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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11/17 14:57:36
Name 한빛짱
Subject 허재의 일기
토요일 오후 5시. 태능 선수촌을 나와 잠원동 집으로 향한다.
오늘따라 도로는 사정없이 막히고 마음만 턱없이 바쁘다.
지금쯤 아내 미수는 저녁을 짓고 있겠지. 웅이 녀석 얼굴이 아른거린다.
허 웅, 사내다운 사내가 되라는 의미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돌이 채 못 된 웅이는 나를 닮아 튼튼하다.
이번 주 내내 태능에 들어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열릴 세계 농구선수권 대회를 준비하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유택이 형을 제외하고는 팀에서 내가 제일 고참이 되었다.
눈 깜짝 할 새다.
벌써 서른하나. 꽤나 열심히 살아온 것같은데도 어디론가 나이를 죄다 도둑 맞은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신호등이 바뀌었나 보다. 비명처럼, 뒷 차가 빵빵 소리를 내지른다.
차는 이제 겨우 목동 사거리로 접어들었다.
내일은 아버지를 뵈러 논현동 집에 가야겠다.
찾아 뵌 지가 스무 날도 더 된 것 같아. 아버지는 요즘 고혈압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모처럼만의 일요일, 편하게 쉬지 왜 왔냐고 한 말씀하시겠지만 그래도 반가워 어쩔 줄
모를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허재도 아버지 앞에서는 꼼짝 못하더라고 어떤 기자는 농담 삼아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여느 아버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부친이 내게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나는 평생가도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다. 아버지의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농구스타' 허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게 두 가지 살거리를 주었다. 농구와 낚시.
내가 농구를 시작한 건 국민학교 4학년 때가. 특별활동 시간, 우연히 농구공을 잡았던 것이
어느덧 20년째에 이른다.
낚시는 다섯 살, 유치원도 다니기 전에 입문했다.
농구공보다 낚싯대를 먼저 잡은 셈이다.
지금도 차 트렁크에는 오랜 세원 정 들여온 낚싯대가 들어 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와 한 남자(?)덕분에 요즘은 옛날만큼 자주 다니지는
못한다. 그래도 틈만 나면, 하다 못해 양어장 낚시터에서라도 물비린내를 맡는다.
중앙대 시절엔 기범이 형, 정수 형, 나, 낚시 삼총사들이 안성 캠퍼스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금광지를 꽤나 파먹었다. 고기를 낚아챌 때의 그 짜릿함은 3점슛이 통쾌하게
들어갔을 때만큼이나 나를 전율시킨다.
풀벌레 울음 소리만이 서늘하게 들여오는 적막한 낚시터에 홀로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무리했던 그간의 플레이, 헝클어졌던 나 자신, 크고 작은 신경전,
세상의 잣대 들에서 조금씩 해방된다.
새벽녘이면 서서히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다시 용기가 가슴에 차오른다.
내가 낚시의 참맛을 알게 된 건 전적으로 마버지 덕분이다.
CIC(군방첩대)에서 근무하다 72년 퇴역하신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낚싯대를 들러 매고
어디론가 떠나는 낚시광 이셨다.
아버지가 낚시를 나갈 낌새를 보이면 나는 울며 조르며 시위를 벌였고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막내 아들을 군용차에 태우고 낚시길을 떠났다.
호랑이가 잡아간대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 준다는 소리에 뚝 하더라는 옛날
이야기처럼 내가 꼭 그랬다.
재야, 자꾸 그러면 낚시 안 데려간다, 하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를
일이다. 땡볕에 앉아 왠종일 찌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놀이'가 그렇게나 재미있어
보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놔둔 채 난 들판에서 뛰어 놀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아버지에게로 쪼르르 달려간다. 나는 옆에 놓은 물통을 들여다본다.
언제 잡았는지. 고기 몇 마리가 흐느적거리고 있다.
그러면 나는 손으로 쿡쿡 찔러보며 이건 뭐야, 조건 뭐야 하며 일일이 신원확인을 한다.
국민학교 2학년 땐가, 낚시를 하고 싶다고 조르자 아버지는 한 칸짜리 조그만 낚싯대를
사주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멀지 않은 신갈지-고삼지에서 초보꾼 딱지를
뗐다.
사실 내 낚시 경력은 그다지 대단치 못하다.
중학교 2학년 봄, 충청도의 어느 저수지에서 낚은 28센티짜리 붕어가 낚시 경력 20년을
통틀어 최대어다. 물론 양어장은 제외하고 말이다.
아버지와 나의 여행은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주 되풀이되었다.
국내 저수지는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지 싶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농구수업을 받게 되었다.
낚시보다 농구가 더 좋아졌다.
나는 열심히 연습했고 기량은 날로 늘어갔다.
주위에서는 다들 나를 치켜세웠다. 철없게도 나는 우리나라 중학교 전체를 통틀어 나만한
선수가 없다는 자기도취에 빠져들었다. 농구연습으로 바쁜 척하는 나를 이번에는 아버지가
졸랐다. 지금도 아버지는 정신수양과 인내력 기르기에 낚시만큼 좋은 특효약은 없다고
믿는, 정통 낚시꾼이시다.
아버지는 내가 자만에 빠질까봐 두려워하셨고 그런 만큼 나를 엄하게 채찍질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동대문에서 직물도매상을 하셨던 아버지는 경기가 있을 때면
빠지지 않고 찾아오셨다.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합숙 때문에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아버지가 스탠드에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 쫓아다니시느라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담배 세
갑을 태우시게 된 것이다. 다행히 87년 이후론 담배를 끊으셨다.
아마도 그때부턴 나의 플레이를 믿게 되어 가슴을 졸이시지 않아도 된 듯하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훌륭한 장외 코치셨다. 경기장을 일일이 따라다니시며 기록하신 글들과
사진, 스크랩 등이 무려 51권에 이른다.

