들의 순찰이 허술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은 이런 저런 상황을 따질 여력이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히 오크 1마리다. 그러나 우리는 대항할 힘이 없다. 적어도 우리 셋 중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아크마저 도망치고 있다. 생각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도망갈 뿐이다. 협력해서 같이 싸우면 되지 않겠냐고? 그건 내가 실력으로나 담력으로나 받쳐줄때의 이야기다. 지금으로선 살고 싶다면 달리는 수밖에 없다. 뛴다. 미친 듯이 뛴다.

#.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쉬잇! 좀 조용히!”

  조용히 하라는 아크의 말에 켈모리안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리고 불안함을 전혀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얼굴로 우리를 한 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등을 뒤로 기댔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몇 시간? 적어도 날짜까지 바뀌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우린 방금 전 폐가 터질 것 같은 뜀박질을 감안하더라도 조금은 이른 허기를 느끼며 우연히 마주친 작은 토굴로 숨어 이렇게 숨어있다.

“뭔가 이상해.”

  내가 입을 열자 아크 역시 내가 이상하다고 지적한 그 부분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마음이 진정되자 다시 방금 전 위협과 함께 찾아온 의문점이 떠올랐다. 여행자들을 위한 가장 안전한 경로. 그리고 레인저들의 정기적인 순찰. 그리고 그것에 한 가지를 더하는 아크의 중얼거림.

“오크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아.”
“응?”
“오크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아. 행동 방식에 지능이 겸비됐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기본적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게 기본이라고 알려져 있어. 내가 본 바로도 그렇고.”
“무슨 말이야? 그럼 그 말은…….”
“우리가 본 그 오크가 정말 미친 녀석이거나 아니면 흩어져서 먹잇감을 찾던 중이거나.”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더 높아?”
“어떨 거 같냐.”

  조건과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그의 표정은 참 복잡했다.

“전자의 조건 같은데. 그 편이 우리한테 도움도 되고 말이지.”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신없이 달리던 와중 먼저 달려 나간 켈모리안이 달리던 숲길 오른편 큰 나무 뒤로 숨어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남자 셋이 사이좋게 들어가기엔 조금은 좁은 토굴이었다. 일단은 계속해서 달리는 것도 체력적으로 무리가 왔고 달리는 속력이 점점 느려질수록 따라잡힐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럴 바엔 불편하더라도 효과적으로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을 수 있는 이 토굴이 적격이었다. 어떻게 도망치다가 이곳을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도망치느라 체력을 소진한 나와 아크에겐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구원이었다. 약간 빈정 상하긴 했지만 켈모리안에게는 감사의 말을 전해뒀다.

“그렇게 속 편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잖아!!! 적당히 멀리 떨어진 것 같은데. 얼른 달려서 북서로 중앙으로 나가자고!”
“아. 좀 닥치고 가만히 있어. 니 목소리 때문에 대륙 너머 코르사크의 오크들마저 여기로 달려오겠다.”

  아직도 숨이 턱 밑까지 차 있는 탓에 크게 말할 기력은 커녕 그대로 자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나와 아크와는 달리 켈모리안은 아까부터 추격해오던 오크가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빨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낫다면서 우리를 다그쳤다.

“확신은?”
“뭐?”
“지금 이 주변에 아까 그 놈이 없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생긴 거야. “
“그…….그야. 다…….다른 곳으로 갔겠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았다면 왔어도 벌써 왔을 거 아냐!”
“그러니까 더욱 나가면 안 되는 거야.”

  누워있던 아크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잠시 토굴의 입구를 쳐다보면 아크는 켈모리안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는 잔뜩 불만이 섞인 얼굴로 슬금슬금 다가오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 손짓은 꽤 다급한 모양새였다. 덕분에 나 역시 일어나 앉아 아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크는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야 추격에 열을 올리긴 하지만 방향을 잃었을 경우엔 동선이 그리 넓게 퍼지진 않는 게 대부분이야. 우리를 추격할 때야 미친 듯이 달려오긴 했겠지만 시야에서 우릴 놓친 이후엔 어느 정도 방향을 추측하면서 움직이긴 했겠지만 후각이나 청각의 경우는 사람과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에 여기로 정확하게 찾아올 확률은 거의 없어.”
“아우. 그럼 빨리 도망치자고!”
“말을 좀 끝까지 들어. 일단 급한 대로 이 굴로 숨어들긴 했지만 방향을 잃은 상태고 바로 북서로로 합류하는 길을 찾아낸다고 해도 문제야.”
“아. 그러니까 왜!”
“추격을 멈춘 오크가 그 시점에서 멀리 이동하지 않는 말은 이해했냐?”
“응. 그거야 알아들었지. 그게 무슨 상……. 아…….”

