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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9/23 23:20:55 |
Name |
IntiFadA |
Subject |
[픽션] 파우스트 - V2.1 - 제7화~9화(본의 아니게 도배가 되서 죄송...) |
제7화 만남. 그 두번째.
대회는 중단되었다.
이번 대회를 시작한 이래 세번째 죽음이라고는 해도 진락의 죽음은 앞의 두 죽음과 질적으로 달랐다. 앞의 두 죽음
이 경기와는 상관없는 외부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던 반면에, 진락의 죽음은 경기장 안에서 - 그것도 수많은
관객과 시청자의 눈 앞에서 일어난 죽음이었다. 더구나 시설물의 갑작스러운 추락이 죽음을 초래하였고, 당연히
이 죽음에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마땅히 축제의 장이어야할 e스포츠 최고의 대회에서 일어난 이 불상사에, 두 선수의 불행한 죽음으로
침울해져 있던 주관사 MGaneNet과 협찬사 SGF는 더이상 대회를 진행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결승 진출자가 결정된 상태로 - 규정상 도건은 부전승으로 결승진출이 확정되었다. - 대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대회의 재개를 요청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회 주최측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 경찰의 시설점검을 비롯한 수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설을 관리하는 S실업에서는 대회 전날 규정대로 시설물을 검사했으며
분명 검사시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누군가 고의로 시설을 훼손했을 가능성 또한
제기했으나 그와 같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1개월여에 걸친 수사의 결과, 단순한 사고로 사건은 종결
되었으며, S실업측에서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배상하고 해당시설 담당자가 구속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S실업측에서는 끝까지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항소의 뜻을 밝혔으나 이 사고를 설명할 방법은
그들의 과실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판정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수사가 중단되고도 다시 2주가 지나도록 대회는 재개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연달아 벌어진 3건의 사고는 대회에
관계된 모든 사람을 이미 탈진 상태로 몰고간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달 반은 도건에게 지옥이었다.
진락의 죽음을 현장에서 본 이후 도건은 마치 넋이 나간 것과 같았다. 주수균 감독의 말을 빌자면, "만약 리그가
연기되지 않고 애초의 일정대로 결승전이 진행되었더라도 그냥 기권했을" 법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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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재야, 효명아 이리 좀 와봐라."
벌써 몇 시간째 애꿎은 담배만 태우며 생각에 잠겨 있던 주수균 감독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두 명의 팀원을
불렀다. 역시 몇 시간째 연습은 하는둥 마는둥 하며 주감독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주장 운재와 막내 효명이
쭈빗쭈삣 주감독의 옆으로 다가섰다.
"너네... 도건이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니?"
"어떻게 생각하다니 뭘요?"
조금은 눈치가 없는 편인 효명이 대뜸 반문한다. 주감독이 말을 이었다.
"벌서 몇주째 방에만 틀어박혀서 밥도 제대로 안먹고 연습도 안하고 있잖아. 팀원들과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있는 것같고... 그래도 너희 둘이 도건이하고 제일 친하잖아. 뭐 좀 들은 거 없냐?"
두 선수 또한 말이 없었다. 그들이라고 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진락의 죽음 이후, 이 숙소의 어느 누구도
도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대부분의 다른 게이머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숙소에서 함께 먹고 뒹굴며 연습하는 그들이기에, 그들 중 아무도 도건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은 곧 도건이
지난 한 달 반동안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혼자 화장실에서 중얼거리기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후우~ 처음엔 워낙 맘고생이 심할 테니까 그러려니 했다만...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저지경이니... 정신병원
에라도 데리고 가봐야하는건 아닌가 모르겠다. 저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감독으로써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원...."
바로 그 시간. 도건은 실재로 화장실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넌 살인범이다. 최도건..."
"그것도 절대로 잡힐리 없는 완전범죄의 살인범."
"놀랍게도 악마를 동원해서 누구도 해내지 못한 완벽한 살인을 세 건이나 해낸 살인범."
"승리하기 위해서... 단지 승리를 위해서 동료를 죽인 파렴치한 살인범."
