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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11 11:32:12
Name 화잇밀크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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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민들레 꽃 길 - 1 -


※ 이 글은 고증과는 관련이 먼 글입니다.

봄에 나는 바람은 꽃의 탄생을 오색빛 찬가로 따스하게 노래하고,
여름에 나는 바람은 무성한 풀잎들을 부대끼게 하여 아우성을 지르게 하며,
가을에 나는 바람은 단풍을, 은행을, 떨어지는 낙엽을 휘날린다.
하지만 겨울 바람은 겨울에 생명이 없기에 홀로 차갑게 세상을 가른다.

그렇기에 가장 차가운 겨울 바람 중 한무리는 갈 곳 없는 외로움에 자살하듯 호수에 빠져 바람 물결으로 승화됐고,
그 파문이 잔잔히 퍼져오는 호숫가 기슭에 한 척의 나뭇배가 줄에 묶인 체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 앞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 더욱 깊어진 겨울에 빠져있는 내가 서 있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작은 상자와 짙은 슬픔을 그 배에 싣고, 강줄기의 중간까지 노를 저어가,
배에 누운 체 한동안 물결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공허함이 가득 차있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티 없이 맑은 청빛으로 나를 마주보았기에 난 나의 구름낀 마음이 들킬까봐 눈을 감아버렸다.
배에 타기 전 애써 삭히며 생각하지 않으려했던 기억과 마음들이 가슴 가득 차버렸고 어느 새 눈가에는 차가운 눈물이 고였다.

나에게 작은 상자를 남겨준 이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같은 존재였다.
평소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은 거짓이라고 사람을 알고 오랫동안 함께해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되어도
그 사람이 좋아야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었다.
정이 깊어 잊을 수 없게 되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 있었기에 오랫동안 봐왔던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던 일이었을 것이다.

세월이라는 작은 눈덩이를 굴리다보니 어느 새 사랑이라는 눈사람이 완성되어버렸다.
어릴 때의 풋풋함은 커가면서 청순함으로 은은하게 바뀌었고 천사같은 마음씨는 아니었으나
현실적인 착함과 양심을 가진 보기드문 여자였기에, 함께 한 추억이라는 눈밭에 굴린 눈덩이가 눈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리라.
나와 함께 웃어주고 울 적에 같이 눈물을 흘려주었던 일들은 이미 사랑으로 이루어진 눈사람이 되기에 모자라지 않았을 것인 시기에,
눈덩이가 충분히 커졌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아직은 눈사람을 만들 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을뿐.

그렇게 옛 생각을 하며 표류하다가 정신을 추스르고 그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상자를 열었다.
상자안에 들어있는 것은 곱디 고운 잿빛 가루로 그녀의 화장재였다.

그 가루를 한 줌들어 하늘을 향하여 손을 올렸다.
가루를 움켜쥔 주먹의 힘을 서서히 풀자 잿빛들이 흩뿌려지면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 강물에 스며든다.
겨울에 날아다니는 흰가루는 언뜻보면 싸락눈을 연상시켰고 작고 작은 알갱이,
눈가루같은 재가 떠나가는 것은 마치 내 안의 눈사람이 조각나다 못해 잘게 잘게 부셔져 날아가 버리는 듯해 더욱 더 가슴이 저미었다.

바람에 가루를 다 날려버렸는데도 끝까지 나와 같이하고픈 듯 손에 묻어 남아있는 가루마저 손을 물에 담궈 씻어내 완벽하게 이별을 고했다.

배에서 내려 땅을 밟은 후에도 마음의 갈 곳을 잃어 발걸음의 나아감도 정처없이 이 곳, 저 곳을 헤메였다.
구불구불 휘어진 산길을 걷다보니 아까의 청아했던 하늘은 사라지고 구름이 짙게 뭉쳐 하늘마저 어두어져버려
맑음이 사라진 하늘은 부담없이 마주 할 수 있었건만 곧 그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비였으리라. 지금이 겨울이 아니라면.
슬픈 상황에서 흔히 나오는 그 비를 맞으면 어떤 심정일지 모르겠지만 내려오는 눈에는 허탈감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뻔한 연출이 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항상 연출과 같이 형성되는 슬픔에 묻어 희극같아 실성한 듯 웃어버린 것이다.

어느덧 눈이 세상을 감쌌다.