지금까지 나의 농구 인생이 그 앨범 속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버진
그 농구앨범을 펴놓고 잘잘못을 평해주신다.
지금도 경기를 잘못 했다 싶으면 영락 없이 아버지께 꾸중을 듣는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혼자 잘하면 소용없다.
다른 동료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철없이 어린 시절부터 멋진 농구선수가 나의 꿈이었고 아버지도 내가 훌륭한 농구선수가
되기를 원하셨다. 농구를 처음 시작하던 동북국교 4학년 때부터 우리집 정원에는 농구
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건 폼으로 갖다 놓은 혹은 어쩌다 한번씩 넣어보는 장식물이
아니었다. 해가 저물어 링을 분간할 수 없을 때까지 슈팅 연습을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코치를 해가며 옆에서 공을 던져주었다.
정원에 있는 몇 그루 나무들은 나의 적이었다. 나는 그 적들 사이를 드리블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그 외에도 매일 줄넘기 6백번씩과 복근운동을 시켰다. 그때의 지겨운 줄넘기
덕분에 몸이 빨라지고 균형이 잡힐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내 뒷바라지에 신경을 썼다.
그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큰 누나는 연습에 보탬이 되라고 특수안경과 특수 손장갑을
보내주었다.
유리알 없이 눈 밑에 가로로 넓적한 테만 있는 그 안경은 아래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어
순전히 손의 감각만으로 공을 컨트롤해야 했다. 그 안경은 발 아래나 공을 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손바닥에 닿아도 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손가락만으로 드리블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이충희 선배가 곧잘 비교되기도 하지만 슛 스타일에 있어서 우리 둘은 확연하게
다르다. 이 선배가 볼을 손바닥에 밀착시켜 주로 좌우 외곽에서 넘어지는 듯 쏘는 조금은
이질적인 슛 스타일이라면 나는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던지는 교과서적인 정통방식을
고집하는데. 아마도 특수 손장갑 덕분에 손가락만으로 공을 다루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때문인 듯하다.

