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01/06 17:37:25
Name PoeticWolf
Subject 어떤 적과의 화해
아침 일찍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의 친한 동네 오빠로 나와도 잘 아는 이였다. 지난 1년 봉사 일 때문에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잠깐 서울로 온 모양이다. 결혼한 우리 부부가 동네로 다시 이사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놀러오고 싶었나보다. 어제 마침 찜닭을 해 놓은 것도 있고 쌀도 새로 사다놔서 흔쾌히 오라고 했다, 나 말고 아내가. 그리고 우린 일어나 집 정리를 간단히 시작했다, 그건 우리가 함께.

나도 잘 아는 이라고는 했지만 아내의 손님에 가까웠다. 잘 보일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이 여자는 내 여자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음식 쓰레기 버리러 밖에 나갈 때 입는 추리닝에 할머니가 살아생전 겨울에 꺼내 입으시던 대단히 모던하지 못한 스웨터를 주워 입었다. 아마도 집주인이란 걸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집에서 최대로 편안한 차림을 강조하려다보니, 코디의 초점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불편한 옷차림을 하는 것에 맞춰졌던 것 같다. 나름 갖춰 입은 날 보고, 손님 오는데 그게 뭐냐는 아내의 핀잔이 있었지만, 그 손님이 남자라서 그런지 딱따구리 같은 쪼아댐은 없었다. ‘아니, 이 여자가 지금’ 이라는 말을 단단히 장착하고 있던 입장으로서 난데없는 부드러움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생쌀이 물과 열에 불어 보들보들해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그리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시골에서 미용실 갈 틈도 없이 바빴는지 머리도 찰랑찰랑 길고 없던 수염도 생겼다. 아니, 그런데 뭔가 기분 나쁘게 그런 차림이 잘 어울린다. 문간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비친 내 자신을 테두리 바깥으로 빼버렸다. 크게 한 걸음 옮긴 것 같았는데도 결혼살 잔뜩 오른 배가 테두리 안에서 삐죽하다. 이럴 땐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다. “오, 멋있어 지셨어요! 어서 오세요!” 내 환대에 아내가 마음을 놓았는지, “오빠 이런 거 잘 어울리네? 의왼데?”라고 한다. 내 코디가 잘못 됐단 걸 깨달은 난 이미 현관에 없다. 거실에 집주인처럼 당당히 양반다리로 앉아 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상이 들어오고 밥과 반찬이 척척 올라올 줄 알았는데 난 어느 새 아내를 도와 밥과 반찬을 퍼놓고 수저를 배치하고 있다. 아내는 손님이 기다리면서 들으라고 음악을 컴퓨터로 켜놓기까지 했다. 저 컴퓨터 모니터도 커서 전기세 많이 나올 건데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다. 하지만 첫 대면에서 어쩐지 진 느낌인지라 묵묵히 내 돈 내고 산 쌀과 내 돈 내고 사서 만든 반찬을 가져다 바쳤다. 내 돈 내고 떼는 보일러가 오늘 따라 잘 돌아가 바닥이 금세 뜨듯하다. “집이 되게 따듯하네요!”라는 말에 대꾸하기도 싫어 그냥 웃어만 준다. 그리고 “아이고 집에 음식 냄새가 나네,” 하면서 거실과 바로 연결된 베란다 창을 망설이지 않고 열어젖힌다.

푸짐한 상이 갖추어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손님의 도리라지만 그는 맛있다는 칭찬을 너무 남발하고 있다. 내 여자가 만든 음식을 왜 당신이 맛있게 먹나, 눈치를 주거나 험한 인상을 할 수는 없어, 칭찬할 음식이 없으면 입을 닫겠지, 라는 생각으로 음식 퍼 올리는 속도를 급격히 높였다. 하하, 따라올테면 와봐! 감자가 알 째 식도로 굴러가는 거친 느낌을 견딜 수 있다면 인정하마! 아내가 창피한 듯 허벅지를 꼬집었다. 감자가 식도에서 턱 멈춰 난 화장실로 뛰어가 캑캑 거렸다. 눈까지 충혈되어 돌아온 나에게 아내는 천역덕스럽게 괜찮냐고 묻는다.