"그게 바로 너다. 최 도 건. 큭큭큭큭큭..."
한참을 마른 웃음을 날리던 도건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놀랄만큼 야윈 얼굴의 사나이가 웃고 있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살인범이 무려 웃음씩이나를 흘리고 있었다.
도건은 주먹을 뻗어 거울속의 사나이를 후려쳤다.
거울속의 사나이의 얼굴은 산산히 깨어졌고, 도건의 주먹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리고 도건은 자신의 주먹에서 흐른 피로 깨진 얼굴을 흠뻑 적신채 웃고있는 사나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
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살인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사나이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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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주 가량의 시간이 흘렀고, 게임계에서는 서서히 리그재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불행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단지 그것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그동안 e스포츠에 쏟아부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게임계 관계자들은 일단 SGF배 리그의 결승전을 치루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리그를 재개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1. 결승전 자체를 축제의 장이 아닌 죽어간 게이머들에 대한 추모의 장으로 만들것.
2. 그런 의미에서 야외무대에서 치루는 결승전에서 추모제를 겸할 것.
3. 가능한한 빠른 시일안에 리그를 재개하되, 그간 확실한 일정을 몰라 준비를 못했을 선수들에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보장할 것.
이와 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리그 관계자들과 각 팀의 감독들이 논의한 끝에, 결승전의 일자는 12월 5일 일요일로,
장소는 상암월드컵 경기장으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정지기간을 포함 반년가까운 시간을 끌어온 SGF배 스타리그 우승컵의 향방을 결정짓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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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맵은 노스텔지어. 도건은 1시 테란.
하나, 둘, 셋 일꾼을 생산하던 도건은 자신도 모르게 8배럭을 올리고 있었다. 마침 정찰보낸 SCV가 전송해온 상대
의 진영은 11시 저그. 빌드 또한 12드론에 앞마당을 가져가는 빌드를 올리고 있다.
'됐다. 이 게임은 이제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도건은 자신의 벙커링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가로 방향에 8배럭에 12드론 앞마당이라면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다. 도건의 진영에서 마린이 2기 모였을 때 도건은 SCV를 3기와 마린 2기를
상대 진영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미리 보내놓은 정찰용 SCV로 벙커를 짓기 시작했다. 상대는 벙커가 완성될
타이밍까지도 드론을 내려보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앞마당을 취소한 것도 아니어서, 도건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경기를 포기한 건가? 아니면, 야...양민인가?'
의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경기의 승패가 바뀔 일은 없다. 어느새 벙커는 완성되었고 마린들은 안전하게 벙커
안에 들어간채 저그의 앞마당 해처리에 가우스건을 쏘아대고 있었다. 도건이 이젠 됐다는 생각과 함께 함께 온
SCV들을 본진으로 돌리려는 순간, 땅속으로부터 시커먼 촉수가 벙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커???? 이 타이밍에 러커가? 도대체 어디서..?'
러커는 한 기도 아닌 듯했다. 터렛도, 베슬도, 스캔도 없는 도건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 이건 러커
한 기의 공격력은 아니다.
당황한 도건은 일단 SCV로 공격받고 있는 벙커를 수리하며, 자원을 짜내 본진에 엔지니어링베이를 짓기 시작했다.
우선은 벙커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러커가 본진에 난입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도건은 자신의 진영입구를
서플라이 디포우로 좁히며 벙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엔지리어링 베이가 완성되는 데로 입구에 터렛을 추가하면
어떻게는 지금의 위기상황은 넘길 수 있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아니 무엇보다 어떻게 지금 러커가
있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벙커를 수리하던 SCV가 한 기씩 터져나간 끝에 모두 제거되었고, 마침내 벙커와 그 안의 마린들도 모두 러커의
촉수앞에 속절없이 죽어갔다. 도건이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던 벙커링이 스탑러커라는 상대의 비상식적인
대응 -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불가능한 대응 - 앞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동안 도건은
진의 입구 방어라인을 일단 완성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이후를 도모할 수 있다.