아버지는 내 체력관리에도 철저하셨다.
나의 체력 보강 식품은 구렁이와 뱀이다. 솔직히 나는 구렁이와 뱀을 일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다. 일 년이면 두세 마리의 구렁이와 작은 뱀 150마리가 내 뱃속으로 들어간다.
녹용, 인삼, 토룡탕, 개소주, 개구리탕 같은 다른 보약도 먹어봤지만 뱀 이상은 없는
것같다.
특별난 부자는 아니었어도 내 보약만은 절대로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처음 먹을 때 구렁이 한 마리에 17만원 하던 것이 지금은 백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내 플레이의 원동력은 강력한 파워다. 사람들은 내가 허리, 어깨, 하체가 좋다고들 한다.
날아오는 공을 점프하여 한 손으로 받아 공중에 뜬 채로 곧장 다른 방향으로 패스를 한다.
또는 링 근처의 고공 패스를 받아 논스톱으로 골 밑 슛으로 연결시킨다.
보통 허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아버지의 구렁이 덕분이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뱀이 아니어도, 나는 튼튼한 체력과 운동신경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우리집은 원래 이삼 대 걸러 장사가 나는 집안이라고 한다.

한때 아마복싱을 하셨던 아버지는 웬만한 요즘 젊은이들보다 키가 크시다.
내 키가 188인데 아버지가 181이시니.. 뚝, 뚝. 빗방울이 하나 둘 들린다.

비가 오나보다.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테이프를 튼다.
치르르 테이프 감기는 소리가 듣기좋다. 미드나이트 블루가 흘러나온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팝송인데 무척 오랜만이다. 이제 면목동이다.
아무래도 7시는 되어야 집에 오착할 듯하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지난 번 논현동 집에 들렀을 때 서가에 열을 지어 꽂힌 농구 앨범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중 1때의 앨범 맨 마지막에 <중 1을 마치면서>라고 아버지가 정성들여 기록하신 글이 눈에
띄었다.

<3학년 선수들이 1년간 전승이란 좋은 기록을 세우는 동안 (허)재는 매 시합마다 몇 분씩은
뛰었다. 물론 1학년 선수 중 재만이 뛰었지만 뛰는 시간이 더 많았더라면 경험과 기량이
더욱 발전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8월에는 교환경기차 어린 나이에 일본에도 다녀왔다. 2, 3학년 선수들은 10만원의
왕복 비행기값만 지불하였는데 재만 1학년이란 까닭으로 80만원을 내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비용이기에 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아직 철없는 나이 탓인지 꼭 가겠단다.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다녀오게 하였지만 무엇을 얼마나 느끼고 배워왔겠는가.
여하튼 다녀왔으니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길 바란다...>