갑자기 놈이 지금 음악 뭐냐고 좋다고 한다. 아내가 카펜터스의 음악을 최근 처음 정식으로 들었다고 했을 때 한껏 비웃어 줬는데, 이 녀석도 마찬가지인가 싶었다. 카펜터스에요, 그. 유. 명. 한. 이라고 한 자 한 자 정확히 발음한다. 아, 네, 좋네요, 라며 다시 밥을 한 술 뜬다. 그러면서 요즘 자기가 있는 시골 동네 꼬마들하고 밴드를 결성했는데 한창 콜드플레이를 연습 중이라고 합니다. 엇, 콜드플레이라면 옛날 가요만 들어 여타 다른 음악에 무지한 아내 때문에 하드에서 한창 썩고 있는 그 밴드? 어쩐지 오랜만에 듣고 싶어서 콜드플레이 2집을 찾아 틀어 놓았다. 어디서 들어본 음악이라고 애써 아는 척 하는 아내가 이런 음악을 애들이랑 한다고? 라며 놀라워한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 밴드가 연습하는 음악으로 흘렀다. 그래봐야 깊이 있거나 조예 있는 얘기는 아니다. 그 동네 어떤 고등학생 꼬마는 퀸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해 브릿팝과 메탈만 들으며 자라 콜드플레이의 느린 곡 몇 개 정도는 귀로 듣고 카피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식처럼 자랑을 했다. 그 고등학생의 동생은 동네에 드러머가 없어 혼자 독학으로 드럼을 하고 있는데 이미 난타 수준이란다. 난타가 무슨 드럼이냐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 열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는 라디오헤드와 미스터빅 노래를 가지고 동네에서 작게 공연도 했단다. 아니, 라디오헤드랑 미스터빅? 이 또한 내 하드에 묵혀 두었던 내 총각 시절의 아티스트들 아닌가! 꼬마 밴드 이야기에, 잊혀졌던 아티스트들 이름에 난 이미 무장해제가 되었다. 아내는 이미 둘에게서 잊혀졌다. 그게 문제였다.

“그런데 고딩 주제에 퀸을 듣고 자랐다고요?”
“네.”
“아니, 미스터빅도 알아요?”
“그렇다니까요. 저보다 더 많이 알아요, 옛날 밴드들을.”
“신기하네. 그럼 요즘 아이돌 노래는 귀에 잘 안 들어오겠군요.”
“거의 몰라요, 요즘 아이돌을.”
“고등학생이요? 아이돌을 모른다고?”
“네. 사실 저도 잘...”
속으로 웃기고 있네, 했다. 해제되었던 무장이 다시 악마처럼 스물스물 갖춰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오래 숨겨왔던 내 욕망인지도 몰랐다.

“에이, 그래도 아이유는 아시겠지.”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졌다. 악마가 되나보다.
“이름은 알아요.”
“아이유 신곡 나온 것도 못 들어보셨겠네?”
“네. 허허.”
당시 이전한 사무실 컴퓨터에는 스피커가 없어서 이전 사무실에서처럼 남몰래 ‘너랑 나’의 퍼포먼스 버전을 틀어 볼 수 없었던 것이 보름째였다는 사실이 이 대화에 과연 얼마큼 영향을 미쳤나, 그 때 몰랐던 걸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은 알 듯 하다. 퀸에서 본조비, 본조비에서 라디오헤드, 미스터빅, 콜드플레이를 오가던 우리의 음악 이야기는 희한하게 29인치 풀스크린 아이유 뮤직비디오로 결론지어졌다. 아내가 옆에 있었던 걸 우리는 언제부터 잊었던걸까.

