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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12 02:20:53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3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3)











“어머님 사인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의외의 질문에 외마디 반문이 응접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엄마한테 사인 받는다고 하면
성적표 보여드렸다는 확인서에 서명받는 일만 학교 다니는 내내 경험한 은실로서는 이게 대
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저 멀리 복도 쪽에서 코드네임 ‘먹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4인 1조로, 선두는 방탄방패에 콜트45 경기용 개조 권총, 두 번째는 SPAS-12 산탄총,
세 번째는 G36C, 네 번째는 MP5SD를 든 타격팀이 응접실로 뛰어오다가 중지 명령을 받고
다시 물러가는 군홧발 소리가 요란했다.
외부와 은실의 반응에 수성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머님 사인을…….”
“우리 엄마 사인을 수성 씨가 왜 받아요?”
“엄마가 아니 어머님이 각하시니까요. 대통령이시잖아요.”


아!


“기념 삼고 싶다 이거군요.”
“네, 그겁니다.”
“어디에 사인해 드려요? 물건 있음 줘보세요.”
“잠시만요.”


수성이 가져온 가방 중 커다란 백팩을 뒤지기 시작했다. 미니어처 보드게임 유닛이 담긴 플
라스틱 상자들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은실은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얼굴을 찡
그렸다. 하긴 아이들처럼 별의별 보드게임을 다 하는 사람, 일본 아이돌의 노래에 열광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 고약스러운 기원을 가진 자신만의 피자 레시피를 지녔으며, 젖소 옷과 햄스
터 옷을 사랑하는 사람이 연쇄 살인범이 되기론 좀 힘들 것이다.
뭐 그건 그대로 수상쩍지만.
은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우리 엄마 좋아하나 봐요. 저번에 우리 엄마 찍었어요?”


부산하던 수성의 뒷모습이 순간 멈췄다.


“아, 아뇨.”


은실은 소리 내어 탄식할 뻔했다. 이 사람은 그냥 좋게 좋게 거짓말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살인자 감은 아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정치인 사인을 받아서 어디에 쓰냐
는 질문을 할까 말까 하다가 어쨌든 자신도 아쉬운 게 있으니 서로 교환하는 셈 치자고 생각
하며 가만히 있었다.
수성이 티셔츠 하나를 내밀었다. 검은색 티셔츠 가슴팍에 다양한 면을 가진 주사위가 미니어
처 보드게임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헥사(*육각형을 뜻하며 각 꼭짓점의 거리가 어디에서 출
발하든지 일정하므로 거리에 민감한 전략 보드게임에서 지형 밑판으로 많이 사용되는 도형.)
판 위에 흩뿌려져 있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림 위엔 역시 하얀색으로 “미니어처 보드게임
같이 해요.”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화이트로 직함이랑 성함 크게 써주세요. ‘저도 보드게임 좋아합니다.’란 문구 써주시면 더
좋고요.”
“…….”


대통령을 등에 업고 세라도 불릴 심보인가? 은실은 어이가 없어서 그 다음엔 같이 사진을 촬
영할 수 있을지 묻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수성은 은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재였
다.


“내친 김에 어머님에게 말씀 드려서 우리나라 보드게임 산업 발전을 위해 국립 보드게임 연
구 시설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셨음 좋겠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마로 찰랑이던 강둑에 결국 물 넘치듯, 꾹 참고 넘어갔던 참을성에 구멍이 났다.
은실이 말을 쏟아냈다.


“아니, 이분 웃기시네. 무슨 맡겨놓은 빚 받는 분처럼 굴어요, 왜. 이건 기념 수준이 아니잖아
요. 말하는 패턴이 비리에 속하는 권력형 청탁 수준인데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청탁을 받아요.
나도 엄마 대통령 된 기념으로 명품 가방 싼 거 하나만 사달라고 했는데 혼났는데. 그런 거 걸
치고 다니면 구설수 오른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충분히 아스 님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죠?”
“아스 님은 뭔가 큰 부탁이 있으셔서 여기까지 절 부르신 거니까요. 전 기회를 놓칠 수 없고
요.”


은실은 몇 번이고 무어라 말하려다 그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진짜 그랬다. 두 명이 살해당한데다, 자신 포함 다섯 명이 죽을 뻔했다. 한 명은 대통령의 딸
이고 다른 한 명은 미 대사관 직원의 남편이니 반체제 테러와 반미 테러 가능성을 동시에 받
기에 충분했다. 현장에는 22구경 탄피에 플라스틱 폭약이 돌아다니고, 여기에 뱀파이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증언이 나왔고, 김강 수사반장의 실종까지 추가되니 사태는 비상으
로 치달았다. 수사본부는 두 배로 증대되었고, 소속 형사들은 어떤 단서라도 가져오라고 고
문 같은 닦달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나는 왕따를 당한다는 거야.’


