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8/04/10 16:43:05
Name The MAsque
Subject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대통령 이미지와 경부고속도로의 상징성에 관하여 묻습니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나머지 업적 혹은 치적, 혹은 사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먼저 경부고속도로가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떠받드는 사람들이 제일 첫 손에 꼽아주는 업적이 바로 경부고속도로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비용과 대가, 그리고 반사이익을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에 완공된 건축물입니다.

1. 경부고속도로의 첫 번째 상식.
세계에 기록으로 남은 최단기간 도로공사기간.

>그렇습니다. 정말 엄청난 속도로 길을 뚫었습니다. 당시 국가예산의 10배가 공사비로 들어갔으며, 또한  고속도로건설의 무경험과 급행공사 날림공사 부실공사로 또다시 하자보수비로 국가예산 40배가 들어갔으며 사상자 수백명을 낸 대표적인 산업재해 다발공사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인 발상입니까?

2. 일일 생활권을 만든 탓에 산업을 부흥시키고 수출입을 장려하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 건설산업이었다.

> 그렇다면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적 이동수단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승용차, 트럭, 특수차 ,오토바이까지 다 합쳐 전국에 12만 7천대의 차량이 있었습니다. 저 차들을 오토바이까지 다합쳐 100미터 거리로 일렬로 세워 시속 100키로로 달린다면 6일이면 모두 부산으로 보낼수 있었고 4차선으로 가정하면 1.5일이 걸리며 왕복으로 계산하면 0.75일이 걸립니다. 저기서 오토바이를 뺀다면 아마도 12시간이면 전국에 모든 차량을 부산과 서울로 다 모을수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모든 차량이 서울과 부산을 최장거리를 운행시킨 결과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1970년대엔 차량이 거의 없던 시대입니다.
물론 고속도로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과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적으면 넓히는 확장공사를 후세의 한국민들이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까요? 너무 과한 욕심이 아니었을까요?
나라 경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최빈국 2위로서 연간소득이 100불도 안 되는 나라에서 하루에도 몇 십번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그렇게 많은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가 필요했을까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 점이지요.

3. 미래를 내다 본 위대한 사업이다.

>글쎄요.

고속도로는 자동차 달리라고 국가예산 50배나 들여 만들어 논것인데 자동차도 거의 없던 시절에 만들어 놓아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고속도로란 건설학 서적에도 나오듯이 그 나라의 자동차보유량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당연히 고속도로를 자전거 달리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 이후에 급격하게 자동차량이 증가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국민들 경제 수준이 올라가야 그 나아진 생활 터전속에 자동차가 늘지 국민의 삶은 여전히 차를 굴릴 수 없는 사정임에도 50년치 국가세금을 그대로 투자해 만든 고속도로가 과연 미래성을 갖고 있었을까요?
경제에 있어서 미래성이란 현재에서 치러지는 댓가를 딧고 이루어지는 개념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물동량도 충분하지 않고 보유차량도 많지 않은 나라에서 50년치 국가세금을 달러빚으로 지을 만큼 절박했을까요? 4~5년 뒤에 한국 경제의 대박을 예감했을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사후 보유차량과 물동량은 천천히 증가하게 됩니다.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허상 이미지를 언급할 때 꼭 지적되는 부분이 이 점이기도 하지요. 가장 적절하거나 늦어도 1978년 이후에 지었어도 충분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왜? 충분히 국가경제는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예상이 가능한데요. 봉사 문고리 잡듯이 한 10년 있으면 우리 나라는 이 정도의 국가경제력을 가질 것이다라고 예측하지 않아도 충분한데 말이지요.



뒤로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잡고 보니 온통 나라가 외채투성이었습니다.그래서 나라에 돈이 없어 전두환 대통령은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노래를 금지곡으로 만들고 독도에 사람들이 못가게 하는 조치를 취해주고서 일본에 50억불을 외채를 빌렸습니다. 용도는 당연하지요. 외채로 외채를 막아야했습니다. 물론 경부고속도로가 남겨준 거대한 외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져다 준 돈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어서 어마한 외채를 또 끌어써야 했을까요?

쟁점.

경부고속도로가 박정희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지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옳은 의견이라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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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슨생
08/04/10 16:57
수정 아이콘
(토론시간에 잡담하고 떠드는 학생입니다;;)
비슷한 토론주제가 작년에도 올라오지 않았던가 해서 검색해보니 재작년 9월이었네요. 시간이 참 겁나게 빠르네요.
도라지
08/04/10 18:01
수정 아이콘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정말 입을것 안입고 먹을것 안먹으면서 일만 했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상징적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단순한 냄비근성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이룩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입니다.
바라기
08/04/10 22:37
수정 아이콘
스포츠 경기를 보면 하나의 득점 또는 하나의 플레이가 경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현대사에서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상징입니다.

문명이란 게임에서 원더가 가지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원더를 완성하기위해서 때로는 인구나 자원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가속을 합니다. 원더는 확실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거든요.
경부고속도로는 한국의 현대문명에서 그러한 원더에 해당하는 사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율리우스 카이
08/04/1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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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러면.. 우리나라 80년대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마르지않는 29만원짜리통장을 가지신분... 때문이 되는건가요? .... ... 흠...
유대현
08/04/1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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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통령으로서의 박정희는 사실 '신화'에 가깝죠. 정작 박정희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 원인이 그 '경제'문제 였으니까요. 뭐 바라기님이나 도라지님 말씀처럼 상징이라고 봐줄 수도 있지만 당시 한국은 경부고속도로 하나 없다고 근대화 의지가 폭삭 사그라드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아주 큰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통계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그래서 전씨 본인은 본인을 경제대통령이라고 주장하죠. 박정희시절 누적된 외채로 전두환 집권 초기만 해도 외채 때문에 매우 힘든 상황이었으니. 거기다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전씨 집권 이전까지는 무역이 적자였을 거에요.) 누구 한 사람의 덕이라고 하기는 힘들죠. 그래도 박정희 시절 '근대화'라는 기치아래에 고생한 국민들이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닐까요?

p.s사실 누구하나의 치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각 시기별로 하나씩 토대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서... 대외적 조건도 무시할 수가 없고요.
기사도
08/04/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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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했던 했을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일인것 같아요~
박정희대통령이 좋지 않는 점은 정말 많았지만
비교적 경제적으로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들은 저돌적으로 잘 밀어붙였죠...
단, 이런 방식이 지금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TheLasid
08/04/11 17:25
수정 아이콘
상징성이나 정신적인 공로라는 실질적으로 파악이 안되는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단순히 실리적인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합격점을 주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한 공사진행을 통해 낭비된 재원으로 그보다 더 시급했던 분야에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며 과도한 외채를 부담하지 않아 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결국 실리적인 부분만 놓고보면 실패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가 가지는 상징성, 즉 국민의 자신감이란 것 역시 지금의 독도문제를 놓고보면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대로 무리한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인한 외채가 일본과의 독도논란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래 사람들이 독도와 관련하여 느끼는 답답함의 가치를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김효경
08/04/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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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성 없는 권력으로 얻은 치적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조진우
08/04/1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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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김효경님에 의견 동감입니다.. 아무리 경제에 도움 되는 치적이 많다고하나, 정당성 없는 권력, 무분별한 권력남용과 그로인해 엄청 나게 피흘리신분들, 결국 imf도 박정희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죠
말코비치
08/04/1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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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박정희 개인의 공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곳에 글을 쓰는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의 피와 땀이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입니다.

김효경님의 말씀처럼 총칼로 권력을 잡고 그것을 유지한 사람이 치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1차대전에서 패한 후 독일경제를 선진국으로 도약시킨 히틀러도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코비치
08/04/1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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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읽을 책이 없으신 분들께는 김수행 교수의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이라는 짧은 책 읽으면서 보내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소련, 북한 입장은 아님.)에서 쓴 것이라 그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께는 불편하실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진실을 읽고 박정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책 주소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3025754
08/04/12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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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전두환처럼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박정희 정권은 정당한 권력이 맞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도 정당한 권력 맞습니다. 나중에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따로 논의할 일이지, 히틀러가 정당하게 권력을 잡았고, 독일경제를 부흥시켰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08/04/12 01:30
수정 아이콘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할 때, 찬성한 정치인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김대중 씨는 그 당시 대한민국은 농업국가로 가야 한다는 아주 뛰어난 선견지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김영삼 씨 역시 경부고속도에 대해 무한 반대를 했었고요.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경부고속도로 완공되고 나서 몇 십년 지난 후에,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더 잘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공을 인정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많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순신의 공을 인정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뭐든지 다 지난 다음에 입으로 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건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입으로만 경제를 발전시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경부고속도로 깔기 전에는 고속도로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비전도 없던 사람들 이었다는 것이죠.
08/04/12 01:38
수정 아이콘
그리고 도로 한 번 깔고나면 확장공사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처음 깔 때 넓게 까는 게 더 낫습니다. 사실 그렇게 깔았어도 요즘 와서 경부고속도로 좁다고 계속 확장공사 하는 중입니다. 만약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좁게 깔았다면, 어차피 박정희 비판할 사람들은, 박정희가 근시안적이라며,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고 경부고속도로 2차선으로 깔았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비난하려고 마음 먹으면 뭐든지 다 비난할 것 투성이죠.