  뜀박질의 속도는 우리 쪽이 훨씬 빨랐다. 보폭이야 그 놈 쪽이 훨씬 크긴 했겠지만 기본적인 속도의 차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거리를 둔 상태에서 도망치는 입장에선 우리 쪽이 유리하다. 켈모리안의 말대로 우리가 숨어든 곳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얼른 북서로로 빠져나가는 것이 지금 이 숲에서 숨어있는 것 보다야 훨씬 안전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방향을 잃어버린 오크는 그 주변을 어슬렁거릴 것이 뻔하고 그 놈이 있을 장소가 일단은 우리를 추격하던 경로의 어느 곳이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였다간 정면으로 마주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달려온 길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야 북서로로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아무 의미 없어진다.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잠깐! 쉿.”

  아크는 우리 모두의 입을 막으며 다시 한 번 입구를 주시했다. 아크를 따라 같은 곳을 쳐다봤지만 그가 다급히 우리의 입을 막은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켈모리안은 기분 나쁘다며 버둥대다가 아크의 거친 발길질에 엉덩이를 얻어맞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꽤 시끄러운 녀석이다.

“보이냐.”

  아크는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작게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새들어오는 햇빛과 빽빽이 들어차있는 키 작은 수풀들. 그리고 그것에 비치는 토굴 위에 서 있을 무언가의 그림자 하나. 나무이려나. 어라. 잠깐. 그림자? “

“형! 그림자!”

  아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가 토굴에 숨어들 때야 정신이 없긴 했지만 분명 얼핏 쳐다본 굴의 위쪽은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동산을 반으로 갈라놓은 듯 한 그 지형엔 적어도 저런 그림자를 만들어낼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녀석이다.

“뭐…….뭐야. 나도 좀 알려줘.”

  또 켈모리안이다. 징징대기 시작한 녀석은 이젠 완전히 울먹이고 있었다. 나도 무섭기야 하지만. 이 녀석은 좀 심하다.

“조용히 해. 왔다.”
“뭐…….뭐가!? 응?! 뭔데?!”
“뭐긴 뭐야. 아까 그 놈이지.”

  순간 울먹이는 소리를 멈춘 켈모리안은 멍한 얼굴로 입구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덜덜 떨던 손과 발은 어느 새 얼어붙은 것처럼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입 꼬리가 살살 올라가기 시작한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지 히죽대는 것 같아 보이던 그 얼굴은 그러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말렸어야했는데. 한 번 팼던 거 두 번이라고 못할까. 때려서라도 막았어야 했다.

“히에에에에에엑!!!!!!!!!!!!!!!!!”
“저 멍청한 놈이!!!!”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며 밖으로 내달리는 켈모리안을 잡으려 나와 형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토굴이었기에 그는 우리가 붙잡기도 전에 빠져나가 버렸고 그것을 본 아크는 그 자리에서 멈췄지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는 다리를 멈출 줄 몰랐다. 목표 지점을 지나쳐 버린 후에야 그를 붙잡고서 뭘 쳐다보고 있는지 넋이 나가버린 그 얼굴에 주먹맛을 보려주려 했지만 그 전에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얼굴로 빠져나온 토굴의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크에게도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안면근육이 있다면 필시 그 녀석의 표정은…….

“요 맛있는 꼴통 인간들…….클클클.”

이게 아닐까.

“크워어!”
“젠장!”

조용히 우릴 노려보던 놈은 그대로 우리가 멍하니 서 있던 그 지점으로 뛰어내렸다. 완전히 이성의 끊을 놓아버린 듯 한 켈모리안은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이 그대로 옆으로 밀쳐낸 후 나도 겨우 옆으로 몸을 피했다. 피했다기보단 그냥 나뒹구른거나 마찬가지다. 급하긴 나도 마찬가지니까.

“어이. 받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크는 급하게 달려 나오느라 내려두고 나왔던 검을 챙겨들고 나왔다. 물론 내 것도 함께 챙겨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비상사태에 형과 같이 조금은 상황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같이 있어서. 그마저도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혀…….형.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다…….달려들어?”

검을 잡고 있는 손은 바들바들 떠느라 잘못하다간 내 이마를 내 손으로 찍어 내릴 판이었고 다리라고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넘어지지 않고 서 있을게 용하다. 옆으로 밀쳐낸 켈모리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그 와중에 살폈더니 눈에 들어온 것은 수풀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놓고 있는 얄밉기 그지없는 모습. 내가 널 그러라고 밀쳐내서 살려줬더냐. 이 망할 놈.

“워어어어!”

나와 아크를 한 번씩 둘러보더니 이 놈 곧장 나에게 달려든다. 젠장. 그렇게 티냈냐.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노골적으로 날 공격하면 쉽게 요리하실 수 있어요 라고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 막을 생각하지 말고!”

허공에 배틀 엑스를 치켜들고 기세 좋게 달려드는 놈의 등 뒤로 들려오는 아크의 목소리에 겨우 반응하여 아슬아슬하게 뒤로 물러났다. 이마 위를 시원하게 가르며 땅에 처박힌 오랫동안 사용하여 특유의 은빛을 잃어버린 거대한 그것을 보자니 이미 머리가 날아간 것 같이 두려움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앞머리가 조금 잘려나간 것 같다. 메인 요리에 앞서 먹는 스프에 몇 가닥 띄워 드시려나보다.