계속하여 정처없이 산길을 걸어가던 중 눈으로 뒤덮인 비탈길에 누웠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회색빛 하늘을 반사하여 그 자신도 잿빛을 띠어 뭉쳐 굴러다니는 먼지덩어리 같았다.
그래……. 저건 눈이 아니라 먼지다.
먼지들은 팽글팽글 돌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땅에 쌓이며 세상을 더럽혔고 그 어지러운 광경에 현기증을 느낀 난 누워있는 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감각들이 차단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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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소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세운 몸은 따스한 봄 바람이 불어와 감싸앉음을 느꼈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누웠던 백색 눈으로 덮인, 눈밖에 없는 차가운 비탈이 아니었다.
앞에 펼쳐진 세상은 수수하지만 아름다움을 가득 담은 들꽃과 잔디가 어우러진 꿈에서나 볼 듯한 동산이었고
조금 전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모습에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보세요. 괜찮으신가요?”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이 사람이 나를 흔들었나’라고 생각하며 이소는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아니면 눈밭에 누운 체 그대로 죽었으리라고.
눈 앞에 보인 사람은 조금 전 자신이 마음의 이별을 고한 사랑했던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로 이어지는 색의 연결을 가득 담은 무지개가 땅에 박힌 듯,
이소가 눈을 떠서 본 세상은 꽃과 풀과 나무와 강이 어울려 그 색의 연결 속에 오만가지 빛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 화려한 연회 속에 참석해있는 여인은 동참한 자연보다 아름다움을 발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소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녀와 같은 얼굴으로.

이소는 생각했다. 눈이 오는 비탈길에 누워 잠이 들었으니 꿈을 꾸는 것이 아니면 아마도 얼어 죽었으리라.
꿈이라고 하기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곧 자신이 죽은 것이라 단정짓게 되었다.
사후세계가 정말 존재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존재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난 죽은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던 바가 말로 튀어나왔다. 그 말은 들은 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소에게 역으로 물어봤다.

“죽다뇨? 버젓이 눈을 떠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여인의 말은 이소가 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말은 그에게 혼란을 가중시켰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이소는 여인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시대는 터무니없게도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지 얼마돼지 않은 통일신라시대였고
여인은 자신의 이름이 민들레라고 했으며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관이 직업이라고 했다.
천관인 그녀가 하늘을 모시러 산의 꼭대기에 오르던 중 비탈길에 이소가 누워있는 것을 해가 뜰 무렵 발견했었는데,
해가 중천에 띄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도 그 자리에 계속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해서 그를 깨웠단다.
이소는 난감했다. 말로만 듣던 시간 이동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 이동보다는 차라리 꿈이 현실에 가까울 터였건만 꿈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의 현실감은 꿈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특이한 옷을 입고 계시네요. 머리카락 색도 흙빛이고…… 혹시 바다 건너 나라에서 오셨나요?
그들은 우리 신라인과 다른 모습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민들레가 의문을 표하며 말했다. 그녀의 질문은 당연하리라.
이소가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양복이었고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 그녀로써는 처음보는 것들 투성이라 자기와는 다른 나라에서 난 것만 같았다.
이소는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고민하게 됐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돼는 상황에서 답하기 힘든 질문까지 받아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 되자 그는 그냥 뒤로 누워버렸다. 그러나 자연스레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하나 없어 태양의 강렬한 빛으로 이소마저 배척해버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소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퍽’

숨결의 마지막 끄트머리가 거의 사라지던 순간 이소는 복부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봐요. 실컷 제 얘기만 듣고는 당신에 대해 물어보니까 누워서 한숨쉬며 제 질문을 무시해버리나요? 예의가 없는 사람이군요.”

아니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배를 때리는 사람은 예의가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이 든 이소였지만 발단을 만든 것은 자신이었기에 반박할 수 도 없었다.
다시 따져들기 전에 아까의 질문에 대답부터 해야 할 처지였으니 말이다.

“깨어나기 이전의 기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눈을 떠보니 이곳에 있네요.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급하게 만든 거짓말. 아까의 무시마저 감싸 안는 핑계.
자신은 무책임하다고 표현하는 모른다는 대답을 약간만 비틀어낸 말은 이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궁핍해보였지만
이보다도 효과적인 것도 없을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은 민들레가 우려의 눈빛으로 이소를 바라봤기에 확실히 효과를 발휘한 듯 했다.

그 후로 이소와 민들레는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소는 이런 상황에서 책이나 영화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상투적인 기억상실증을 앞 뒤 고려하지 않고 말을 했지만,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기억상실증이란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있지 않았던 터였다.
민들레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크나큰 의문은 가지고 이소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몇몇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 이소는 몇 차례 곤란을 겪었지만 그런 질문에는 모르겠다고하면 그만이었고
처음에는 말하기 껄끄럽던 모르겠다는 거짓 섞인 대답도 몇 번을 반복하니 너무도 쉽게 나오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버렸고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도 점차 붉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노을지며 점차 해가 저물려 할수록 민들레의 귀가 시간도 점차 가까워졌다.
아무리 달이 보름달로 본연의 힘을 모두 발휘하더라도 희뿌연한 청광으로는 해와 같은 밝음은 무리인지라
다른 곳에서 빛을 구하기 힘든 이 시대에서는 해가 지기 전 집에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민들레는 저가는 해를 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이소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를 나눌 때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앞으로의 일이 이소에게 걱정으로 다가섰다.

“으음……. 어떡하지…….”

이소는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기에 기억을 잃은 것보다 더 난감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고민에 빠져있는 그를 보며 민들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소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이소씨, 제 종이 되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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