차량이 없다고 고속도로 깔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도로가 깔리면, 물류가 이동하고, 그럴 필요성이 생기면 차량도 증가하는 법입니다. 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깔아야 했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신념이 너무나도 강해서, 강철같은 의지로 도로를 만들다보니 많은 희생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미있는 희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희생 없이는 얻는 것도 없습니다. 세계 최빈국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한 초석이 세워졌고, 우리 모두가 그 유산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뛰어난 선견지명을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공과 과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 마저도 무조건 과로 만들고 말겠다는 공격적인 관점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대현
08/04/12 01:49
수정 아이콘
위청님// 박정희가 정당하게 정권을 잡은건 처음 3선까지입니다. 나머지는 유신정권.(이 때는 체육관 선거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앞의 3번의 당선 때도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 당선 때는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못 하게 한 후 본인은 배후에서 1년 가까이 준비를 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야당을 분열시키는 정략을 썼으니까요.

본문에 대해 한마디만 더 하자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누구 한 사람의 치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비롯해서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죠. '박정희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를 손꼽히게 잘 살도록 만들었다.'는건 의외로 '진실'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수출드라이브를 했지만 정작 박정희 시대의 무역은 대부분 적자였고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서야 흑자로 돌아섭니다. 또 산업구조를 국가 주도로 급격하게 개편하는 과정에서 외채를 많이 빌렸고 정작 이 투자는 중복투자를 비롯해서 효율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기도 어렵죠. 괜히 전씨가 '경제대통령'이라고 떠벌이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전씨의 정책과 경제성장은 따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여기도 변수가 많기 때문에)

어찌보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정책을 그대로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대상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냈다.'는 생각을 하지만(우리도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이제 이 길로 경제가 발전할거야.=우리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정작 알맹이는 없고(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고속도로=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삶의 질이 외면적으로 보이는 성장만큼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무역적자에 외채에 허덕이는 국고) 되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부실공사로 인한 보수비로 배보다 배꼽이 커진 고속도로=대기업에 의해 굴러가는 경제체제, 후퇴된 민주주의, 외채와 맞바꾼 독도문제)이 심각하지만 우리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끝없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경제정책 그 자체 같습니다.
유대현
08/04/12 01:58
수정 아이콘
위청님// 제가 알기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절대 농업국가로 가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이라는 책을 보면 43번째 글로 울산대 한상진 교수가 쓴 '고속도로와 지역불균형 발전'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는 고속도로 건설 자체에 대해서는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과 긍지를 느낄 일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1967년의 제62회 국회건설위원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머리보다 다리가 크고 양팔과 오른쪽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 같은 건설'이라고 규정했다.

그 의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영남 지역으로의 교통망 집중이 강원.호남과의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목포가 지역구였던 김대중은 그렇다고 해서 호남의 푸대접만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68년의 제 63회 국회건설위원회에서 IBRD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고속도로를 가장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철도조차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호남 차별 정책도 거론하여, 경부선 복선철도에 비해 호남선 철도는 단선인데다가 그나마 낡아빠졌는데도 경부고속도도를 우선 추진하는 것에 강력히 반발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말코비치
08/04/1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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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정책으로 경제가 발전된 것은 일부 수긍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군사독재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민주적 선거절차, 지역 불균형발전, 특정지역 차별이 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잘나서 우리가 잘사는게 아닙니다. 그 시절을 산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 덕에 잘사는 것이지요.
진리탐구자
08/04/12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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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보면 답답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보시는 분들의 주장은 대개 이렇습니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경제적인 영역에서 잘 하지 않았느냐'라고요. 물론 박정희의 경제 정책이 진정으로 성과를 거두었을 수고 있고, 뻥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에 경제적인 영역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고 선언했다면, 경제적인 이야기만 하고 끝내야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박정희 없었으면 안 되었다'라든지, '독재를 눈감아 줄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비약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이런 식의 주장을 펴신 분은 없지만, 분명 나타날 것이라 믿기에 미리 지적을 해둡니다.
율리우스 카이
08/04/12 05:59
수정 아이콘
전 사실 박정희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최소한 유신체제 전까지는요.)

그리고 4.19. 로 인해서 희대의 독재자였던 이승만을 끌어내린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후 집권세력은 어차피 비슷한 친일파가 포함된 윤보선/장면 정부였죠. 제가 그시대에 살지 못했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 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때 국민의 의거를 이용해 집권한 정부 또한 뭐 그리 잘했나 싶습니다. 4.19. 이후 박정희 집권까지의 1년간 극심한 경제/사회불안이 존재했고 그랬기 때문에 박정희가 유신전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국민의 지지를 받은게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분명 박정희는 나라의 발전에 있어서 '개념' 이 있었던 독재자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경제발전이 우리나라 국민의 뛰어남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만, 박정희가 아니라도 가능했다는 점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혹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절반이상의 확률로 우리나라는 이런 기적을 이루지 못했을거라는 정도면 납득할만한 양보가 될까요?

사업가들을 밀어붙여 리스크있는 사업에 투자하게 하고, 수출주도공업국으로의 비전(경부선)을 제시하고, 외채를 도입하고, 고정환율제와 강력한 금리규제를 통해 해외투기세력을 방어하고(미국이 열라 싫어했다죠), 돈많은 졸부들의 재산을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본인또한 축재를 하지 않고(뭐 물론 온나라가 박정희것이었다지만)...... 여튼 지금으로보면, 군부출신의 독재자가 어떻게 저런 선견지명을 가졌을까 하는 것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박정희 집권 당시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던 쪽은 오히려 북한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북한보다도 후진국이었습니다. 가나,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등 우리보다 당시 훨씬 잘살았으나 지금은 우리보다 훨씬 못한 나라들은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 나라국민들이 전부 바보라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고는 전 생각안합니다.

전 솔직히, 당시 장면/윤보선정부가 지속되었다면, (그렇게 많이 쉽게 민주화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을거라고는 절대 생각하기 힘듭니다. 당시 이전투구속에서, 오히려 친일파들은 더 세력을 공고히 했을 것이고, 돈있는 졸부들은 어떻게든 재산 밖으로 빼돌려 자기영달차리기나 바빴을 것이고, 재벌들은 계속 안전한 밀가루나 쌀이나 팔거나 오퍼상이나 계속 하고 있었겠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그것이 그랬듯이요. 그게 민주주의니까요. 국민들은 열심히 투표했겠지만은, 지주계급들은 계속(상당히 오래) 집권세력으로 남았을 거고.. .. 그게 민주주의니까요.

더불어 IMF의 원인에 대해 참 많은 수업도 듣고 했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왜 IMF가 박정희 탓이라는지 모르겠습니다. 죽고 난후 근20년이 지난일인데 말이죠. 더불어 전두환이나 노태우(물론 이 두사람은 정말 싫어합니다만.)의 탓으로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100번양보해서 군사정권시절부터 높았던 부채비율때문에 대기업들이 IMF사태에 큰 손해를 얻었다. 정도죠. 제발 박정희때문에 IMF가 왔다는 경제/경영학적인 근거 하나만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고정환율제를 고수하면서 금융시장개방과 금융실명제 등을 무리하게 밀어붙여 외부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상태에서, 당시 정부가 대기업들과 민영은행들이 돈놀이(이 돈놀이할수 있게 개방해 준게 김영삼이죠.)를 하는 상황을 감독하지 못해 국가적인 환리스크를 관리하지 못했고, 거기에 아시아지역에 불어닥친 연쇄경제위기가 기름을 끼얹고, 따라서 환율상승의 압박이 오는 지점에서 김영삼이 자신의 공이었던 1만불돌파를 지키기 위해 환율방어를 하다가 결국 소로스 등 투기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
제가 파악하는 우리나라 IMF 사태 시나리오입니다. 여기 어디에도 박정희의 잘못은 보이지 않습니다. A부터 Z까지 문민정부의 잘못입니다. 전두환/노태우정권시대에 외채는 국가차원에서 빌려와 기업에 다시 꿔주는 형태였으며, 유래없는 3저호황으로 90년대초까지 외채비율과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IMF가 박정희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 아무리 봐도 박정희의 공을 깎아내리기 위한 민주세력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이데올로기가 있었기 떄문에, 지난 10년간 민주세력(김대중-노무현)은 사회/정치적으로는 왼쪽이면서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우파)에 가까운 정책을 했으며, 그 결과가 지금입니다. 수출기업들이 아무리 돈을 벌어와도 국내투자로 연결되지가 않고, 해외투자자들의 배만 불러집니다.