“하압!”

녀석의 무기는 나를 내리치려다 그 무식한 힘 덕분에 땅에 처박혀 버렸고 그것을 빼내려고 두 손을 모은 순간 깨끗하게 무시당했던 아크가 그 넓은 등을 노리고 들어왔다.
“키에에엑.”

등을 붙잡고 포효하는 놈은 얇게 베인 그 상처가 꽤 아팠던 것인지 덕분에 한 순간 배틀 엑스를 다시 뽑아들고 이번에는 아크를 향했다. 아무래도 먼저 그를 먼저 처리하는 게 날 잡아먹는 길이 좀 더 편하다고 생각을 바꾼 모양이다. 이미 본 것이 있으니 내 머릿속은 오크의 등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미 아크가 내둔 상처가 있다. 제 아무리 오크라고 해도 때린 데 또 때리고 벤 곳을 더 깊게 베면 영원히 버티기야 못하겠지. 좋아. 가자!

“으랴아아~!”
“키긱.”

기합을 너무 일찍 넣어버린 탓일까. 아까와는 달리 내 움직임을 눈치 챈 녀석은 왼쪽으로 등을 돌리며 검을 위로 들고 달려드는 탓에 텅 비어버린 몸통을 벌레를 잡듯 쳐내버렸다. 젠장. 무기를 든 손으로 친게 아닌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케헥!”
“야. 이 멍청아!!”

그대로 튕겨나가 보기 좋게 땅바닥을 몇 바퀴 굴러 떨어진 나는 꽉 막힌 숨통덕분에 아프다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침만 내뱉게 됐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아크를 쳐다보니 그래도 간신히 방어는 성공하고 있다. 아니 피하고 있다. 본래 사용하는 무기가  그 크기부터 사람 몸통과 같이 크고 날이 정교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상대를 박살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지다 보니 막기 보다는 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아니 애초에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뼈가 부러질 거다. 막았다간.

“이익! 젠장!”

공격 속도가 느린 대신 그 힘과 범위가 강하고 넓은 덕에 쉽사리 녀석의 리치 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 보조를 맞춰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 동생 놈은 무식하게 노골적으로 등을 노리다 일격에 땅바닥을 굴러 형 죽는 꼴이나 구경하자는 심산으로 누워있질 않나. 그나마 어차피 도움이 안 되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돌덩이라도 던져서 시선을 끄는 정도는 해주지 않을가 하고 기대했던 켈모리안은 숨어있던 그 행태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아크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아니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줄넘기를 하듯 뛰어다니며 공격을 피하던 아크는 이젠 그것도 무리가 왔는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놈은 오히려 몸이 풀린 것인지 꽉 쥔 배틀 엑스의 움직임이 더 빨라진 듯 했다.

“으앗!”

허리를 가로로 베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다 발을 헛디뎠는지 아크의 중심이 무너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오른쪽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배틀 엑스. 끝인가.

“크헉.”

넘어지면서 간신히 검을 땅에 박으며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탓에 곧바로 자세를 갖출 여력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너진 중심을 틈 타 무기나 방어구로부터 자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검을 놓쳤고 주인을 잃은 그것은 배틀 엑스로부터 주인을 지켜낸 대가로 부서져버렸다.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은 형을 보며 간신히 유지하던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 것은 놈이 최후의 일격을 내리치는 것이 흐리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도 곧 저렇게 될 텐데. 역시 형이라서 몇 분이라도 일찍 죽는가보다. 형제 사이좋게 여행자를 위한 가장 안전한 이동경로 북서로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그것도 오크 단 한 마리에게. 그래도 꽤 거창한 죽음이지 싶다. 오즈의 평범한 일상에서야 맛볼 수 없는 스릴 넘치는 죽음 아닌가. 적어도 늙어 몸 하나 가누지 못하게 돼서 유언 한 마디 제대로 말 못하는 입을 원망하며 죽는 지루하고 평범한 죽음은 아니니까. 개블리로의 여행을 결심했기에 꽤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좀 허무한걸. 아직 반도 못 갔는데. 적어도 메인 스트림까지는 가보고 싶었어. 형. 우리들 겨우 여기까지밖에 못 와서 죽으려고 길을 떠난 거야? 하루만 더 가면 라임턴이고 거기서 하루만 더 가면 메인 스트림인데. 고작 이틀이면 내 중간 목표까진 달성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아쉽네.

눈이 감기고 나서도 잡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날 들어 올리는 놈의 거친 손길이 조금 늦게 도달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있었다. 먹느라 늦은 건가? 그럴지도. 근데 오크의 손 치고는 꽤 부드럽고 따뜻한데? 그리고 좀 작은 것 같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해. 아. 난 죽은 자들의 세계로 넘어온 걸까? 형부터 찾아봐야겠는걸. 방금 도착해서 멀리 안갔을테니까. 여기도 개블리는 있을까? 있다면 참 가기 쉬울 것 같은데 말이지.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8-2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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