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0년~2001년 사이에 저의 선배가 작업한 단편영화를 소설화한 것입니다
본인의 허가를 받지 않고 쓴 글이라서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웃음) 그래도 열심히 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제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게이머랑 전혀 연관이 없는 소설이라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으실지;;;)
그럼 시작합니다
1편 보기
3.
대문을 살짝 열어 바라본다. 대문 문지방 밑엔 오렌지 껍데기가 수북히 쌓여있다. 어제 먹고 치우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렌지를 하나 껍질을 벗겨 먹으며, 바깥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그녀와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걸걸하고 남자다운 목소리가 내게는 조금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워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이게 뭘 잘했다고...!"
「찰싹」
그녀가 넘어지고, 싸늘한 정적이 복도를 휩싼다. 그리고 정적을 찢는 흐느낌.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의 동공은 제멋대로 확대되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온 몸의 세포가 그 남자를 향한 맹렬한 증오를 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충격에, 나는 껍질을 벗기기 위해 쓰던 과도에 손을 베였다. 피가 살짝 배어 나온다.
"야, 조용히 안 해?"
그녀의 흐느낌에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 나는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하지만 잽싼 속도로 닫았다. 그리고 닫는 순간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의 남자친구다.
그는 나와 정확히는 딱 한번 만났다. 집 앞 슈퍼를 다녀오는 길에 그녀와 다정히 팔짱을 낀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와 나는 '이웃사이' 였고, 그 이웃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그녀는 날 그에게 소개시켰다.
"잘 부탁합니다."
악수를 청하려 내민 손은 제법 컸다. 듬직한 체격과는 맞지 않게 날카롭게 각진 얼굴. 거기에 작은 사각렌즈의 안경이 그의 날카로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시쳇말로 '야비하게' 생긴 사내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난 그 호의를 받아들여 기꺼이 악수를 했다.
그가 나를 얼마나 기억할 진 모르지만, 난 그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를 만나기 이전에도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그녀가 그와 함께 가는 것을 몇 번 정도 봤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는, 그녀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먼저 때려놓고 경고를 내린다는 게 우습기 짝이 없지만―를 내리고 계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스스로가 이때까지 분노를 삭힌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나는 침착한, 하지만 한껏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요, 괜찮아요? 이봐요! 괜찮아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찰싹」
내 어깨를 잡아야 했던 다정하고 고운 손길은 나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째서? 그녀는 왜 날 때린 것일까? 난 어안이 벙벙하여 내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에 몸을 걸치고, 이리저리 TV를 돌린다. 뉴스는 어느덧 끝나고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세속적이고 때묻은 사랑이나 그리는 드라마 따위는, 나의 이 사랑보다 위대하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녀의 따귀마저도 부드러운 손길로 느끼고 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가?
아주 조금, 그 남자에 대한 증오가 누그러졌다.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