박정희가 독재자이고, 국민을 탄압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와 같은 독재자가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며, (최소한 유신체제전까지)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건 실보다는 득이 많은 행운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에도 한번 토론에서 (제가 다구리 맞았었죠. T_T)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만, 박정희가 우리나라 지역주의의 단초(실마리)를 제공한것은 사실인지 모르되, 지역주의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은 약간 억울한 게 아닌가 합니다. 호남을 곡창지대로, 서울/영남을 부산항과 공업단지를 연결하는 수출기지로 개발한 것은 효율성 측면에서 어쩔수 없었습니다. 국민들도 어느정도 납득했기에 (제가 본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의 지지율은 오히려 호남에서 더 높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지역주의의 시작은, 김영삼-김대중이 지역구도로 신민당 경선에서 대결시 김대중의 호남소외론이 먹혀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뽑힐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합니다. 그후 김대중은 강력한 박정희의 대항마로 성장했고 김대중탄압의 구도에서 호남탄압의 구도로 옮겨 가면서 그 불씨가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후 그 불씨를 뻥 터드린것은, .. 예. 그 29만원 할아버지의 광주혁명탄압이죠. 무슨 백제때부터 그랬다, 아니다, 왕건때부터 그랬다, 아니다, 이순신때부터 그랬다, 아니다 동학농민운동 부터 그랬다.. 전 소설이라고 봅니다. 지역주의의 원흉은 단일화하지 못한 민주세력 + 29만원할아버지 의 더블콤보라고 보는게 옳습니다. 지역주의에 있어서 박정희의 지분은 3분의1이하라고 생각합니다.
nicewing
08/04/1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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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감정의 시작은 71년 대선 때부터 근본이라고 봐야죠.
하지만 그 때에도 박정희는 호남에서 30%, 김대중은 영남에서 30%를 가져가는 지금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득표율을 얻어갔습니다.
본격적으로 악화된 것은 5.18과 이 후 정치인들의 작태라고 봐야죠.
또 그 기저에는 발전의 축이 된 영남과 발전에서 소외된 호남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고 말입니다.
확실히 지역 감정을 단순히 누구 하나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죠.
말코비치
08/04/1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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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지역별 효율성 정책은 명백한 파탄적 정책에 불과합니다. 전형적인 초보 자유주의 경제론에 입각한 것인데, 세계의 각 지역이 지역에 특색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면 효율성이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아담 스미스가 당시에 조선을 알았다면 니네는 동의보감과 거북선이 유명하니 의약품과 군선만 만들면 되겠다고 하겠습니다. 현실은 박정희 경제정책 때문에 지금의 영호남 경제격차 및 지역차별과 그에서 비롯한 지역감정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율리우스 카이
08/04/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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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코비치님// 지역별효율성정책이 명백한 파탄적 정책이라는 건 뭔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나라가 도시/공업/산업지역과 농업지역을 혼재해서 발달시킵니까?

전형적인 '초보'자유주의라는 말이 좀 어색하군요. 그리고 비교우위이론을 말씀하시는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지역특색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면 효율성이 높아진다, 이런 경제사조는 누가 주장한건지 잘 모르겠네요. 박정희의 정책이 자유주의도 아니었고 말이죠.

더불어 예를들어 서울의 경우 강남이 개발되고 강북이 안좋다고 해서 강남사람이 강북을 경원시하고, 강북사람이 강남을 증오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뉴타운 공약때문인지/참여정부에 대한 실망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북에서 한나라당이 석권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지역감정은 박정희보다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5.18. 이 두가지가 더 크다고 전 생각합니다.
말코비치
08/04/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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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님의 말씀에도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박정희가 다 나쁘다고 몰아가는 것은 맹목적인 반박정희일 뿐이지요. 하지만 박정희의 경제정책, 경부축을 중심으로 중심부는 발전시키고 주변부는 소외시키는 경제정책이 현재의 지역주의의 근원으로 지적될 수 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자유주의 정권은 전혀 아니지요.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지역차별적인 경제전략은 비교우위론, 규모의 경제론에 따른 경제전략입니다. 그 덕택에 그 수혜를 입은 지역은 발전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20,30년 전의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이 많습니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파탄적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박정희 이후에 추진된 경부KTX, 경부운하 역시 '경제성장'을 명목으로 추진되었지만 박정희 시절 배제된 지역들의 발전을 모색하는 정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강남/북권의 경우,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강북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강남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빼앗긴다고 투덜거리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 70~80년대 경부축 발전지역/비경부축 소외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저 역시 민주세력의 분열과 518이 지역주의에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호남 사람들을 매우 소외시켰지요. 고등학생 때는 심지어 호남사람들의 민주당 몰표는 이해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만, 열린우리당의 여러 모습(특히 이라크 전쟁과 비정규직 법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철회했지요.

위 댓글의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개념을 미숙하게 사용한 점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직 겨우 20대에 불과하고 세상에 대해 아는 점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점에 혹여나 눈이 찌푸려지셨다면 애정어린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戰國時代
08/04/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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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님// 다른 건 모르겠지만, 장면 정권 친일파론은 좀 그렇네요. 그런식으로 따지면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정권 아닙니까. 대통령부터 윗대가리들은 거의 친일파 출신 내지 후손들이었는데...
율리우스 카이
08/04/1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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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님// 네, 전 친일논쟁에 관해 당시 윤보선/장면 정권또한 자유로울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린겁니다. 박정희정권도 마찬가지고요. 당시 사회분위기 자체가 친일여부가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저도 책몇권 본것이 전부라 단정지을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또 근거를 제시해주시면 겸허히 수용할 자세도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일부민주세력들이 늘말하는 장면/윤보선정권의 가능성 측면에서는 회의적입니다.
펠쨩~(염통)
08/04/13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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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이 '신격 다까끼우스'가 된건 97년 IMF이후입니다. 그 전만 하더라도 경제적 성과는 인정할건 인정하고 못한건 못했다고 하고 하면서 생각보다 중립적이었다죠. 물론 신군부의 영향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게 97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바뀝니다. 박정희라는 이름이 현실에서 신화가 되 버립니다. 이것은 IMF경제난으로 인한 대중의 갈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히틀러를 원했던 독일 국민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97년부터 바로 조중동을 통한 신격화 작업에 들어가고 그 결과물이 지금입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과를 긍정하는 편이지만 전두환, DJ보다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면만요. 그런데 신격화 된건 박정희 대통령 혼자뿐이지요. 그건 박대통령의 경제성과보다는 권위주의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신격화 하는 언론플레이가 먹힌 거겠죠.
유대현
08/04/13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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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정권 이야기로 핀트가 어긋날 것 같지만 짧은 지식이나마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박정희가 아니어도 경제 개발은 가능했다는 말은 민주화 세력이어도 경제 개발이 가능했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인 독제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민주화 세력이어도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박정희의 자리'에 사회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사고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십중팔구는 경제개발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만큼 당시 박정희의 자리는 막강했고 대외적인 여건도 장면 정권에 비해서 나았으니까요.

일단 장면정권이 유지되었더라도 박정희와 같은 방식의 경제발전책(즉 수출드라이브와 장기적으로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하는 경제정책)을 폈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저는 [재벌들은 계속 안전한 밀가루나 쌀이나 팔거나 오퍼상이나 계속 하고 있었겠죠]라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실제로 장면은 산업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을 얻기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다만 그 당시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전환기에 놓여 있었기에 확답을 받지 못 했고 논의 중에 5.16으로 정권을 뺴앗겼습니다. 물론 장면 정권이 수립한 '경제개발개획'이 문서상으로 남아 있지 않아 100%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장면이 미국과 협상을 한 문서를 보건데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사회적인 혼란도 흔히 말하는 '사회가 완전히 분열되어 북한에게 먹힐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장면 정권 시기의 시위가 홥발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규모나 폭력성은 5.16이후의 시위에 비해 경미한 수준이었거든요. 이 정도는 이승만의 독재로 인해 억압되었던 의견이 표출된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 보다도 장면 정권의 집권기는 겨우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해 보려고 하던 순간 정권이 끝나 버렸죠. 엄밀히 말해 박정희의 군정 1년이 장면 정권보다 월등히 나았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08/04/13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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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님//

박정희 지지하는 분들이 쓴 글 중 가장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시네요.
님의 말씀에는 저도 동의 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업적은 효과와 부작용이 명확하다고 봅니다.

가장 잘한 부분은 님의 말씀처럼 중화학 공업에의 대규모 투자지요.
그 이전에 경공업 중심 수출도 역시 어쩔 수 없었던 면은 인정합니다만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피땀어린 중노동에 의지한 바가 커서 박정희 혼자 잘났네 하는 논리는 성립이 안 되는 분야라 봅니다.

유신체제 중에 이루어진 중화학 공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무모하리 만큼 과감하게 이루어졌죠.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은 큰 업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끼친 것도 같이 인정해야겠죠.
외채로 엄청나게 당장 돈이 안 되는 곳에 투자만 해 대다 보니 살인 적인 물가 상승으로 (20% 대였던 걸로 압니다.) 서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요. (재수없게도 당시 석유 파동이 같이 겹쳤던 걸로 알기는 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네요.)

그 덕분에 부마 사태가 나고 공수 부대가 투입 되고 나서야 진압이 됐지요.
아마 그 상태가 조금 더 갔더라면 잘못하면 민중 봉기로 권좌에서 끌려 내려 왔을 수도 있었을거라 봅니다.
아니면 80년 광주가 경상도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거구요.
어떻게 보면 박정희도 운이 좋았던게 딱 절묘한 타이밍에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 횡사한 덕에 아직도 신화로 남은 면도 있다고 봅니다.

부마사태에서 큰 교훈을 얻은 신군부는 광주에 공수 부대를 바로 투입하게 됐겠죠.

박정희가 투자한 중화학 공업의 결실을 3저 호황과 더불어 때 맞추어 어찌 보면 거저 따 먹은게 전두환 되겠구요.

사실 전두환 정부도 경제 업적이 있기는 있죠.
쓸데 없는 부양책 같은 것은 다 집어 치우고 오로지 물가 안정에만 매달린 것 말입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요즘 같이 인플레이션이 우려 되는 시기에 오로지 눈 앞에 보이는 성장율에만 매달리는 이명박 정부가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기도 하죠.

그러나 지역 감정이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은 광주 항쟁이 원인이 된것이 맞지만 지역 불균형 발전의 악영향은 이미 박 대통령 임기 말기에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저도 박 대통령 초기에 전라도에서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압니다만 말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제력 차이가 많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 당시 전라도에서 지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면이 컸다고 보구요.

IMF에 관해서는 환율 문제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의 책임은 없지만 관치 금융이나 무차별적 차입 경영에 의존하는 당시 시스템 자체가 박통 이래로 확립된 것이고 이것 역시 IMF에 큰 영향을 끼친 면을 부인 할 수 없죠.
외채가 급격히 늘어 난 것도 기업들의 무차별 차입 때문에 의한 것이 근본적 원인이구요.
물론 환율이나 세세한 금융 관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김영삼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게 맞구요.