나는 아버지의 결정이면 대체로 따르는 편이다. 그것을 두고, 부모님께 지나치게 의존하는
막내 기질 때문이 아니냐고 짓궂게 묻는 기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파파보이라서가 아니라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아버지가 워낙 헌신적으로
보살펴 오셨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아버지의 뒷바라지 속에 나의 농구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용산고 2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뽑혀 필리핀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농구대회에 참가했으며
대학 1학년 때는 태극 마크를 달았다. 중앙대 시절에는 60여 년 연세대 호시절을 종지부
찍고 대학은 물론 실업팀까지 휘어잡았다.
88년 기아에 입단해서는 92~93농구대잔치까지 5연패를 기록했다.
대학 경기는 참으로 순수한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많은 스카웃 제의를 뿌리치고 중앙대를 택한 것은 농구선수로서의 성장가능성을 보았던
때문이다. 중대에는 기범이 형이나 유택이 형 같은 장신 센터가 있었으나 가드는 약한
편이었고 내 판단은 적중했다. 그 땐 정말이지 걸리는 것 없이 마음껏 뛰었다.
그 시절에 붙은 별명이 하나 있다. 허 똥, 어감이 좀 요상할 진 몰라도 의미는 깊은
별명이다. 공격형 가드였던 중대 시절, 정봉섭 감독님이 다른 사람의 밑거름이 되라고
붙여준 것이다.
중 1에서 고3동안 양문의 코치님에게서 농구의 기본을 익혔다면 정봉섭 감독님으로부터는
기술과 체력관리, 인간적인 면을 배웠다. 정 감독님과는 중학교 때 이니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잇다. 중앙대가 당시 체육관이 없어 용산고에서 주로 훈련을 했기 때문에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정 감독님은 코트에서는 아주 무섭지만 경기장을 떠나면 부드럽고 자상해서
어떨 땐 친 형님같기도 한 분이다.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집에서 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중앙대 시절에는 안성 캠퍼스에서
합숙소 생활을 했고 84년 말 대표선수로 뽑힌 뒤로는 안성 합숙소와 태능 훈련원을 오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불행한 청춘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대학 4년동안 그 흔한 미팅이나 데이트를 한번도 못해 봤으니. 365일 합숙과 고된 훈련
덕에 여자라곤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감독님이 워낙 엄격했던 탓이기도 하다.
술 먹지 말 것, 담배 피우지 말 것, 책임지지 못할 연애는 하지 말 것,
부모님께 효도할 것, 중대 농구부원은 누구나 이 네 가지를 정 감독님과 굳게 약속해야
했다.
88년 대학을 졸업하고 기아에 입단한 후로는 판교 기아 합숙소에서 합숙 훈련을 했다.
실업팀 선택을 앞두고 매스컴에서도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현대난 삼성팀의 플레이를
좋아했고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기아에는 몇 년씩 한솥밥을 먹어왔던 중대
선배들이 있었고 대학 때의 기세를 그대로 재현하고픈 마음 또한 컸다. 돈 때문에 현대나
삼성을 택했다는 구설이 듣기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 감독님과 아버지의 생각도 그러하셨다.
그리고 기아에서 우리는 또 한번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6연패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우리는 다음 번을 기약한다. 91년 봄까지만 해도 나는
사실 좌절이라든지 슬럼프라든지 하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다.
농구를 시작한 이후로 지는 경기를 안해 봤으니 고비나 좌절이 있을 수 없었다.
좌절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중학교 때부터 당당한 주전으로, 벤치에는 앉아 본 적이
없는 내가 6개월 출전정지 처분을 받고 대표팀에서도 탈락하고 만 것이다.

91년 봄 부산에서 있었던 현대와의 90농구대잔치 최우수팀 결정전이었다.
골 밑을 파고들다 임달식 선수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고 넘어진 나는 순간적으로 냉정을
잃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자 임달식 선수가 내 얼굴을 강타했고 나는 플로어에 벌렁
나자빠졌다. 심판은 우리 둘에게 퇴장명령을 내렸다. 맞은 선수까지도 함께 퇴장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심판에게 항의하며 임달식 선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김성욱 선수가 나를 주먹으로
쳤고 급기야는 패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나는 6개월 자격정지를 받았고 MVP는 물론
득점왕마저 날려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표선수 선발 후보 명단에서조차
제외되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현실로 나타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훌륭한 농구선수로서의 꿈이 단번에 박살이 나버린 듯 했다.
그 때부터 왠종일 짜증만 나는 하루하루 였다. 내가 나를 이기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때는 차라리 농구를 그만두고 누나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유학 갈 생각까지도 했었다.
달식이 형, 성욱이 형은 함께 어울려 낚시질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싶었던 만큼 평소
좋아하던 선배였다. 지금 생각하면 꼭 누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농구대잔치의 승부가 너무
과열돼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상대방이 좀 거칠게 나온다 싶으면 쉽사리 냉정을
잃어버리는 나 자신도 문제가 있다.
경기 스타일도 많이 반성했다. 내 경기스타일이 개인기 위주로 지나치게 화려하기 때문에
나를 마크하는 상대방이 상대적으로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 습관처럼 되어온 플레이 스티일을 하루 아침에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협회에서 92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는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전력보강을 위해 2달만에 징계를 풀어주었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두 달 동안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 나도 농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진정한 선수는 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못된 성깔 때문인지 나는 유난히도 매스컴을 많이 탔다. 나를 두고 칭찬도 많은 반면 그
이상으로 비판도 많은 편이다. 경기 스타일에서부터 사생활까지.
매스컴을 거치면 나는 어느새 이상한 인간이 되어 있다.