적어도 도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상대 저그는 유리한 상황에 고무되었는지 한동안 공격을 오지 않았다. 만약 그 타이밍에 상대 러커가
도건의 벙커를 무시하고 본진으로 달렸다면 그 순간에 게임은 끝나는 것이었지만, 상대는 도건의 입구방어가
어느 정도 갖춰지고 테크가 올라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도건은 어차피 상대가 당장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해 벙커와 터렛으로 도배를 해봐야 게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저그전 패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차라리 배를 짼다는 마인드로 빠르게 테크를 올린 후
드랍쉽을 운영하며 앞마당을 가져간 후 한 방을 준비하는 것이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있다. 도건은 테크를
올리며 스캔을 아끼기 위해 중간 중간에 SCV정찰을 시도한다. 그러나 상대는 입구에 저글링을 대기해놨다가
기가막히게 정찰 SCV를 잡아낸다. 그 와중에 얻어낸 유일한 사실은 곳곳에 스콜지가 패트롤되어 있다는 것.
결국 도건은 드랍쉽 운영을 포기하고 한 방을 준비한다. 상대는 초반 러커 이후 스파이어를 올려서 다수의
스콜지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저그들이 그렇듯 이미 맵 여기저기에 멀티 또한 펴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암울한 게임에서도 실낫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 도건의 생각이었다. 상대의 멀티가 활성화되기
직전, 따라서 스콜지에 소비한 가스가 다 회복되지 직전의 한 타이밍에 병력을 모아서 한 방을 나가는 것.
그것이 도건이 생각한 유일한 승리방정식이었다.
도건은 차분히 한 방 병력을 준비한다. 상대는 다행히 방심하고 있는 것인지 게릴라 한 번 없이 도건의
본진 주변에 저글링과 오버로드, 스콜지로 시야만 확보하고 있다. 탱크 4기, 마메파 3부대, 베슬 1기가
갖춰지자마자 도건은 지체없이 센터로 진격한다. 앞마당에는 멀티를 건설하며...예상대로 도건의 입구
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러커 4~5기와 저글링 2~3부대 정도. 외치만 잘 잡으면 별 피해없이 뚫을 수 있는
병력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타이밍에 상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력 외에는 별다른 병력이 없을 것이다!
도건은 다리 위에서 탱크를 시즈모드하며, 베슬로 앞쪽의 탱크에 디펜시브 메트릭스를 걸어준다. 다행히
마메 부대의 컨트롤이 잘 되서 아주 소수의 병력만 잃으면서 앞마당의 병력을 뚫어낸다. 이제 남은 것은
순회공연 뿐이다. 테란의 악몽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저그에게 악몽을 안겨줄 차례다!
도건은 기세등등하게 센터로 질주한다. 그 때였다. 급초반 러커에 이어 상식을 뒤엎는 플레이가 또 한번
이루어진 것은.
두 부대 가량의 울트라리스트. 몇 기인지 확실치 않으나 다크스웜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디파일러. 한 부대
가량의 가디언과 한 부대 반 가량의 러커. 베슬을 향해 달려드는 스컬지 떼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저글링.
그리고 퀸의 인스네어와 디바우어러까지. 저그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닛이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쏟아진다.
'이건 불가능해.... 이건...'
불가능하기야 벙커링 타이밍에 나온 러커부터 불가능했다. 도건은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생각한다.
'미네랄 핵인가? 아니... 가스핵?'
'아니면....꿈....?'
도건은 문득 자신이 전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꿈에서 만났던 한 사나이도...
'누구지...?'
도건은 맞은편에 앉아 자신과 게임을 하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맞은편 자리에는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인 진락이 앉아 도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도건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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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은 방안에 서 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아니, 안개가 낀 듯하기도 하다. 어쩌면 방 안이 아닌지도 모른다.
도건은 가벼운 두통을 느낀다.
'여긴....'
도건은 이 을씨년스러운 공간이 자신이 이전에 온 적이 있는 공간임을 깨닫는다. 이 곳... 도건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한 사내를 만났던 곳.