IMF 이전까지 대기업들은 대마 불사의 신화 아래 적자가 계속 되어도 빚을 더 많이 얻어서 덩치 키우고 계열사 늘리는게 소위 사업요 경영이란 거 였습니다.
또한 청와대와 정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대기업에 대출해 주는게 대한민국의 금융이라는 것이었구요.
이것은 필연적으로 정경 유착과 부패를 조장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기도 했고 정권은 거기서 조달한 자금으로 정치를 했구요.

어찌 보면 30년 동안 언젠가는 터질 폭탄 돌리기를 한 것이죠.
대마 불사니까 아무리 빚을 엊어다 써도 망하지 않아 하는 믿음 아래요.
이 체제의 장점은 서민들에게도 이득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이 효율성을 중시하지 않다 보니 돈이 잘 흐르는 장점이 있지요.
지금은 기업들이 수익성과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문제는 그 효율성을 기술 개발 보다는 중소 기업 갈취에서 얻다보니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아무튼 서민들은 그런 영향으로 독재 시절을 아직도 그리워 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폭탄 돌리기가 지금도 통할 수는 없지요.

30년도 넘게 묶은 이러한 문제들은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극화 문제만 빼면 김대중 정부에서 모두 해결이 됐구요.
그런면에서 저는 김대중 정부는 엄청나게 큰 경제 업적을 달성한 정부라 봅니다.

막판의 신용카드 삽질로 이런 업적은 빛이 많이 바래 버렸지만요.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업적을 모조리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박정희 아니면 안 되었을 거라는 건 알 수 없는 거라고 보네요.
님 말씀처럼 중우 정치의 나락으로 빠져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님도 인정하시는 것처럼 박정희 정권 초창기 1-2년간 말도 안 되는 삽질 정책만 남발 한데 비하면 장면 정부는 1년도 채 일해 볼 시간도 없었죠.
그리고 박정희 정부의 첫 번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장면 정부에서 기본 골격이 다 수립된 것이기도 하구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박정희 정부의 독재적 성격은 미국과 끊임 없는 갈등을 낳았습니다.
민주 정부였다면 필요 없는 갈등이었죠.

정치나 사회 시스템을 희생 시키지 않고도 차근 차근 경제 발전이 이루어 질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경제력 자체는 지금 보다 좀 못할지 몰라도 죽어라 일해서 번 돈 부동산에 몰빵하고 대기업은 자신의 효율성을 중소기업 갈취에서 얻으며 사회 보장이 너무 없으니 너도 나도 사교육에 매달려야만 하는 지금 시스템 보다 나았을지도 모르는 거 아닐까요?
율리우스 카이
08/04/13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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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쨩~(염통)님// 그런가요? 제가 97년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기때문에 그전까지 어떻게 박정희가 대우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IMF이후 우리가 택한 대통령은 결국 김대중이었지 않나요? 제인상은 IMF로 인해 그전까지의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폄하하고 박정희탓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많았다고 생각되는데요. 흠.

장면/윤보선 정부에 대해...
제가 그시절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힘들지만요, 노무현대통령이라는 영웅과 탄핵열풍으로 인해, 구세력을 청산하라고 국민이 과반의석까지 주었을 때 열린우리당은 모했나요? 비례대표줄이고, 중소기업 더 힘들게 하고, 기간당원제 폐지하고, ....
장면/윤보선 정부의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책들을 보면 저자에 따라서, 1960년당시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했고 장면정부또한 국정운영 등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라는 시각이 있는 가 하면 / 반대로 자연스런 민주화 움직임이었고, 일시적인 진통이었다. 라는 시각이 있죠. 전 지금도 국회의원 상당수가 한심한 작태를 보이는 판에, 당시 의원내각제 하에서 공짜로 4.19.의 결실을 따먹은 친일/지주계급 일색의 내각이 도덕적이고 훌륭한 정책을 수립했을거라고는 생각이 안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의 쿠데타가 먹힐 수 있었던것아닐까요? 박정희의 비극은 유신이후가 아닌가 합니다. 쩝.

경제개발5개년 수립계획에 대하여..
박정희의 경제성과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너무나 쉽게) 얘기하는 말, '장면정부가 근본을 다 잡아놓은 정책을 박정희가 그 결실을 따먹었을 뿐이다.' ... 네, 장면정부가 어느정도 경제개발계획의 아웃라인을 설정한건 사실인것같지만, 그 초안은 이승만정권이 먼저 잡았다죠 ;) 전, 그얘기에 큰 의미를 안둡니다. 계획으로 경제발전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코비치
08/04/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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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국민들은 김대중을 선택했지만, 김대중을 선택하지 않은 국민들 및 김대중에 반대하는 언론, 국회의원들은 박정희 경제론을 갑자기 펼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박근혜의 등장이 김대중 정권 말기라는 점도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IMF때는 박정희 탓으로 돌리려기보다는 박정희-전두환 때는 이런 문제 없었는데 문민정부 때 하도 망쳐놨다는 의견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물론 그런 쪽으로 보수언론이 몰아가도 국민들은 김대중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의 후계자인 노무현이 퇴임한 이후 IMF때의 박정희 경제론이 요새는 대세가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았던 대통령을 뽑으면 박정희가 거의 모든 조사에서 1위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지요.
율리우스 카이
08/04/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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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코비치님// 그냥 웃긴 얘기지만, 가장 좋았던 '대통령'이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았던 설문조사에서도 박정희가 1위했었죠. 돌아가신 타이밍이 너무좋아 이미지 관리가 잘된 케이스라는 데는 동의합니다만,(내지는 그의 인기에 왜곡이 있다는 점에도 동의합니다만) 국민들이 다 우매하고 멍청해서 그런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쩝.

그리고 문민정부도 하도 망쳐놨다는 의견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수사법이 좀 지나치십니다. 어쨋든 (이데올로기적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IMF의 원인은 오롯이 문민정부의 그것입니다.
말코비치
08/04/13 19:53
수정 아이콘
IMF가 10년이 지난 지금의 경제상황이 김영삼 정부와 무관할 수 없는 것처럼 문민정부의 경제위기도 그 이전 정부가 쌓아놓은 정책과 전혀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스톰 샤~워
08/04/1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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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하는 박정희에 대한 착각 하나는 '박정희는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은 적이 제대로 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아마 두번째 당선될 때 쯤엔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그외의 경우 박정희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지표를 보여주고 있죠.

유신의 계기가 됐던 71년 선거때는 김대중과의 대결에서 하마터면 질뻔 했습니다. 이 당시의 선거라는 건 거의 강제 동원 수준의 선거였습니다. 이장이나 동장은 여당의 공식선거운동원 정도가 아니라 감시원의 수준이었고 실제로 여당이 적게 나온 동네는 노골적인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죠. 아파 드러 누워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이장이 트랙터 끌고 가서 투표하라고 실어왔습니다. 박정희가 전라도에서도 안정적인 지지율이 나온 배경이 바로 이 금권 관권 선거라고 보면 됩니다. 전라도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도 일정한 지지율 밑으로 내려가진 않죠. 단지 도시에서만 좀 약해질 뿐. 도시엔 관료조직망이 약하고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금권,관권의 효력이 덜 먹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막대한 힘을 동원하고도 선거에서 질 뻔 했다는 건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지지라는 것은 거의 전두환이나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박정희가 오히려 죽고 나서 국민의 영웅이 되는 데는 조선일보의 지속적인 우상화 작업의 결과라고 봐야 합니다. 고통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듯이 국민들이 박통에게 당했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가고, 특히 나이 드신 분들에겐 나날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정신 없이 돌아가니까 차라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옛날이 좋았다라는 생각이 들고 하는 중에 조선일보가 지속적으로 박정희 우상화 작업을 하죠. 여기에 박정희 정권에 목숨바쳐 충성했던 관료계통의 인간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의 원천이 사라진 원통함을 실어서 열정적으로 이에 동조하고(박통때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했습니까, 공무원들은 거의 썩어문드러진 조직이라고 보면 되고 와이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죠.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태였죠), 박정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겪어본 적도 없는 젊은 친구들이 경부고속도로의 신화나 핵개발의 우국충정, 경제발전의 신화 등에 현혹되어서 무조건 지지를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저런 상황을 비교해 보면 펠쨩님의 97년 경 부터라는 지적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경제적인 공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묻는다면 있다고 답하겠습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아니면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없었나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공과 과가 한데 섞여 있고 과보다는 공이 많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박정희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영웅적인 업적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같은 아시아 권에서 비교를 해야지요. 당시 아시아는 미국이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점찍은 곳이고 실제로 질좋은 노동력이 다수 존재함으로써 성장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라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이 성장하게 되는데 이 정도면 아시아에서 성장할 만한 나라는 다 성장한 것입니다. 저 네나라 외에는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등이 있는데 국가적 잠재력으로 보면 한국은 저런 나라와 비교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스탯이 다릅니다. 엄청나게 낮은 문맹율, 높은 교육열, 열대나 아열대가 아닌 온대지방에 살아 근면하고, 단일민족으로 민족적 혼란이 없는 등등 성장의 잠재력은 충분한 나라였다는 거죠. 거기다 결정적으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도 울며겨자먹기식이지만 어쨌든 결국 토지개혁을 실시해 자본주의적 성장의 결정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 있죠.

