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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3/27 11:49:22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5
지난 글(https://pgrer.net../freedom/102725)에서 이어집니다.

6. 움직이는 간절, 행동하는 기도
자폐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그 약이 도착했다. 아이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잘 먹일 일만 남았고, 약효는 하늘의 뜻에 맡기기만 하면 된다며 각오를 다졌다. 부성애 잔뜩 담긴 진심이었다. 가상하도록 간절하긴 하지만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생각이었다. 창조 순서상 업그레이드 버전인 여자는 약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고차원적인 연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식이’였다.

원래 약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면서 효과를 보려면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 막내가 먹을 약은 ‘장을 다스려 뇌를 온전케 한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더더군다나 뭘 먹고 마시는지가 중요했다. 아내는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이 모여 있는 카톡방에 여럿 가입해 정보를 구하고 있었고, 아이에게 뭐가 위험하고 뭐가 도움이 되는지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익명의 다수에게서 나온, 의학적 근거가 부족한 정보였기 때문에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낮은 신뢰도가 혼란을 증폭시켰다.

예를 들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것 중에 탄수화물이 있었다. 키토 다이어트 식단(이런 게 존재하는 줄 처음 알았다)을 유지해야 약효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조언들이 적잖이 나온 것이다. 아내는 거기서 막혔다. 아이는 아직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유아였고, 성장을 위해서는 고른 영양분을 섭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폐 증상을 보이면서 발달이 지연되고 있는데, 성장의 골든타임에 필요한 중요 영양소 하나를 끊는다?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카톡방에 물어도 속시원히 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정보의 신뢰도가 중요했다. 아내는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채고 주변 지인들, 즉 좀 더 우리의 사정을 살갗으로 느껴 맞춤형 솔루션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영양이나 의학, 심지어 유전학을 공부했던 친구와 언니들(어쩌면 오빠들도...나는 알 수가 없다)을 떠올려 연락했다. 나도 아는 교수님과 여러 번 통화를 했다. 누구에게서든 비슷한 답이 나왔다. ‘이론은 이러저러 한데, 그게 지금 그 아이에게 적용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맥락이었다. 쉽게 말해 전문 지식과 안타까운 마음은 공유할 수 있지만,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정보 습득을 멈춘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늦은 밤 식탁에 마주 앉아 기도하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반복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골든타임이 지날까봐 노심초사했다. 한 시간이 아까운 아이였다. 이럴 땐 단순한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내가 칼을 빼들었다.
“어차피 지금 약 한 달 분이잖아. 딱 한 달만 키토인지 뭔지 해보자. 그러고 경과를 보고 결정하자.”

딱 한 달만.

인간은 자기가 영원히 살 수 없는 걸 깨달으면 마음이 지혜로워진다고 했던가. 시간 제한을 두기로 하니 의외로 쉽게 방향이 정해졌다. 아내는 그 식탁에 그대로 앉아 식단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로지 단백질과 잎사귀 채소로만 구성된 음식을, 아이가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끔 만들어야 했다. 어떤 고기와 어떤 채소가 좋은 맛의 조합을 이루는지,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고기만 먹어 혹시 변비가 생겼을 때 먹일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아보며 메뉴를 짰다. 지난 10년 내 식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성이었다. 역시 지 자식이 최고.

작업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낮에는 좋은 품질의 재료들을 공수해야 했다. 돈이 펑펑 넘쳐나는 집이 아니었고 한약 값이 이미 적잖이 들어갔기에 식재료 가격까지 고려해야 했다. 아내는 어디서 그렇게 할인 정보를 얻는지 잘도 좋은 물건들을 저렴하게 공수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직접 차를 몰고 식자재 마트 투어를 하기도 했다.

게다가 먹일 대상은 아직 씹는 행위가 되지 않는 어린 아이였다. 그 단백질과 채소들을 죽으로 만드는 단계도 거쳐야 했다. 마트에서 돌아온 아내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고기와 채소를 삶았다. 날마다 고기 삶는 냄새가 집에 넘쳐났다. 그 고기를 꺼내 잘게 썰고, 잘게 썬 걸 다시 믹서기에 갈았다. 전동 믹서기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곧 수동 믹서기를 썼다. 삶은 고기를 수동 믹서기로 갈아보았는가? 고되다. 열혈 아내이지만 이것만은 할 수 없어서 남편 찬스를 썼다. 일 때문에 아내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있던 터라, 이거라도 도와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고생 앞에 장사 없다. 세상이 좋아져 요즘은 각종 이유식을 포장해서 팔기도 한다. 그 중에 고기를 깨끗하게 갈아낸 토핑도 있다. 아내에게 써보자고 제안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거절했다. 거절할 때마다 내가 그날 밤 내렸던 결단이 아내로부터 돌아왔다.  
“한 달만 해보자.”
정말 아내는 할 걸 다했다. 기도도 열심히 했다. 아내에 의하면 기도를 하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다운그레이드 버전인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듯 말듯하다.