도건은 천천히 되돌아선다. 그곳에 누군가 있을 것임을 확신한 듯.
"오랜만이네... 이젠 놀라지도 않는군. 확실히 적응이 빨라."
도건은 말없이 사내를 노려본다. 하얀 양복에 하얀 중절모. 하얀 장갑과 양말과 구두. 그리고 하얀 얼굴.
그자였다. 도건이 몇날 며칠을 이를 갈아온 그자.
"아- 아- 아- 뭐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지을건 없네. 계약을 맺었으면 마땅히 중간에 한 번 정도는 계약을
검토해보는 것이 상식이지 않나. 더구나 자네처럼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우량고객은 딱히 요청이 없어도
A/S 한 번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기도 하거든."
도건이 막 무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사내 - 메피스토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 동안은 잘 지내셨는가?"
"잘... 지냈냐고...?"
도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건의 눈은 마치 당장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핏발이 서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도건은 메피스토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나보고 잘 지냈냐고 물었나? 지금 나보고 잘 지냈냐고 물었어?"
"나를... 나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놓고 잘 지냈냐고 물었어?"
가만히 도건이 하는 양을 보고있던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피스토의 키는 도건보다 20센티미터
정도가 더 컸다. 그러나 워낙 마른 체형이라 상당히 불균형해 보였다.
"이런... 이런... 뭔가 마음에 안드시는 거라도 있었나요? 고객께선?"
도건은 두 팔을 뻗어 메피스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런채로 메피스토를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당기며
말을이었다.
"난... 난 저그를 이기고 싶다고 했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어! 넌 나를 속인거야!"
분노에 가득차 쏟아내는 도건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메피스토는 차가운 눈으로 도건의 눈을 들여다봤다.
메피스토의 얼굴을 도건에 의해 끌어당겨져 거의 도건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하는 상태로 되어 있었음에도
도건은 메피스토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냉장고를 열었을 때처럼 미세한 냉기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도건의 분노도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싸늘함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이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당신을 속였다니... 난 분명히 그대가 저그를 이기게 해주는 조건으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갖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라고만 했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지. 당신은 그 조건에 흔쾌히 응했고... 그런데 이제와서 속았다고 하다니 섭섭한걸?"
도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분명 메피스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피스토는 도건의 손아귀에서 옷깃이 빠져나오자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난 그대가 나의 제물이 아닌 제사장이라는 친절한 말로 그대가 날 위해 어떤 역할을 하게될 것인지
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는데... 아, 그런 고급 메타포는 좀 이해하기가 힘들었나?"
이 말을 끝으로 메피스토는 그 때까지의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표정을 버렸다. 그리고 마치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움으로 이번엔 그 자신이 도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대가 잊고 있는게 있네."
"지금과 같은 상황은 바로 그대 자신이 원했던 거라는 점이지."
"무슨 소리야? 내가 원했던 거라니?"
도건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말도 안된다. 지금의 이런 상황이 내가 원했던 거라니. 이 자는 지금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악마의 혓바닥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후후후... 내가 악마는 맞지만... 궤변이라고 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봐. 계약이 맺어질 때 그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치 도건의 속을 꽤뚫어보는 것처럼 메피스토는 말을 이어갔다.
- 정말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메피스토!
- Deal.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여.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아. 너는 나의 제물이 아닌 제사장이니까...
그랬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정말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건이 계약을 맺을때
내세운 유일한 조건이었다.
"인간들은 평소 무척이나 타인을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건 자신 뿐이지. 결정적인 순간엔
가장 이기적인게 인간이거든..."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이지. 계약을 맺는 그 순간에, 무려 악마와의 계약인데 말이야... 그대가 걱정한 것은
그대가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지 다른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어. 그대가 빼앗기는게 없다면 남들이야
죽던말던 아무 상관이 없는거지. 이 얼마나 인간다운가! 하하하하...."
도건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 저자의 턱주가리를 날려서라도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메피
스토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손에서 피가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도 범접하기 힘든 그런
위엄이.
"게다가 말이야..."
조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메피스토는 말을 이었다.