이러한 잠재력을 갖춘 나라라면 적절한 리더쉽만 갖추어지면 경제성장은 당연히 이뤄지는 거죠. 그런데 박통은 거기다 군부정권이어서 국민들을 두드려잡을 수 있는 물리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러고도 성장 못했으면 그건 병진이죠.
율리우스 카이
08/04/1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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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 샤~워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러한 잠재력을 갖춘 나라라면 적절한 리더쉽만 갖추어지면 경제성장은 당연히 이뤄지는 거죠. 그런데 박통은 거기다 군부정권이어서 국민들을 두드려잡을 수 있는 물리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러고도 성장 못했으면 그건 병진이죠."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점은 동의를 하시네요. 저도 사회에서 일을 조금 해보니까 이노무 리더십이나 추진력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어쨋든 이 논의는 정말 어려운 일인 것같습니다.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경제발전했다.'..이 명제의 참/거짓여부가 관건같아요. 원글도 그렇고 말이죠. 예로 드신 싱가포르나 대만, 홍콩의 경우 홍콩, 싱가포르는 워낙 작은 나라이고,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특수성,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광요식 사회주의체제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만만이 비견될수 있겠네요. 그러나 대만도 어느정도는 1일독재시스템아니었나요? 흠.

현대중공업은 세계1위의 조선회사죠. 앞으로 10년간 그 지위는 흔들릴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 현대중공업이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지시해서 만들어진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우리나라 경제에 안좋은일이었는지, 혹은 박정희가 아니고 장면/윤보선 정권의 의원내각제였다면 할수 있었는지, 전 확신이 안가네요. 저도 대학교초년까지는 스톰샤워님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때려죽일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10년가까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특히 국민이 열린우리당 과반만들어주고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유대현
08/04/1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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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스톰샤~워님이 말씀하신 요인 이외에 몇 가지 박정희가 누렸던 대내외적 이점을 조금 더 말해보자면

1.미국의 대한 정책의 변화
-아시다시피 이승만정권부터 장면정권까지의 미국의 대한 정책은 한국이 생산설비를 갖추도록 돕는 쪽보다는 밀가루를 비롯한 소비재를 직접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이승만부터 장면까지 미국에게 한국이 자체적인 생산설비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원조를 무단히도 합니다만 미국의 태도가 미적지근 하였죠. 그런데 묘하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던 시점 미국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대한 정책이 자체적인 생산설비를 갖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점을 빼고 박정희의 능력을 논하면 상당히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2.북한의 존재
-북한이란 존재는 참 이러저러한 면으로 대한민국의 수구세력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북한에게 있어 남한도 비슷한 존재고요.) 일단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데에 상당히 유리했던 점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체제경쟁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한국이 성장해야 했기 때문이죠.
-또한 다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국민들의 다른 불만들을 무마하는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북한에게 이겨야 한다.'거나 '북한이 침략해 들어온다.'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어지간 해서는 용인되기가 힘든 황제에 가까운 수준의 박정희의 권력을 안정화 시켜 주어서 어느정도 시행착오를 하여도 권력 기반이 흔들릴 여지가 없게 되었죠.

3. 그 이전 정권의 과실을 딴 사람이 박정희 입니다.
-박정희가 종국적으로는 중화학 공업 중심의 수출정책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이승만 정권의 도움도 꽤나 컸습니다. 울며 겨자먹기 식이긴 했지만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공업 중심의 근대화의 실현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세력인 지주계급이 해체되고 또 이승만이 의도하였는 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서 상당히 어중간 하게 시행된 이 토지개혁 때문에 기존 지주들이 정부를 위협할 만큼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 하고 정부에 의존적인 기업가 세력이 되어 버려서 남미처럼 지주계급이 공업 산업화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 만큼은 장면정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박정희 정권이 그 이전의 정권보다 여러모로 경제개발을 이룩하는 데에 상당부분 유리한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말아먹는 독재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그나마 박정희가 있던 조건을 말아먹을 정도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이겠지요. 개인적으로 박정희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평균수준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긴 하겠지만요.

만약 그가 정말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현재 한국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비리', '냉전이데올로기'를 비롯해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국가들이 겪는 문제점마저도 최소화 할 수 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장면정권이 사실 무능하다 무능하다 하는 평가를 듣지만 정작 정부가 가동된 것은 채 1년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국회에서는 구파와 신파의 파벌싸움으로 얼룩진 1년이었지만 행정부의 수장으로서의 장면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원조를 얻기 위해서 미국과 협상하고 권력화 되어가는 군부조직을 통제하려고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장면 정권을 평가할 때 입법부에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행정부에서의 모습도 함꼐 고려하면 장면정권이 다른 초보(?) 민주주의 정부 치고 특별히 무능했다고 하기는 너무 가혹한 것 아닐지...
중년의 럴커
08/04/2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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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사망시 중 3이었습니다. 이런 토론들을 보면 위에서 적어주신 분처럼 컬럼부스의 달걀이라는 말이 가장 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나간 시간, 만들어진 결과를 두고서 이렇게 하면 더 좋았지 않겠는냐, 이건 잘못되었다 하는 비판은 어디까지 미래에는 더 효율적으로 더 낫게 일을 하자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의미를 갖는데 이건 도리어 비판 그자체, 특정 인물에 대한 깍아내리기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으니 치우친 시각으로 보일수 밖에 없는 것이죠. 돈이 아닌 밥을 얻으러 다니는 거지를 심심치 않게 보며 자랐고, 노동 착취에 못견디던 공원 누나들이 건물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모습도 보고 자랐습니다. 지나간 그 긴 시간을 다시금 되돌아 볼 때 제가 태어날 때 지도자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주어진다면 그래도 박정희씨를 선택하겠습니다. 문제 많았습니다. 잘못한 것 많습니다. 그래도 최선이라기 보다는 최소악을 위해서 선택하겠습니다. 지표가 아닌 당시 살아본 사람으로 말한다면 박정희 대통령 지지도는 실제로 높았습니다. 육영수 여사 생존시까지가 딱 좋았는데 말입니다. 유신 헌법을 통한 재집권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이 육영수 여사였다고 봅니다.
저글링
08/04/2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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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로 국가를 위해 군대에서 2년 썩는게 뭐 힘듭니까? 국가 안보를 위한건데
하물며 20년 가까이 개같이 일해서 후세에 경제성장이라는대가를 주는게 뭐 힘듭니까? 경제를 위한건데
사람은 사람이지 돼지가 아닙니다.
저글링
08/04/23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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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박정희 추종자들이 미국과 FTA, 한반도 대운하등등 경제계발에 관련된 사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한가지더,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의 비민주적인 통치의 고속도로가 근대화의 기초라면 철도를 놓아준 대일본제국을 더 높게 사줘야 되는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율리우스 카이
08/04/24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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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글링님// 님과 같은 감정적인 접근이 좋은 토론이 안나오는 원인 아닐까요? 여기 토론자들중 박정희추종자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흠.

수탈이 목적이고 북한땅에 집중되었으며 그나마도 6.25때 대부분 파괴되었던 일제시대의 철도와 경부고속도로를 비교하시는 건 너무 악의적인 비교가 아닌가요?

좋은 의견들이 교환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참 마음이 아프군요. 흠. 거의30년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박정희시대에 우리시대를 이끌던 사람들은 일제시대와 자유당시대, 6.25를 겪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잣대로 그때의 박정희를 평가하는건 약간은 가혹한일이 아닌가합니다. 더불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명박의 밀어붙이기식 경제정책에 상당수의 박정희 '추종자'들은 동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_-
율리우스 카이
08/04/2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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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석학 기 소르망은 책 '신국부론'(1986)에서 1960년대 저주받은 한 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국토는 작고, 인구는 많다. 국민의 80%는 문맹이고 외국인과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식민착취, 국토양분, 내란으로 200만명이 죽었다. 예산의 3분의1이 국방비다. 1961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은 이 나라가 끝났다고 했다. 74개 후진국명단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60등이었던 나라가 25년만에 9위가 되었으니 무슨 요술약이라도 먹은 것일까?"

1961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다 아시잖아요. 쩝.
베르캄프
08/04/26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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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정희 시절을 객관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내릴수 없는것은
김영삼 김대중같은 박정희의 정적들이 지금도 살아서 엄청난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측면도 배재할수 없죠

근데 재밌는건 박정희 시대를 살아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박정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죠

마재윤 전성기 시절부터 스타리그를 처음 보기 시작한 사람이
임요환 전성기때의 경기를 보고 뭐 이렇게 얘기할수도 있겠죠..