정말 감사하게도, 아이가 잘 먹어줬다. 새로운 고기와 야채 조합을 먹일 때마다 우리는 긴장했는데, 막내는 까다롭지 않았다. 넙죽 입을 벌릴 때마다 우리 네 식구는 아이를 둘러싸고 환호했다.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막내는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면 자기도 박수를 따라 친다. 그러면 그 박수를 보고 우리 식구는 반사적으로 환호를 지른다. 우리 가족만 아는 기쁨의 인이 그렇게 하나 은밀히 새겨졌다.

어느 날 둘째가 막내의 약을 손가락에 찍어서 맛을 봤다. 내심 궁금했었나보다. 즉시 얼굴이 구겨졌다. 세상에 그렇게 쓴 걸 처음 먹어본단다.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한약이나 홍삼을 유독 좋아했었다. 쓴 것에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 그렇게 말하니, 막내를 다시 보게 됐다. 막내는 그 한 달 동안 한 번도 투정하지 않고 약을 꼴딱꼴딱 야무지게도 삼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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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7 13:43
수정 아이콘
꼭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힘내세요
무엇이든존버하세요
25/03/27 15:16
수정 아이콘
올려주신 글 다 읽고 왔습니다. 특별하지만 소중한 일상들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5/03/27 15:21
수정 아이콘
아이가 눈부시게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세이슌
25/03/27 20:05
수정 아이콘
특히 아이들은 안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해바라기
25/03/28 08:48
수정 아이콘
응원합니다!
도르래
25/03/28 09:06
수정 아이콘
하시는 방법들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효과가 아이들마다 차이가 많아서 단순하게 이렇다저렇다 말하긴 힘들지만.. 그건 다른 치료들도 마찬가지니까요. 고생하시는 만큼 개선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25/03/28 11:14
수정 아이콘
"어떤 약이나 치료가 옳다,틀리다...이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현대의학으로도 단정지을수 없고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쌓인 임상데이터들로 부모들을 이끌어주는 존재이지만 결국 치료방향의 선택은 부모의 몫이 되는게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동안 가장 힘든일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비슷한 처지의 다수로부터 듣게되는 비법이나 사이비종교마냥 입증 가능하지 않은 여러 상업적 치료들을 걸러내는것도 온전히 부모의 몫이고 가끔은 그런것들에 흔들릴때도 있지요.

아이를 위한 선택이 어린자식은 자의적 선택이 가능하지 않기에 오로지 부모인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고,그 결과는 당장 눈앞에 똭! 보이는것도 아닌데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성장과정을 거쳐야 그나마 눈에 보이는데 그 시간이 흐른뒤에 재수정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반 아이들과 다름에서 오는 육아의 어려움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모로서의 선택해야하는 순간들의 괴로움이 훨씬 컸어요.

100%정답도 없는 선택지에서 아이를 위한 최선의 답을 정하고 그 결과는 당장 알수도 없는데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것이되는 이런 막중한 결정을 아이는 한창 뇌성장중인 이 골든타임에 무조건 내려야만한다!... 얼마나 무거웠던지요.

특히나 우리 아이가 가진 이 자폐스펙트럼은 "스펙트럼"이란 명칭답게 어찌나 아이들마다 다 제각각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어떠한 전형적이고 공통분모적인 몇가지를 제외하면 아이들마다 다 다른 케어법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어느정도 아이가 자라고 부모인 나도 한숨 돌리고 되돌아보니 아이를 키운다는것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우리 아이가 특별한 아이라 현실적으로 좀 더 몸에 체감되는 어려움이 있는건 맞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아이들도 다 제각각 다르고 다른 어려움이 있고 부모로서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이 자라나는거겠죠.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가진 목표는 공부,좋은 직장,성공 이런것이 아닌 성인이 되었을때의 "자립" 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져보면 다 그런것 아닌가 싶은 요즘 시대네요.

어쨌든 저는 매 순간 내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하며 아이에게 내 역량으로 할수있는 모든 것들을 해왔기에 후회나 아쉬움도 없고 시간이 약인듯 한결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글쓴분도 와이프분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잘하고 계시다고,그것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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