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2/28 00:21:08
Name PoeticWolf
Subject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실습 시간 때였습니다. 현미경으로 식물 세포와 동물 세포를 비교해보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동물 세포 채집은 간단했습니다. 면봉으로 입안을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린 마음에 솜방망이 따위로 입안 살을 채집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멋대로 세게 문질렀습니다. 마침 입안이 마른 상태에, 마른 면봉이 강한 마찰을 일으키면서 순간 따끔했습니다. 덴 듯이 뜨거웠다가 따끔한 느낌이 계속 되나 싶더니 피가 나버렸습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마초라 울지는 않았지만 계속 거슬렸습니다. 식물 세포를 채집하는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파리를 따거나 줄기를 얇게 저몄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겪은 아픔이 아니라 기억이 자세하지 않나 봅니다. 다만 식물에게 해를 가하면서 방금 입 아팠던 경험이 잠깐 떠오르긴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채집되는 건 아픈 것이군, 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함께요.

고등학교 때 생물 과목을 선택한 죄로, 죄 없는 동물들을 두셋 가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죽은 생선과 개구리, 나중엔 쥐까지 포대 단위로 아무렇게나 교실로 끌려와 도마 위로 배분되었을 때, 그리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집어 들고 장난스레 목을 잘라 내면서, 전 잠깐 입 안이 아팠습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니었고 생명 윤리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던 때였습니다. 그냥 어렸을 때 스쳐갔던 따끔한 아픔이 아주 잠깐 되살아난 것뿐이었습니다. 표본으로 선택받아 채집된다는 건 무자비할 수 있다는 초등학교 현미경 교실에서의 생각이 기억났습니다. 인류의 해부학 지식을 높여준 것이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잠재 질병을 막아준 것에 대한 감사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표본의 역할은 인정하지만, 그냥, 생명이란 거 참 속절없었습니다.

몇년 전 아는 동생이 택시 강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자 아이였는데 몹쓸 짓까지 당한 후였습니다. 장례식에서 어른이 그렇게 한을 담아 우는 모습을 전 처음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남동생은 대낮부터 술을 마셔 눈에 초점이 없었습니다. 대신 분이 광포하게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서있지를 못했습니다. 벽에 뒤통수를 자꾸만 부딪혀 짓이기고 주먹으로 가슴을 쥐어박고 으흐흑 흐느낌을 계속해서 되새김질 하고 있었습니다. 범인은 얼마 후 하필 제가 살던 동네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오락실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도박인지 게임인지를 하다가 잡힌 남자 세 놈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전 아직도 그들의 머리를 각목으로 천천히 으깨는 상상을 합니다. 그 아이의 가족은 아직도 약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소식과, 그 끈적끈적한 비극의 와중에도 그 아버지가 붙잡는 희망이란 택시 강도를 세 명이나 잡게 되어서 그 만큼의 희생자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전 오랜만에 다시 입 안이 아팠습니다.

대구 중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유서가 공개되었지만 전 유서 전문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집요하게 죽음으로 몰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예전 홍대 택시 강도 사건의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족이 감당할 슬픔에, 또 얼마나 많은 치료와 약이 소모될까. 그러면서 그들은 또 얼마나 찌들어갈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학생 어머니의 인터뷰가 공개되었습니다. 슬픔의 말미에 2차, 3차 피해의 근절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앞으로는...’이라며 다른 사람이 겪어야 할 미래의 일들까지 걱정하는 희생자들은 다만 택시 강도로 죽은 동생의 아버지와 괴롭힘 당했던 중학생 아이의 어머님만이 아닙니다. 노근리 학살 사건의 생존자들 역시 앞으로의 유사 전쟁 범죄의 예방을 자신들의 사명감으로 삼고 있고, 집요하게 전범을 잡아내는 유태인들 역시 적어도 표면으로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에서 팔다리를 다 잃은 민간인 이란 소년의 아픔을 실제 자기 사지의 아픔처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일겁니다.