"임요환 경기 지금 보니까 정말 수준이 낮고 어처구니 없는 판단을 했군"
"임요환이 주로쓰던 전략의 원조는 사실 다른사람이야 임요환은 베꼈을 뿐이지"
"임요환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테란의 황제가 됐을것이고, 그의 존재와 상관없이 스타판도 발전했을거야"
"스타판이 크지않았던 그땐 임요환 혼자만 인기를 독식해서 실력있는 다른 프로게이머는 빛을 못보고 사라져갔지"
"가끔씩 스탑마인같은 편볍을 사용해서 이득을 보고 주최측은 임요환을 감싸기만 했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지만 안티도 상당했어 임요환이 그 안티들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면 스타판이 더 발전했을텐데"

뭐 굳이 따지면 틀렸다고 할수는 없는 얘기죠
중년의 럴커
08/04/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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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년쯤 전에 TV에서 박정희씨 관련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보측 패널 분께서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전후 경제발전 업적을 치하하는 척 하면서 마치 1차 대전 이후의 암울한 독일을 부흥시키고 철저한 반공주의를 펼친 히틀러에 비교하시더군요. 히틀러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될 만 하다면서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 하죠. 아니나 다를까 우리 마나님도 혹해서 일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과 석사학위 가진 우리 애 엄마가 넘어갈 정도면 배우고 자라나는 세대야 어련하겠습니까. 그래서 찬찬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저 목적은 적당한 논리로서 히틀러=박정희라는 개념을 일반화 시키고 차후에 저 논리는 싹 빼버리고 인간 백정=박정희 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다. 정말 독일의 경우와 비교 한다면 2차 대전후의 아데나워와 비교해야 한다. 더 정확한 비교대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히 외면하고 엉뚱한 예를 갖다 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라고요. 콘라드 아데나워라는 이름 참 생소하시죠? 지난 10여년간 철저히 한국내에서는 매장당한 이름이니까요. 독일 경제 기적을 이끌고 반공주의자였으며 나토 창설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 고속도로와 비슷한 예를 찾는다면 전 이집트의 아스완 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스완 댐을 건설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1952년 군사 쿠테타로 이전 정권을 넘어트리고 1954년에서 1970년 사망시까지 주구장창 대통령을 한 사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있죠?

아스완 댐은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정말 문제 많습니다. 빈번한 나일강의 범람을 방지하고 수력 발전을 목적으로 건설된 이 댐은 수력 발전은 넓은 수면을 통한 대량 증발로 목표 발전량은 훨씬 밑돌고, 범람을 방지하니 도리어 범람으로 비옥해졌던 평야가 완전히 매말라 이젠 화학 비료를 써야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덕분에 오염문제가 발생했고요, 그 비옥한 나일 삼각주가 이 댐 때문에 다 없어져가는 판국입니다. 뿐만아니라 댐 건설시 수몰로 인해 수천년이 넘는 역사적 유물이 엄청나게 수몰되고 일부는 인위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습니다. 하류 지역에 있던 이집트 최대 어장인 블랙피쉬 호수는 먹이가 끊겨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댐 상류의 호수에 새로 조성된 어장은 도시와 너무 떨어져 소용없는 어장입니다. 나일하류의 진흙으로 만들던 벽돌 제조 산업도 망했습니다. 댐 상류 호수인 나세르 호수에 엄청나게 늘어난 해초류와 그에 기생하는 달팽이로 인해 질병까지 만연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접 국가 역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지중해의 어획량이 나일강으로부터의 영양분 공급이 줄어들어 댐 공사 이후에는 절반가까이 줄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지중해의 염분 농도를 높임으로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의 해류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여파는 수천킬로미터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장황하게 주욱 늘어놓았습니다만,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란 보고서가 있고, 댐 공사를 지금 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합니다.
율리우스 카이
08/04/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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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럴커님// 저 진짜 잘몰라서 그러는데, 아스완댐만큼 경부고속도로도 문제가 많았나요? 흠. 대운하랑 비교한것이면 모르되 경부선과 비교하기에는 좀 심한게 아닌가 해서요. 흠
유대현
08/04/2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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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럴커님// 박정희는 아데나워에 비교하면 아데나워에게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특유의 카리스마(전 없다고 보지만 보통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보시기에)와 반공주의, 경제발전이라는 부분에서 아데나워랑 비슷하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박정희를 아데나워와 비교하면 아데나워가 아깝다고 봅니다. 적어도 아데나워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했고 사회복지를 전혀 외면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박정희는 히틀러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죠.

아데나워가 독일의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방식은 박정희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아데나워의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성장을 우선하는 정책이었지만 박정희의 사회주의식, 국가주도적 경제발전이 아니라 국가의 최소개입을 전제로한 시장경제 체제였습니다. 그렇지만 되려 노동자의 재생산성 및 부의 분배라는 측면에서는 국가주도적이었던 박정희보다 더 신경을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근로기준법이라는 허울좋은 법만 만들어 놓고, 말만으로 분배를 이야기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카르텔에 의한 가격 담합을 비롯해서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을 저해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처하면서 성장을 우선하되 분배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 제가 아는 아데나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박정희처럼 유신제국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아데나워는 철저히 정당에 기반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총리가 되었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숴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처럼 자기와는 신념이 다르다고 죽이지도 않았고 탄압하지도 않았죠.(공산주의의 경우는 예외라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을 비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산으로 끌고가지는 않았죠.) 아데나워는 자신과 신념이 달라도 이야기를 듣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데나워가 그런 정적들을 꺽은건 자신의 서독을 위한 노력을 독일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아 자유민주주의의 체제 내의 방법으로 총리로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의 카리스마는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민주주의의 범위 바깥에서 민주주의를 훼손함으로서 생긴 것과는 달리 그가 보여준 성과와 포용력에서 온 것이니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자와 훌륭한 지도자의 차이는 딱 한끗 차이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켰느냐 훼손하였느냐. 아데나워는 그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박정희와 히틀러는 그 가치를 훼손했죠. 그건 엄창난 차이라고 봅니다.

또 박정희시대를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좋아했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대부분의 대통령은 처음 당선될 때는 지지율이 높습니다. 레임덕 소리까지 들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 초기 지지도는 매우 높았죠. 이명박대통령도 온갖 삽을 푸고 있지만 50%는 될겁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지지를 받았는지는 튀임이후나 말년을 살펴봐야죠. 박정희가 3선될 때 그 원동력은 경상도 지역의 몰표였고 그마저도 김대중과는 94만여 표차이밖에 나질 않았죠. 그 동안의 선거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놀라운 결과입니다. 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이 개헌저지선을 20석이나 상회하는 의석을 얻었고요.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박정희를 좋아했다? 그렇게 단언하기는 힘듭니다.
중년의 럴커
08/04/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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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데나워 쪽이 박정희 대통령보다는 뛰어난 사람이라는데 한표를 던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교대상으로 삼지 못할 이유는 없죠. 제가 말하려는 요지는 왜 아데나워라는 존재 자체는 언급되지 못하고 히틀러라는 다소 생뚱맞은 비교대상을 가져왔나 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대상과 비교해서 이런이런 면은 비슷한데 이런이런 면은 부족하다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위에 제가 말한 것 처럼 앞으로는 더 잘해나갈 지표로 삼을 수 있지만, 히틀러와 비교하여 비슷한 존재라 규정한다면 결국 히틀러처럼 위험한 존재니까 이런 성향의 사람이 나오면 배척해야 된다하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다분히 부정적인 의도로 밖에 받아들일 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아스완 댐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니 마치 경부 고속도로도 저렇게 부정적인 여파만 끼쳤다는 이야기를 하려나 하시겠지만, 일종의 반어법입니다. 아스완 댐은 저러한 부정적인 부분에도 불구하고 제 3세계라는 체제를 가능케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이것과 나세르 장군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원래 좀 있다가 정리를 할까 생각중이었습니다.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장기집권을 하면서 국가를 발전시키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를 위기에 빠트려 자진 사임도 했다가 재집권 하기도 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인데 희안하게도 역시 10년 넘게 거의 우리 나라에서는 언급도 잘 안되네요? 저희 회사 직원들에게도 물어보았는데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전혀 없더군요. 제가 국민학생 (초등학생 아닙니다) 당시에는 꽤 유명한 위인으로 자주 언급되고 위인전도 나왔었는데 말입니다. 그 뒤를 이어 또 꽤 장기집권후 암살당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도 알고보면 나세르 대통령과 같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동지입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도 받았었죠?)
중년의 럴커
08/04/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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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아스완 댐과 나세르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죠.

저런 부작용을 낳는 대형공사라면 당연히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듭니다. 건설 결사 반대 시위를 저부터라도 해야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이죠. 하지만 이 댐의 건설계획 수립시인 1952년으로 돌아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차대전 후의 중동, 열강의 식민지 치하에서 겨우 벗어난 중동국가들은 아직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승전국인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라는 주요 거점에 대한 영향력을 거두어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집트는 거의 외국 자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습니다.

1899년에서 1902년까지의 1차 건설, 그후 1907년에서 1912년, 1929년에서 1933년 두차례에 걸친 높이 확장 공사를 거친 아스완 댐이 1946년 거의 범람의 위기를 맞은 후, 저 위에 적은 엄청난 영향을 끼친 하이 댐의 건설 계획은 1952년 쿠테타로 실권을 장악한 국부 정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 군부 정권은 제일 처음 영국의 재산보호라는 카드를 보여주고 협상을 통해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얻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국과 영국으로 부터 하이댐의 건설을 목적으로 2억7천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숫자의 차관 약속을 얻어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평화중재 역할을 기대한 것인데 이집트는 그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무기 협상, 중국을 정부로 인정하는 등의 행보이죠. 따라서 이 차관약속은 1956년 취소되고, 미국은 오메가 정책을 통해 나세르를 주변화 시키려는 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나세르는 소련과 접촉하여 댐 건설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력을 얻어냅니다. 댐 설계까지 소련에서 얻어낸 이집트는 건설자체는 도리어 소련 인력을 따돌리고 자국의 건설업자인 오스만에게 맡깁니다. 따라서 건축과정에 대한 노우하우는 다 이집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에 착공되어 10년동안 공사한 후 1970년 완공된 이 댐은 2.1기가와트라는 세계 신기록적인 발전량을 기록하여 이집트 전체 전기 소비량의 1/2을 책임집니다. 하지만 사실 이 발전량이나 용수조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댐 자체가 갖는 상징성입니다. 기념비에 찍힌 나세르 대통령의 얼굴과 이집트 군 휘장 옆에 찍힌 소련군 휘장. 이 상징성이 갖는 의미는 그후 수많은 아랍과 아프리카 국가들에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대안으로 소련과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되었고, 많은 국가들의 공산혁명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나세르 자신은 팬 아랍이즘이라는 서강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을 이끌어 나갔읍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통합, 예맨까지 통합하려한 통일 아랍 공화국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나세리즘이라는 단어로까지 대표되는 이 정신은 카다피, 후세인, 아라파트등의 대표적인 아랍의 지도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팔레스타인 독립기구 자체도 나세르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단체라 볼 수 있습니다.