그동안 내 이름 앞에 붙어왔던 많은 수식어들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농구천재, 농구의 귀재, 올라운드 플레이어, 농구 9단, 전천후 폭격기 같은 칭찬들 외에도
트러블 메이커, 코트의 불량배란 과히 달갑지 않은 별명들이 나를 따라다닌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국 농구선수는 코트에서 플레이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농구선수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농구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것이고 나는 농구로 내 인생을 승부할 것이다. 나의 변화에는 미수와 웅이의 힘이 크다.

테이프가 끝났나 보다. 비는 오래지 않아 멎을 낌새다.
이제 겨우 영동대교로 들어서고 있다. 영동대교만 지나면 집은 멀지 않다.

결혼하고 나서 많이 어른스러워졌다는 소릴 자주 듣는다.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 사랑하는
아내가 해 주는 밥으로 바뀐 것 외에도 결혼이 가져다 준 변화는 상당히 크다.
막상 결혼을 하자 천재라는 수식어에 따라다니던 망나니, 악동의 오명이 부담스러워졌고
그러한 지적들이 무서운 매로써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농구천재라는 찬사와
코트의 불량배라는 오명을 함께 짊어진 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괜히 나 때문에 아내까지 욕먹이게 될까봐 두렵고 무엇보다 웅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93~94농구대잔치에서는 쟁쟁한 후배들에게 밀려 중도탈락하고 말았다. 당시 훈련은
고사하고 마사지를 받고서야 간신히 한 경기 한 경기 치르는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게다가 기범이 형이 종아리 근육을, 동희가 무릎과 허리를 다쳤고 유택이 형마저 힘든
처지였다. 뒤를 받쳐줄 신인도 없었다. 나만 잡으면 기아는 맥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팀은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상대팀과도 나 자신과도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다.
비록 탈락하고는 말았지만 내 나름으로는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경기들이었다.

어느 신문인가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요즘 들어 농구의 참맛은 도움주기에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농구공을 잡은 지 20년만에 이런 농구의 참맛을 느끼게 된 것 역시도
결혼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혼자서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없듯 농구 역시 마찬가지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혼자 많은 득점을 했을 때보다 손발이 척척 맞는 경기를 했을 때가 더
신바람 난다. 정확한 슛도 중요하지만 매끄럽게 득점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도움주기야말로 농구를 할 맛 나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나 혼자의 무리한 플레이는 소용없다. 농구는 마음을 비우고 팀플레이를 이뤄내지 않으면
안된다.

잠원동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응, 나야."
열려라 참깨하고 주문을 외듯, 응 나야 하는 늘 같은 대답.
문이 열리고 1년 7개월된 아내, 미수의 반가운 얼굴이 나를 맞는다.
  