전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희망’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며, 자기들의 어마어마한 아픔을 기꺼이 디딤돌로 바쳐 앞으로 인간 전체의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심리에는 바로 이 ‘희망’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같은 범죄가 재발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자기들의 아픔이 그런 근절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의 범죄나 인류 전체의 더 나은 삶을 이야기 하는 건, 스스로가 먼저 슬픔을 극복하고 남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과 같은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증언으로 정말 택시 강도 희생자가 줄고, 그 중학생 가해자들이 나중에 사람 하나를 덜 괴롭히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민간인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린다면, 그들의 희망은 그들 자신은 물론 생면부지 타인의 삶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걸 정확히 집계할 수 없을 뿐이죠.) 누군가의 아픔이 다른 누군가의 삶이 된다면, 잔인하지만, 그건 그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시대의 표본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에게 감사하고 죄스럽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의지와 상관 없이 감내했거나 해야만 하는 그들은 너무나 결백합니다. 그저 시대가 무작위로 뽑은 표본이 된 지독히 운이 없는 사람들일뿐입니다. 제가 대신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고, 제가 대신 죽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시대가 그저 절 뽑지 않았을 뿐이고, 그건 내 능력이나 성격과는 전혀 상관 없는 순수 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죽음과 아픔을 감히 딛음으로써 가져갈 내일 하루어치의 삶이란 마땅히 무거워야 합니다. 그런 하루가 모이면 제가 언젠가 받을 수 있는 아픔에 그저 겸허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대를 산다는 것이 뭔지 전 모르겠습니다. 그 정의는 제가 내릴 것이 아니죠. 다만 사람은 아픔을 느끼는 부분이 각자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아픔을 풀어내기 위해 희망을 본능처럼 부여잡는 많은 사람의 성향에서, 아픔이라는 개인적인 짐과 ‘시대를 산다’는 거창한 집단 사상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합니다. 누군가는 아프리카의 난민이 아프고, 누군가는 거리의 노숙자가 아픕니다. 누군가는 청년 실업 문제로 잠을 못 이루고 누군가는 독거노인 문제로 힘듭니다. 그리고 아픈만큼 – 자기 몸 아픈 것처럼 아프다면 - 움직입니다. 이렇게 아파서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시대는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들과 비할 바는 안 되지만 딸을 잃어본 저라도 다른 임산부들에게 좋은 거 먹어라, 많이 쉬어라, 안타까운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각자가 아픈 것은 그 부분에 있어 표본으로서 시대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닐까,  아픈 부분에 반응하는 건 먼저 운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비자발적인 시대 정신을 잇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슷한 문제로 죽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슷한 문제로 시대의 표본이 될 지 모르겠다는 것이죠. 아픔이 갈수록 늘어가는 건 아직도 시대가 샘플 테스트를 다 못 마쳤기 때문일까요. 결국 그 시대란 것도 우리라는 샘플이 하나하나 모이고 살아갈 때 만들어지는 것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그건 결국 우리가 시험 단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걸까요. 달에 갔다고, 영장이라고, 시를 쓴다고, 마음껏 세상을 유린하는 우리는 아직 더 배울 게 많은 것일까요. 샘플 테스트 결과가 이렇게 계속 엉망인데, 잘 배우고는 있는 걸까요. 전 아무래도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기막힌 아픔 중에서 희망을 찾게 되는, 그리고 그 희망이 누군가의 생명이되는 아픔의 순기능을 믿고자 합니다. 아픔 자체가 쌓이는 속도가 아픔의 순기능보다 빠르다고 해서 순기능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있을 왕따 사건을 막았으면 좋겠다는 아이 잃은 어머니의 피맺힌 희망을 누가 감히 부정하겠습니까. 그 희망이 어떤 아이를 얼마나 구할지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먼저 표본이된 이들의 불운한 숭고함에 그저 값싼 감사나 조의를 표하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없어진 하루만큼 제 하루가 무겁도록 기도할 수 없는 가슴으로는 어떤 말도 가볍기만 하니까요. 그들이 하루 빨리 편해졌으면 합니다. 대신 져 줄 수 없는 아픔이라도 간절히 나누고 싶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문득 이건 어떤 부름일까 싶어 두렵습니다. 전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제가 표본이 되는 것도, 누군가 채집되는 걸 보는 것도 모두 너무나 무섭고, 거부하고 싶으니 말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1-02 06:0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Absinthe
11/12/28 00:34
수정 아이콘
너무나 안타깝습니다...삼가 조의를 표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위해 제 자신이 할수있는 것은 무엇일지 자문해봅니다.
하심군
11/12/28 00:37
수정 아이콘
가끔씩은 법이 태초에 만들어진때가 그립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물건을 훔친자는 10배로 물어낸다'
'사람을 상처낸자는 같은곳을 상처낸다'

아마도 너무나 복잡해진 세상에 지쳐서 그렇겠지요. 눈을 치우지 않으면 길을 갈수 없어서 끝없이 눈을 치우듯이 열심히 살다보면 세상이 좋게 돌아가겠죠? 결국 할 수 있는건 잘 사는 거 밖에 없다는게 어찌 보면 슬프네요...
Tristana
11/12/28 00:42
수정 아이콘
적어주신 얘기가
제가 자주 느끼는 감정이랑 비슷하네요.