6일전쟁의 패전으로 나세르는 사임을 표명하는데, 이집트에서는 물론 전 아랍 국가 전체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수백만 군중에의해 일어났고, 이를 통해 아랍의 동맹을 이끌어 1969년 다시 시나이 반도 탈환을 위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1970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나세르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사다트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합니다. 이렇듯 나세르와 아스완 댐은 제 3세계라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어낸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련과 밀착하여 1964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한 후루시쵸프로부터 소련의 영웅이란 칭호까지 받은 나세르는 거의 사회주의 적인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었지만, 반대로 또 공산주의는 탄압하여 자국내의 많은 공산주의자를 처벌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권좌를 이어받은 사다트 대통령은 방향을 전환하여 자본주의쪽으로 선회하였습니다.

사실 아스완 댐의 주요 건설 목적인 홍수 조절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합니다. 나일강의 잦은 범람으로 하류지역이 비옥해져 인구가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하니 홍수피해가 심해져서 범람을 막게되었는데 범람이 멈추니 비옥한 토지가 메말라 버려 이젠 화학비료를 사용해야할 정도가 되고, 이러니 오염문제가 발생하여 또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이제 여러분도 스스로 한번은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스완 댐의 건설이 미치는 해악에 대한 환경보고서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 나서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꿀 것이란 보고서도 앞에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나세르 대통령이라면 어떠한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율리우스 카이
08/04/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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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럴커님// 제가 이집트인이 아니기때문에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요,

나세르대통령과 박정희대통령의 유사성에 대해 더 알고 싶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유대현
08/04/2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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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생뚱맞은 비교대상이라니요. 오히려 박정희를 아데나워에 비교하는 쪽이 더 이상합니다. 아데나워와 히틀러 사이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느냐 존중하였느냐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고 박정희는 엄연한 민주주의 파괴자입니다. 그가 2선 까지만 하고 그만 뒀다면 저도 아데나워쪽에 비교하고 있었겠지만 결국 유신왕국을 세웠으니 박정희는 되려 히틀러에 더 가깝겠죠. 오히려 여기서 아데나워를 끓어들이는 쪽이 박정희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스완 댐과 경부고속도로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인지는 논외로 하고, 아스완 댐이 제3세계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은 저도 동감합니다. 정치사적 관점에서 아스완 댐의 가치는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의문입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제3세계의 수장국으로서의 자부심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세르의 사임을 반대하는 집회가 이집트인들이 아스완 댐에 대한 생각을 대변해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박정희도 죽었을 때는 적어도 대외적으로 보기에는 나라가 비탄에 빠졌을 테니까요.

아스완 댐의 가치는 제3세계를 연 계기로서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댐이,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제3세계가 이집트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집트 인들은 제3세계의 수장으로서 어떤 이득을 얻었을까요? 외국 자본에의 예속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이기는 할테지만 아스완 댐이 갖는 정치사적인 상징성이 이집트 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 전에, 아스완 댐이 없었다면 여전히 이집트는 영국에 예속되어 지금보타 못 사는 국가가 되었을까요? 저는 단언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박카스500
08/04/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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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태동은 박정희(전 대통령이라는 호칭 붙이기도 아깝네요)대에서 부터 시작한 외채더미부터였다고 판단합니다. 경부고속도로..물론 미래를 앞서 본 것 일 수도 있지만, 결국 빨리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애국심이었는지(가능성은 적지만), MB스러운 돌관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서둘렀죠. 글에서 언급한대로..

그리고 그 것의 경제적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튼 박정희라는 자가 하지 않았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극단적인 분들은 거의 그렇더군요.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지금만큼의 발전은 없다. 불가피한 국민통제였다."
"백성(이런 단어선택을 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디다)들이 어리석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발도상국은 대부분 박정희 시스템을 벤치마킹한다."

글쎄요, 그 토록 저자세로 외채가져다 써서 그걸로 성장하는게 그토록 어려울까요. 게다가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현격하게 퇴보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
08/04/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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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500님// IMF의 태동하고 박정희가 들여온 외채랑은 별로 상관없는데요.. 흠....

왜 그런지 좀 밝혀주시면 안될까요? 정말 처음 듣는 얘기라..

박정희시대에 만들어진 대기업/재벌지상주의를 그후 20여년동안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IMF를 맞았다. <-- 이게 그나마 논리가 있는 얘기죠. 금융적인 측면에서 IMF를 오게 만든 외채는 김영삼대에 쌓인 외채들인데요. 흠.
율리우스 카이
08/04/2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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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500님//

1. 도대체 무슨근거로 1950년대의 국민에 비교해서 현재(혹은) 1980년대이후의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2. 그 토록 저자세로 외채가져다 써서 그걸로 성장하는게 그토록 어려울까요 <-- 이게 이 스레드의 논의의 핵심이잖아요. 전 어렵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한문장으로 일축하시니 무안하네요. 흠.
중년의 럴커
08/04/2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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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댐의 건설이 이집트인과 이집트 경제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언급되어야할 부분이 그 건설을 수행한 오스만 아메드 오스만입니다. 중동지역은 그 당시 유럽계열의 건축 회사들만 존재하고 자국의 건축회사는 전무했습니다. 혼자서 회사을 만들어 사장 및 직원을 겸하면서 회사를 키워나가 독점과 카르텔로 똘똘 뭉친 외국기업들 사이에서 건축일을 따내던 그 회사인 아랍 컨트렉터는 나세르의 아스완댐 건설 산업을 맡음으로서 소련의 대형 토목공사 기술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고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었습니다. 사회주의적이었던 나세르가 1961년 이 회사를 국유화 조치를 했을 때 외국에 있던 그는 과감하게 귀국을 하여 회사의 소유 여부에 상관 없이 변함없는 경영을 약속했고, 나세르조차도 결국 특별법을 통해 이 회사만은 국유임에도 불구하고 급여, 보너스 지급등의 결정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회사의 대형 토목공사 기술이 미사일 기지, 공군 활주로, 벙커등의 건설 업무를 떠 맡았기 때문입니다. 나세르의 사망후 사다트가 취임하자 원래 친구사이였던 오스만은 회사를 더 튼튼하게 만들었고, 이집트 권력의 제 2인자란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10월 전쟁에서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군을 수송한 기습 작전을 가능케한 대형 페리선도 오스만의 작품이었습니다. 전 아랍 지역에 걸쳐서 엄청한 건설 업적을 남긴 이 아랍 컨트렉터는 지금까지도 이집트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로 남아있습니다.

유럽및 미국 자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토목 건축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점이 국가와 국민에게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이집트가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과 바로 인접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명합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중심으로한 아랍권이 얼마나 많이 전쟁을 치루었는지 잘들 모르시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정말 징하게도 많이 싸웠습니다. 시나이 반도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이 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수에즈 운하때문입니다. 1956년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도와 이 지역을 점령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67년에는 6일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위에서 언급한 1973년의 10월 전쟁을 통해 수에즈 운하를 수복한 이집트는 1979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전역에서 철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때의 업적으로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베긴 총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나오는 시나이 반도 북쪽의 가자 지구는 아직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으며,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입니다.