러닝타임 동안 아내는 조용히 상을 치우고 있었나보다. 아이유 손짓에 따라 시간을 여행하고 와봤더니 방금까지 감자와 죽은 닭과 밥 그릇이 있던 상에 사과와 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린 서로 어색하게 눈이 마주쳐 뒤통수를 긁었다. 얼른 과일을 먹으며 눈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엔 사과를 깎을 칼도, 집어 먹을 포크도, 과일 놓을 접시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엔 아내도 없었다. 반찬 튀어 지저분한 상 위의 귤과 사과는 마치 우리 자신의 운명을 알리는 다잉 메시지와 같았다. 칼을 가져와서 이 사람에게 내가 과일을 잘라줘야 하나, 귤껍질을 내가 발라줘야 하나 고민이 들면서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난 방금까지도 경계 대상이었던 이 사람이 이 거실에서 계속 남아 내 방패가 되 주길 기도했다. 믿음이 부족한 탓인지 뮤직비디오를 한 번 더 보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1-12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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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터치
12/01/06 17:45
수정 아이콘
티비에서 여자아이돌이 잔뜩 나오면..기쁜 마음을 감추며.. 흠잡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며... 행여라도 낮은 탄식음이나 칭찬하는 경우에는 와이프와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하여야 하는 스킬 정도는 익히고 있어야 음식물 쓰레기 매일 안버리고 이틀 모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할 수 없는 법

최악의 경우는 이 닦고 양치한 이후 귤 디저트를 억지로 어야 되는 일이 발생하겠지요.. 악.. 이닦고 귤먹는 맛... 괴로워 괴로워...
12/01/06 17:51
수정 아이콘
여친마마 앞에서는 걸그룹이 나오면 숨쉬는것도 조절해야하죠..

혹여나 '우와~' 라던지 '헤......' 이런 반응이 나오면 그날은....

아이유는 이쁜데 신봉선 닮아서 싫어, 윤아는 이쁜데 너무 말라서 싫어, 난 걸그룹 별로 안좋아해

라고 하면서 생존하고 있습니다..
12/01/06 18:10
수정 아이콘
우리 와이프는 아이유는 뭐라고 안합니다.
전 마트에가면 당당하게 아이유 사진이 있는 마이쭈를 집어들죠
별로네
12/01/06 18:11
수정 아이콘
가끔씩 주말 저녁에 티비에서 하는 음악방송 와이프와 같이 볼 때면 정말 긴장해야 하더군요.
보이즈 그룹 나올때는 심드렁하게 코파고 있다가, 걸그룹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빛은 반짝반짝 입은 헤벌레....
그러다 한번씩 날아오는 와이프의 감상평에는 맹독이 발려 있습니다.
보이즈가 나오던, 걸즈가 나오던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냉정한 감상평을 와이프와 나누어야 그나마 1시간여 문제없이 볼 수 있는데.... 마음뿐만 아니라 얼굴도 저절로 반응이 나오나 봅니다.

어젯밤 1시간 산책하는동안 다운받은 아이유 4곡을 다섯번 반복해서 돌아가며 들었네요.
혼자 걸으면서 왜자꾸 히죽히죽 웃게 되는건지...
지금도 귀에 자꾸 맴돕니다..... '삼촌 짱~!!'...
공허진
12/01/06 18:22
수정 아이콘
크크 저번에 어머니와 앉아서 불후의 명곡보다가 강민경이 나오길래
'저번주에 아버지랑 보는데 강민경 완전 이쁘고 노래잘한다고 하시던데요?'

라고 했다가...
'야 저게 뭐가 이쁘냐!'
'너무 말랐어'
'노래 못하는구만 삑사리나네'
'다리가 못생겼어'

폭풍 비난을 하시더라는 크크
12/01/06 18:22
수정 아이콘
글 제목이 바뀌었네요 크크크
12/01/06 18:25
수정 아이콘
제목이 바뀌다니... 좀 전 제목이 클릭수 올리는데는 백만배 도움이 되셨을텐데...
기존곽 같은 제목으로 돌아가신 건 아내분을 위한 배려인가요? ^^
12/01/06 18:25
수정 아이콘
아마도 아이유에 관한 언급은 애인이나 아내 앞에서..하게되면
종교글쯤 되는 분란이 될 거 같아요.
아이유는 한편으로 너무 쏠려서 인기 있는 타입이라서 그런지...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뤘습니다.
그냥 여자들도 다 이쁘다고 칭송하는 여자 연예인이면 무난할 듯합니다.
켈로그김
12/01/06 18:28
수정 아이콘
드래곤볼을 보는 기분입니다.

베지터와 손오공 일행이 프리더라는 강적 앞에서 힘을 합쳐 싸웠던 모습..