PS1: 예전에 허재선수가 쓴 일기입니다.
      출처:TG 엑서스 공식홈

PS2:TG엑서스 10연승 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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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logist
03/11/17 15:01
수정 아이콘
저는 예전의 기아시절부터 허재선수를 아주 좋아했었죠.
그 허동만 트리오를 볼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기아 엔터프라이즈때가 제가 보기에는 최고였던것 같습니다.
물빛노을
03/11/17 15:11
수정 아이콘
농구대잔치 시절의 허동택 트리오는 정말 대단했죠... 10년아성의 기아자동차... 제겐 원한의 대상입니다-_-; 저의 우상인 고 김현준 선수를 수없이 꺾으셨던... 허재 선수가 3점슛을 넣은 뒤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띄고 펄쩍펄쩍 뛰고 팔을 휘둘러대며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기아의 강점은 외곽슛과 골밑의 조화(농구라는게 뭐...그렇죠)였죠^^ 한마디로 완벽한 팀이었습니다. 골밑에는 신장 최고 한기범 선수와 기량 최고 김유택 선수가 있었고, 외곽에는 강동희-허재 라인에 SF는 강정수-정덕화-김영만 등으로 바뀌는데... 하여간 대단한 팀이었음엔 분명합니다. 신생팀을 창단 의미에서 삼성과 현대 양대산맥을 배제하고 당대 최고의 대학 선수들을 기아에 몰아준 정책의 실패라고나 할까요-0-; 기아의 창단 시기가 참으로 절묘했지요. 트윈 타워를 상대로 모자라는 기량, 모자라는 키(한기범 207, 김유택 197)로 애쓰던 서대성, 강을준, 훗날의 박상관, 이창수 선수까지... 제게 있어 삼성전자의 애환은 참으로 깊었고, 그만큼 기아에 대한 한은 많습니다-_-^
강동희 선수는 개인적으로는 기아자동차 팀보다도 전, 기아산업 때하고 상무 시절이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련미가 붙고 프로 이후로도 엄청난 플레이를 많이 보여줬지만요.
sunnyway
03/11/17 15:19
수정 아이콘
기아 경기에 흥분하던 예전 기억이 떠오르네요.. TV보며 난리치던 그 때가.. ^^
요즘 TG 잘 나간다고 하던데, 경기 중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흑 ㅠ.ㅠ
왜 우리 APT에는 스포츠 중계 채널은 안나오는 것인지..
좋은사람
03/11/17 15:24
수정 아이콘
허재.. 저는 그선수의 능력은 물론이고 승부 근성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과거 기아 소속에서 현대와의 7차전까지의 피말리는 명승부.. 아직도 잊지 못하죠!
03/11/17 17:41
수정 아이콘
90년도 농구대잔치 현대와 패싸움난 경기는 정말 보는사람도 억울했죠.. (아 물론 저는 나중에 본거지만..)
허재선수가 토크쇼에 나왔을때 한번 언급된 적 있는데, 그때도 흥분하셔서..(-.-;;)
전 허재선수가 기아에 있을 때는 별로 안좋아했는데, 삼보로 옮겨서 PG를 볼 때 부터 좋아지더군요. 슛쟁이 인줄만 알았는데..!!
슛이 조금만 나빴어도 리딩가드로 뛰는걸 오래 봤을텐데.. 아쉽습니다. 하하 ^^;
Eternity
03/11/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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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아 시절 5연패 할 때에 김유택, 한기범의 센터진도 센터진이었지만, 그리고 강동희, 허재 의 득점력도 가공했지만, 지금은 감독을 하고 있는 유재학 선수의 공도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릎부상으로 조금 이른 은퇴를 하셨지만, 아직도 저는 '감독' 유재학 보다는 '선수' 유재학을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온리시청
03/11/17 18:43
수정 아이콘
ㅠ.ㅠ.....조던에 이어서, 또 하나의 나의 우상이 곧 떠날 날이 얼마 남지않았습니다.....
허재때문에 농구를 보게 되었고 조던때문에 NBA에 빠지게 되었죠....
사생활문제(어떤분은 성격이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는 빼놓더라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농구에서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선수죠.....
게임의 지배력에 있어서 야구의 선동렬 같은 존재랄까....
거기에 그의 곁엔 김유택, 강동희가 항상 함께 했었죠....솔직히 제가 기아 팬입니다만 이 팀은 '사기'였습니다....
물빛노을님의 심정이 이해갑니다....비록 삼성을 안좋아했지만 항상 지기만 하는 그들을 보며 안쓰러워하기도 했죠....^^;;
야구의 선동렬, 농구의 허재.....제 시대의 master 입니다.
작년에 우승을 한뒤 좋아서 뛰어다니는 허재선수의 모습을 보며 뭉클했던 생각이 나는군요....^^
껀후이
03/11/17 21:38
수정 아이콘
전 허재의 파워농구 보면서, 또 배우면서 정말 좋아하는 선수가 되버린..
^^
03/11/17 22:33
수정 아이콘
물빛노을님 말씀 읽으니 옛날 생각 나는군요^^ 정말 님 말씀대로 키도 딸리고 기량도 딸리는 센터진들이 순전히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버티다 줄줄이 5반칙 퇴장 당하던 기억들이...^^ 아.. 김현준..ㅜㅜ
03/11/1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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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김윤호 선수가 기아의 트윈타워 상대로 선전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난나야
03/11/18 06:44
수정 아이콘
정말 삼성시절 마지막시즌떄 고김현준-문경은쌍포가 분전한전
그 경기가 생각나네요.문경은선수의 영입으로 드디어 기아의
아성을 꺨수있겠다고 좋아하던 고김현준선수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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