자 이제 아스완 댐 건설로 축적된 자국의 토목 건축 기술과 소련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이집트라는 국가와 국민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제 3세계의 수장이라는 위치가 상징성만을 가지는 것이었을까요? 시나이 반도가 현재 이집트의 영토로서 이스라엘 점령당시 발견된 유전을 통해 상당한 산유를 하고 있다는 것,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의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중년의 럴커
08/04/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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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하는 한 히틀러는 DAP당 (독일 노동자당) 소속으로서 반유대, 국가주의, 반 자본주의, 반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정당이었습니다. 그러니 원래 시작부터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그러니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자본주의적인 노선을 걸은 박정희와 비교하는게 생뚱맞다고 할 수 밖에요.
스타만 없었어
08/04/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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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박정희씨의 공과실을 논하기전에 히틀러와 박정희씨를 비교하는 일은 비교이전에 박정희씨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대현
08/04/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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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댐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렇지만 제게는 도저히 아데나워와 박정희를 비교하는 것은 거북하군요. 겨우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는 점 하나로 히틀러와 박정희 비교가 생뚱맞다고 말하시는 건 받아들이지 못 하겠습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건 박정희의 슬로건이고 박정희가 실재로는 무슨 짓을 했나요? 국가주의, 사회주의적 경제발전 계획,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비롯해서 거의 히틀러와 판박입니다. 그 사람이 민주주의를 표방했는지 안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 세상에 민주주의 파괴범은 있을 수가 없는데요? 세상에 어느 독재자가 민주주의 파괴한다고 공언을 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박정희가 유신을 하지 않았으면 전 박정희를 아데나워에 비교해 주었을 것이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었을 겁니다.(유신을 안 했으면 과는 쿠데타만이 남는데 2선 후 내려왔으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파괴자라는 소리는 안 들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결국 선을 넘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선을 넘은 이상 그는 민주주의 파괴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도 경제 개발의 방법, 정권을 잡은 이후의 행동 모든 면에서 박정희는 히틀러에 더 비슷하죠.
중년의 럴커
08/04/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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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제가 예전에 읽은 한 SF 단편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임머신을 만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과거로 돌아가 인류의 원흉 히틀러를 유명해지기전 죽입니다. 현재로 돌아와 얼마나 세계가 바뀌었나 보죠. 그런데 아무것도 안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링컨을 죽입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워싱턴, 처칠, 드골등을 죽여나가죠. 그런데 현재로 돌아와보면 그대로인 겁니다. 계속 이런식으로 반복하면서 자기가 점점 투명하게 변한다는 느낌을 받죠.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부모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보자 마치 유령처럼 자기가 변해있는 것을 발견하죠. 그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다른 유령같은 존재를 발견합니다. 누구인지 묻자 그사람은 자신도 타임머신을 발명했으며 그 사람과 똑같은 일을 거쳐 이렇게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의 상징성은 다른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전 역사를 비판하는 자세로서의 상징성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이를 통해 미래에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그 역사에 대한 비판 그자체에 매달린다면 결국 저런 식으로 역사를 죽이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면 결국 우리들 자신이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 변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풍자적인 입장에서 잘 표현한 작품을 추천한다면 다소 엉뚱하지만 심슨가족의 한 에피소드를 들겠습니다. 똑똑한 지성을 갖춘 리자 심슨은 추적을 통해 마을의 상징적인 영웅이 사실 거짓말장이 사기꾼이라는 물증까지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영웅을 기리는 축제의 한 가운데서 그 사실을 공표할 기회를 잡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을 보고 그 영웅은 실재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젊은 층에서 역사를 공부하실 때 흔히 직접적인 사료보다는 학자들의 비판서를 통해 접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부디 아주 반대되는 입장의 서적이나 직접적인 사료도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세익스피어 작품의 분석서를 읽고나서 세익스 피어를 읽었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한 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절대로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반대적인 입장이고, 당시 박정희 정권 옆에서 가장 밀접히 지켜본 사람의 글이니 나름대로 약간의 기회만이라도 학문적인 입장에서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도입니다.

http://cafe.naver.com/ssseul.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8
제리와 톰
08/04/3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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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미래로 살아나갈 뿐, 과거의 영광과 쇠락은 그저 과거 속에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소중한 이유는 인류가 살아나가면서 부딪쳐야 할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난제들 중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슴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일제식민지라는 우리가 우리가 아닌때도 있었고 6.25라는 민족의 살상극도 겪었으며 군부독재라는 논리와 이성이 탄압받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작금의 현실을 비추어 보았을 때 박정희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의 여러 세대에게 각각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는 듯 합니다.
저는 한 시대의 역량을 단순히 정치, 경제나 사회, 문화 등의 한 가지 측면에서 보는 것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독주를 통해 이루어진 사회의 발전은 타 분야의 성장을 저해하는 독선적인 문화를 낳게 되는 부작용을 역사적으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 개인의 개성이 몰개성화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지향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씨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매우 복잡합니다.
외부적으로는 동서 냉전 중이었고, 내부적으로는 6.25라는 민족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으며, 국민들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도 일제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때라 개인 각각의 자유의지가 희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생산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소비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사상적으로는 이전에 겪었어야 할 좌, 우의 대립이 민족 전쟁을 통해 극단으로 치달아 있던 때였지요.
그 당시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워 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타난 박정희라는 존재는 이런 혼란을 자신들의 기준-군인-으로 재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우리나라의 사상적 자유나 정치적 자유, 그리고 문화적 자유에 대한 고민은 없었을 겁니다.
단지 혼란을 멈추게 하고 먹고 사는 것만 좋게 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될거라고 스스로도 믿었고 실제 국민들 중 대다수도 그렇게 믿었겠지요.
그리고 보기 좋게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스스로가 제공한 논리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린셈이 되었지요.

한 명의 영웅이 독재자가 되어 많은 지식인들로 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가 다시 그 권좌에서 남의 손에 의해 내려온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박정희라는 사람이 이 땅에 등장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된 것은 당연히 그 시대에 살던 민중들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 시대에 지도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에 민중들이 원했던 지도자의 모습은 그 시대의 혼란기를 비추어 보면 박정희라는 인물과 유사한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이 그 시대적 소망이라고 한다면 지도자가 된 이후에 이 땅의 민중들에게 한 행적을 보면 이 또한 시대적 소망을 저버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대가 그에게 바랬던 것은 혼란의 종식이었지, 다시 한 번 중세시대의 절대 왕정으로의 회귀는 아니었으니까요.

이렇게 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대에 와서 박정희대통령과 그의 재임 기간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그의 공과를 통해 그를 재단하고 함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어떻게 하면 줄여나갈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스톰 샤~워
08/05/0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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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럴커님//
못본 사이에 글을 많이 남기셨네요.
저와 같은 시기를 보냈네요. 그런데 저는 님과 달리 '지표가 아닌 당시 살아본 사람으로 말한다면 박정희 대통령 지지도는 실제로 절대 높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시기를 보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그래서 지표로 이야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님께서는 그저 님의 생각을 일반화했을 뿐이죠.

유신헌법이 발표되던때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죠. 혹시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들 불러모아 놓고 산토끼 멜로디에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라는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르던 것 기억하시나요?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세뇌가 되었으면 지금도 그 노래가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그 노래는 아마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한테 가르쳤으니 님께서도 불렀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그 당시 대통령과 왕의 차이가 무언지 아셨나요? 저는 옛날에는 왕이라고 불렀고 요즘은 대통령이라고 부른다는 호칭의 차이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어쩌다 박정희라는 말만 꺼내도 어른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주위를 살피며 야단치기 바빴죠.

박정희와 아데나워는 비교해 볼만 하죠. 둘이 얼마나 달랐나 하는 점에서 말이죠.
박정희 우상화에 환장하는 이 나라에 왜 아데나워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을까요? 님께서는 마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가 일부러 아데나워를 가리는 것처럼 말씀 하셨는데 사실은 '지난 10여년간 철저히 한국내에서는 매장당한 이름'이 아니라 박정희 생전이든 전두환 시절이건 아데나워라는 이름은 별로 나오질 않았습니다. 당연히 박정희를 추종하는 입장에서도 아데나워를 거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잘난 사람하고 비교해서 우상화시키는 멍청이는 없거든요. 박정희가 아데나워에 비견할 수 없다는 건 박정희 추종자들이 더 잘알기 때문에 아데나워 얘기는 그쪽에서 더 꺼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론하는게 아데나워죠.

박정희와 아데나워, 둘은 극과 극 아닌가요? 하나는 폐허 속의 독일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으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함께 아우르며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지도자, 하나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국민들을 힘으로 억눌러서 장기집권을 획책한 자. 박정희 추종자라면 어디 부끄러워서 감히 비교를 하고 싶겠습니까? 공통점이라면 **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것 외엔 전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인데...

그래서 박정희 생전에도 라인강의 기적은 이야기 하지만 아데나워의 영도력은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은 근면하고 절약하는 게르만민족의 국민성이 이룬 것이고 한강의 기적은 게으르고 분열적인 국민성을 가진 당시 대한민국에 박정희라는 걸출한 영도자가 나타나서 이룬 것이라고 알고 있죠.

제가 국민학교 때도 라인강의 기적을 배웠죠. 먼길을 가던 소년이 교실에 전등이 켜져 있는 걸 보고 학교까지 와서 전등을 끄고 갔다는 일화. 이렇게 근면과 성실한 국민들이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가르쳤죠. 아데나워라는 사람은 그 당시 저에겐 듣보잡이었습니다. 반면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만든 것이죠. 우리나라 농촌에는 추수 끝나면 맨날 모여서 화투나 치고 노름이나 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으로 정신을 개조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노라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닙니까? 라인강의 기적은 독일국민의 근면과 절약, 애국심이 이룩한 성과이고, 한강의 기적은 화투하고 노름하는 국민을 개조한 박정희의 공이라고 가르치다뇨.

아데나워에 비해 박정희와 히틀러는 거의 도플갱어의 수준에 가까운 거 아닌가요? 뭐가 다른 점이 있어야죠. 히틀러가 좀 더 카리스마가 있었고 좀 더 악랄했고, 좀 더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찾아보기 힘드니 박정희와 히틀러를 비교하는 거죠.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주장했기에 다르다고요? 출발부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군사쿠데타였는데다가 그가 이야기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것이 결국 히틀러식 국가사회주의 아니었나요? 수없는 계엄과 긴급조치로 정권을 연명하는 민주주의가 있던가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만 부탁드립니다.
제발 후배들에게 '내가 살아본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너희는 박정희를 모른다' 이런 말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혀 올바르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태도도 아닙니다. 님과 같은 사람들의 그런 말들 때문에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후배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저는 오히려 '박정희의 공포정치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시절의 폭력, 공포, 관료들의 타락과 부패, 사회를 짓누르는 불안하고 무거운 공기는 지금 자유를 숨쉬는 너희들은 절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객관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율리우스 카이
08/05/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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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 샤~워님//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화국헌법을 만들었고, 세계전쟁을 두번이나 주도할정도로 초강대국의 위치에 있었으며, 미친 독재자를 뽑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학습한 나라와,

30여년간 식민지 생활을 겪었으며, 자기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열했고, 10여년동안 부패한 민주정권하에서 혼란에 빠지고,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나라의 상황,

아데나워의 그것과 박정희의 그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박정희와 히틀러의 그것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뱃살토스
08/10/02 00:07
수정 아이콘
와~ 대단하십니다.
토론이 여기에서 끊겨서 아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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