못사는 동네라 그런지 노인분들이 폐지 줍고 다니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는데
(요즘 추운데도 많이들 다니더군요..
종이류가 많이 나오는 동네라 그런지)

생각만 많아지고
결론은 그냥 빨리 나부터 잘되자...가 되더군요.
슬픈 현실이지만 일단 나부터 잘사는게 우선이긴 하니까요.
EndLEss_MAy
11/12/28 00:45
수정 아이콘
지독히도 슬프면서 멋진 글입니다.
힘든일로 멘탈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밤, 울프님의 글 잘 읽고 잠들러 갑니다.
11/12/28 00:47
수정 아이콘
시쳇말이지만...시대의 아픔이에요.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기에도 공허함이 느껴집니다.
사티레브
11/12/28 00:53
수정 아이콘
날도 춥고 마음도 얼어서 생각이라는게 쉬이 되지는 않지만
끈을 잡고 결과에 증오를 품은 채로 누구때문에 무엇때문에 아픈가 올라가면 한도 끝도 없어
허공에 대고 소리만 치게 됩니다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아요
그래서 사랑 하는건가 하게 되는 건가싶구요
(Re)적울린네마리
11/12/28 00:55
수정 아이콘
너무나 안타깝고 분노하면서도 한편, 나와 내 부모,형제,자매들이 그 표본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잊고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닌지..
나의 망각,무관심으로 또 다른 시대의 표본이 만드는 것이 반복된다면....
언젠간 그 표본이 남이 아닌 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11/12/28 00:57
수정 아이콘
그동안 수동적이었던 것을 반성하며, 방금 민주통합당 당대표 경선에 모바일 투표 선거인단 신청하고 왔습니다...

이제 내가 핸드폰으로 당 대표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거죠...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 가서 신청하시면 됩니다...
http://www.2012vote.kr/
피와땀
11/12/28 01:06
수정 아이콘
이런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한 논리, 명확한 증명으로 사건을 분석해낼수는 있지만, 같이 눈물흘리고 아파해줄수는 없습니다. 단지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사건의 본질을 해결할순 없고, 외부의 상처만 돌봐줄수 있을뿐입니다.

세상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논리적인 분석들이 많지만, 이렇게 "공감"을 할수 있게 하는 글은 드문거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보고,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내사랑 복남
11/12/28 01:22
수정 아이콘
인간은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것 같네요.
밑의 글과 댓글을 읽으면서 너무 머리가 아프고 가슴도 아팠는데
이 글을 읽으니 나 스스로가 멘붕이 되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진짜 모르겠다...
감성소년
11/12/28 17:49
수정 아이콘
뉴스를 너무 많이 접하는 것도 정신건강에는 안 좋을 것 같네요.
몰랐을 수도 있는 끔찍한 사건들을 아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310 훼손. [3] Love&Hate8188 12/01/21 8188
1309 결혼 용어집 : PGR 1%에 도전합니다. [51] PoeticWolf10983 12/01/20 10983
1308 서울에서 하는 '걷는 데이트' 가이드 -1- [28] 凡人11850 12/01/19 11850
1307 환상과 환장, 양치질과 양치기질. [38] PoeticWolf10189 12/01/16 10189
1305 연애상담. [15] Love&Hate10503 12/01/10 10503
1304 허위사실공표죄의 법리 파헤쳐보기 [21] 슬라이더8538 12/01/09 8538
1303 왜 멀티를 먹어야 하는가 [6] Raight8976 12/01/10 8976
1302 [연애학개론] 이별 대처법 [44] Eternity11600 12/01/07 11600
1301 멀티를 먹자 [18] Raight9965 12/01/06 9965
1300 어떤 적과의 화해 [51] PoeticWolf10342 12/01/06 10342
1299 민족사관과 실증사관. 어느 것이 중요할까? [55] 눈시BBver.211055 12/01/05 11055
1298 낡은 기억의 상자 [9] nickyo7921 12/01/03 7921
1297 본격 저탕형 보일러 찬양 포스팅 [14] PoeticWolf8721 12/01/02 8721
1296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짓일까? [35] 눈시BBver.213009 12/01/02 13009
1295 [복습해 봅시다] 세종대왕, 훈민정음 [5] 눈시BBver.29796 11/12/30 9796
1294 [복습해 봅시다] 忠武公 이순신 [16] 눈시BBver.29436 11/12/29 9436
1293 헌법재판관들은 어떤 단계를 거쳐 위헌여부를 판단하는가 - 간통죄를 예로 들어. [10] 슬라이더8334 11/12/28 8334
1292 농구와 LOL [16] 바보소년11071 11/12/30 11071
1291 중국 경제에 대한 잡다한 지식 모음. [42] OrBef10729 11/12/28 10729
1290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23] PoeticWolf11349 11/12/28 11349
1289 민사와 형사 구별하기 [46] 슬라이더10458 11/12/24 10458
1288 [예능] 1vs5vs5 대결의 승자 1, <무한도전> 통계 겸한 나름 정리 [46] 슬러거14317 11/12/23 14317
1287 감히 게임을 하다. [145] PoeticWolf14766 11/12/20 1476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