"조진락과의 마지막 경기 직전의 그대.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난 정말 감동했다네. 그것이야말로 인간적인
모습이지. 이제껏 나와 계약한 수많은 인간들 중에 단연 최고였어..."
- 그들은 사고로 죽었어. 우연히 죽기 전에 나와 마지막 게임을 했을 뿐....
- 설사 우연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난 지고 싶지 않아.
도건은 진락과의 4강 3차전 직전, 벙커링을 결심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그랬었다. 그 때는 정말 진락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었다...하지만...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도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건의 눈가에는 핏자욱이 어렴풋이 맺혀
있었다. 도건은 조금은 떨리는, 그러나 매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궤변을 늘어놓지마. 확실히 난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이지. 그리고 이기적이기도 해. 너 따위에게, 악마 따위
에게 의존해서 승리하려 했으니까..."
"이젠... 진심으로 후회한다. 나의 나약함과 이기적임을. 그리고 진심으로 저주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해
이따위 덫을 파는 악마라는 자를..."
도건이 비장하게 말을 이어가는 동안 메피스토는 줄곧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운채 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건이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과연... 과연 인간다워. 상황이 안좋아지니 이젠 남의 탓을 하는군. 자네는 정말 내가 계약을 맺은 중에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인간 특유의 이기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욕심과 가식까지 모든 걸 갖추고 있어. 브라보!
이거 자네를 선택한 나의 눈에 감사해야겠군 그래..."
도건은 말없이 메피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와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래봐야 악마의 농간에 놀아날 뿐
이다.
"악마여... 그대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 더이상 너와 이야기하고싶지 않다."
"하하하하하하하...."
도건의 말을 들은 메피스토가 앙천대소한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계약의 파기라...계약의 파기라고...하하하하. 이거 오늘 대화의 절정이로군 그래. 실컷 잘 써먹고 이제 결승
에 진출해서 상대가 저그가 아니니 계약을 파기한다는 건가? 정말 인간적이야! 정말 인간적이야!"
"그대여... 악마와의 계약이란건 그렇게 쉽게 파기되는 것이 아니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감히 내게, 대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함부로 계약의 파기를 운운하다니 어이가 없군 그래..."
도건은 말없이 메피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나름의 비장함과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도건을 메피스토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계약이란건 간단히 파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하지만 그대는 짧은 계약기간동안 너무나
만족스런 계약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기회를 주겠어. 이 메피스토님의 넓은 아향으로 말이지..."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어가던 메피스토는 도건을 향해 한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예의 그 한기만이
느껴지는 얼굴을 도건의 눈앞에 들이대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한다.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면 대회에서 우승해라. 당대 최고의 테란이라는 서윤성을 꺾고 우승하란 말이다.
우승하면 그대와의 계약을 두말없이 파기해주지."
"하지만 우승하지 못한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명심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메피스토의 모습은 점차 흐려져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시야에서 사라질 메피스토를 향해
도건이 말한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
"반드시...반드시 우승하겠다. 우승해서 모든 일이 네 놈과 같은 악마의 뜻데로 되는게 아님을 보여주겠다..."
단호한 결의를 담은 말과함께 도건은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고, 다음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여러 색으로
갈라지며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것을 느낀다. 처음 메피스토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느낌과 함께 도건은 정신
을 잃어갔다.
제8화 결승전
다음날부터였다. 도건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진 것은. 주감독으로부터 결승전 일정을 듣고난 도건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연습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밥도 잘 먹고
팀원들과 전략에 관한 토의도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주감독 이하 팀원들은 때마침 결승전 일정이 결정된
것이 도건의 투지에 불을 붙여 도건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진실이야 어떻든 다시금 승부에 불타오르는 도건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
내 일찍이 이토록 열심히 살았던들 악마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건은 요 근래 그런 생각을 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로지 게임, 게임에만 집중했고 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전략에 관한 토론을 하거나 윤성의 리플레이와 VOD를 분석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결승전까지 앞으로
10일 남짓. 도건은 그 10일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각오고 연습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명의 최고의 테란이 맞붙는,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과 악마가 맞붙는 결승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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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의 자부심이 다른 SGF! SGF배 스타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이곳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입니다."