..결국 베지터는 죽었지만서도 ㅡㅡ;
선데이그후
12/01/06 18:48
수정 아이콘
................................. 혹시 짐브릭만은 좋아하세요?
12/01/06 19:06
수정 아이콘
아 재밌어... 재밌습니다 크크 [m]
바다란꿈
12/01/06 19:07
수정 아이콘
손님이 와이프님 음식을 맛있다고 칭찬하시는 게 약간 거시기 하시면
직!접! 하시면 됩니다. ^^;;;
12/01/06 19:12
수정 아이콘
..................그렇게 서로 막 귤까주고 하시면 되는데...

돌아보면 칼을 든 와이프가 등뒤에서...
포도씨
12/01/06 19:31
수정 아이콘
나도 퀸과 미스터빅을 들으며 자랐는데...
아니구나 다 자라서 들었구나...크흐흑
그런데 PoeticWolf 님의 소소한 일상 글을 읽으며 급 결혼하고 싶으신 분들이 다시 솔로를 외칠것 같습니다.
아이유를 함부로 말못하는 결혼생활이라니!
우리 결혼생활은 이렇게까지 비굴하진 않단말입니다! 털썩
화장실청소까지만!
Mithinza
12/01/06 19:53
수정 아이콘
그런데 원래 아이돌에 관심이 없으면 세대와는 상관없이 신경 안쓰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런 건 잘 몰라서... 아마 TV를 많이 안봐서 그런갑다 하기도 합니다만...

전 아이돌도 관심없고 아이유가 무슨 노래 불렀는지도 잘 모르는데 와이프가 없...............................
12/01/06 23:24
수정 아이콘
전 비록 결혼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여자친구를 내일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서로 선물을 준비했어요.
저는 전지에다가 마치 우리 둘만의 신문인 것마냥
전지 신문 겸 편지를 만들었구요.
여자친구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쪼끄만 선물이라고만 하더군요
그리곤 힌트를 준다고 사진을 보내주는데, 초콜렛이라고 쓰여진 종이상자, 폭탄 그림, 그리고 태연이 사진이었습니다.

......... 지나가는 말로 '태연이 진짜 오는거야!?' 라고 했다가
선물 불타게 생겼습니다.. ㅠ
12/01/06 23:34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크크
그런데 이게 아이유의 문제인지는 잘 감이 안와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간에 (내)손님이 왔는데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하고 완전히 뒷전이 된게
저에 입장에서는 화가 났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아이유에게 질투를 느낄까요?
지금은.. 이모짱! 도 해줘 ㅠ ㅠ ..의 입장인지라. 하하
세르니안
12/01/07 01:44
수정 아이콘
전 저희 아버지와 항상 소녀시대중에 누가 톱인가로 말싸움을 합니다.

저는 티파니 제시카 투톱이고

아버지는 항상 유리 윤아 투톱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 필요없고 지나가 최고라고 하십니다.
생선가게 고양이
12/01/07 02:31
수정 아이콘
아~ 진짜 재밌습니다.
주말에(아;; 12시 넘었으니깐 이미 주말인가;;) PoeticWolf님 글 다 찾아 읽어볼려고 생각중입니다.
"내 돈내고"의 반복이 특히 최고에요!!

그런데 PoeticWolf님 닉에서 Wolf 는 버지니아 울프인가요??
흐흐 영문과 전공해놓고 기억나는 작가는 그 분 한분이라서 -_-;;;; 반가워서 여쭈어 봅니다.
진중권
12/01/07 11:24
수정 아이콘
아~ 완전 좋아요!! [m]
예원아빠
12/01/09 12:53
수정 아이콘
재밌는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딸한테 아빠가 아이유 좋아한다는 걸 주입시켰더니 TV(인기가요)에서 아이유가 나오면 "아빠 아이유 나와"하고 낮잠자는
절 깨우러 옵니다. 와이프의 날카로운 눈빛이 살짝 무섭긴 하지만 잘 이겨내고 있지요 ^^
王天君
12/01/16 07:32
수정 아이콘
기가 막히네요. 글이 아주 생기발랄합니다. 읽으면서 뭔가 입안에서 톡톡 씹히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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