처음부터 담당했던 형사에다 막내니까 원래는 야근 때문에 피곤에 전 몸으로 여기 돌아다니
며 혹사를 당해야 옳았다. 인력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해도 열아홉 명, 조사해야 하는 인원은
2천 명 수준. 당연히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을 판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드
러난 이후 누구도 그녀를 써먹으려고 들지 않았다. 권력 옆에서 이득을 보려면 권력만 하진
않더라도 그 비슷한 체격이 아니면 깔리는 법. 그런데 수사 업무라는 게 잘해 봐야 본전이고,
뭐라도 밉보이면 대박 손해라는 계산을 안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내
내 신분을 숨겼던 판에 이젠 모두 물건너갔다. 가만히 있음 특별대우 받으며 특별히 욕먹을
판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사건을 해결해야 해.’


은실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정도의 교만한 마음은 필요 없었다. 현대의 범죄수사는 고
대 공룡처럼 명탐정 스타일은 앙상한 뼈대 화석만 남기고 멸망하고, 협동과 과학과 시간을
들인 검증과 탐문만 살아남았다. 목표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뭐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단서를 수사본부에 가져다줘야 했다.
은실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을러보았다.


“지금 수성 씨도 유력 용의자 선상에 오른 거 알아요?”
“흥, 그러라죠. 하지만 조사해 봐야 헛것일 걸요? 내가 사람을 왜 죽여요, 귀찮게. 원한은 있
지만 증오하는 정도는 아니거니와 만약 살인을 하고 싶다고 해도 그 시간에 베인 블러드 출
시 정보 예측해야 하고, 리만 러스 탱크 한 대 더 조립해야 하고, 네오디뮴 자석 구입해서 화
염 방사기랑 로켓 발사기를 교체 착탈식으로 바꾸겠어요.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
e Is What You Get, 즉 “보는 대로 얻는다.”의 약자. 화면을 출력물로 그대로 옮긴다는 워드
프로세서 관련 용어이며, 미니어처 보드게임 계에서는 룰 상의 이득을 보려면 미니어처 모델
도 장비가 바뀌어야 한다는 규칙.)를 지키려면 그래야겠더라고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프라모델에 쓸 만한 소형 전동 드릴은 타미야에만 있다는 거. 그것도
무려 조립식이에요. 그래서 교체 착탈식으로 교체하려고 구멍을 뚫고 그 자리에 네오디뮴을
넣으려면 일단 드릴을 조립해야 해요. 웃기지 않아요? 배보다 배꼽이 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둘 다 없는 격이잖아요. 보쉬엔 있는 것 같던데 아직 안 알아봤어요. 생각난 김에 아스 님이
괜찮다면 있다가 인터넷 좀 뒤져봐야겠네요.”
“……증거품의 일환으로 수성 씨의 모든 미니어처 보드게임을 압수하겠어요.”


수성은 약간 움찔했으나 금세 괜찮아졌다.


“더 잘됐네요. 자작으로 만드는 TRPG 시스템이 하나 있는데 머릿속으로 구상해야겠네요. 그
뭐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쓴 작가도 오히려 수용소에 갇힌 뒤 저작활동이 활발해
졌다던데 저도 아스 님 때문에 그 덕 좀 보겠네요.”
“수성 씨는 노벨문학상을 탄 반체제 인사보다는 고집불통 히틀러에 가까우시겠죠.”
“저한테 노벨문학상 비슷한 것을 제시하지 않는 한, 저한테 얻을 것은 『나의 투쟁』 같은
것밖엔 없다는 사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두 사람은 서로 퍼붓던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은실은 밉살스러운 상대에게 감탄과 왠지 모를 재미를 한꺼번에 느끼는 자신에 당황했다.
생전처음 느끼는 묘한 감정이었다.


‘의외로 교양이 좀 있네.’


얼핏 보니 수성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자신처럼 표정에 웃음과 의외성과 친밀함이 버무
려져 있었다.


“아, 음.”


은실은 어색함을 얼른 지우려고 응접실 위, 꽃병, 살풍경한 벽, 뒤에 있는 소파, 수성의 허벅
지(‘어머, 두꺼워. 어머, 내가 뭘 보고 있어?’), 수성의 등짐 가방 한 개, 여행 가방 두 개 등으
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러다.


‘등짐? 여행 가방?’


은실이 물었다.


“오늘도 미니어처 유닛 가져오셨나 봐요. 디앤디?”
“네. 갈아입을 속옷을 안 가져올지언정 미니어처 백을 안 가져오진 않죠.”
“속옷을.”
“네.”
“당연히 칫솔도.”
“네.”
“양말도.”
“네.”
“좀 오래 머무실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전 안 불편해요. 제 냄새를 맡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겠지.”
“……사오라고 시키죠. 그건 그렇고 우리 이렇게 문제 해결을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요?”


누가 들었다면 좀 전까지 사실상 싸우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목소
리는 왠지 한통속인 이들이 협력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웃음기가 어린 친밀함 속에 점점
속삭이는 소리로 변했다.


“가져오신 디앤디 미니어처 유닛으로 한 판 해서 제가 이기면 제가 원하는 대로, 수성 씨가 이
기면 수성 씨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요. 어때요?”


수성이 코웃음을 쳤다.


“절 이기긴 힘드실 걸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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