오랫만에 모습을 드러낸 전상민 캐스터가 언제나처럼 힘찬 목소리로 결승전의 시작을 알린다. 벌써 결승전 행사
가 시작된지는 4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추모제와 축하공연, 그리고 리그 리뷰를 통해 결승전의 분위기는
이미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두 달 가까운 리그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상암 경기장은 e스포츠 최고의 게임을
보기 위한 관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자, 드디어 오랜 기다림을 뚫고 결승전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먼저 결승전을 치룰 맵 순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 SGF배 스타리그 결승전 맵 순서
- 최도건 vs 서윤성
제1경기 : 백두대간
제2경기 : 남자이야기2
제3경기 : 비프로스트3
제4경기 : 네오 버티고2
제5경기 : 백두대간
"자, 엄위원님, 김위원님, 오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음... 뭐 일단 같은 종족간의 대진이라는 점에서 맵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크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두 선수의 스타일을 보자면 서윤성 선수는 힘과 물량을, 그리고 최도건 선수는 기동성과 적절한 운영을 중시하는
타입이구요... 따라서 오늘 경기는 힘과 스피드의 대결이라고 요약해볼 수 있겠네요.
오늘 경기를 앞두고 두 선수의 상대전적을 분석해 봤는데 엠게임넷 전적은 3:2로 서윤성 선수가 한 게임을 앞서고
있지만 모든 공식전 전적을 다 따져보면 7:6으로 오히려 최도건 선수가 미세하게 앞서고 있거든요. 따라서 오늘
승부 정말 예측하기 힘듭니다."
"아.. 역시 예측이 힘들다는 말씀이네요. 자, 김위원님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모르죠. 예측하기 참 힘든 경기거든요. 전체적인 성적에서 그동안 서윤성 선수가 뭐 거의 최강의 게이머로 군림해
온 반면에 최도건 선수는 고질적인 저그전 약세로 사실 성적을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큰 경기 경험이
많은 서윤성 선수 쪽이 조금은 우세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다만 최도건 선수로서는 게이머 생활에서 최초로
결승에 오른 것이니만큼 각오가 남다르겠죠."
언제나처럼 해설자들의 경기예상이 이어지는 동안, 두 시즌만에 타임머신에 들어온 윤성은 가만히 맞은편의 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머로서 대단히 화려한 시간을 보내온 윤성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꼽으라면 윤성은
늘 도건을 떠올렸다. 비록 상대전적은 막상막하였지만 윤성은 도건과 게임을 할 때마다 자신이 조금은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사람들은 윤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라이벌로 이미 죽은 진락을 꼽았지만, 윤성 개인에게는 사실
도건이 더 꺼림칙한 상대였다. 만약 도건의 저그전이 그토록 부진하지 않았다면 윤성이 지금같은 성적을 내는
것이 조금은 더 어려웠으리라...
'그런 도건형과 드디어 결승에서 마주쳤군...'
윤성은 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결승에서 만나고 싶었던 상대. 그리고 가장 결승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윤성에게 그것은 조진락도 강정욱도 아닌 바로 최도건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나라면 몰라도 지금의 난 두렵지 않아. 반드시 도건형을 잡고 최고의 테란이 된다.'
오늘 경기맵 중 남자이야기와 네오 버티고는 전형적인 힘싸움형 맵으로 윤성이 자신있어하는 맵들이었다. 반면에
백두대간이나 비프로스트는 기동성을 중시하는 타입인 도건에게 조금은 더 유리하다는게 윤성 자신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1경기와 5경기를 백두대간에서 벌인다는 사실은 윤성에게 조금은 더 부담스러웠다.
'괜찮아... 준비해온 필살기가 있으니까. 적어도 백두대간 두 경기와 비프로스트 한 경기의 세 경기중 하나는 분
면 잡을 수 있을거야..."
전의와 자신감을 다지며, 윤성이 게임에 조인한다.
- 5, 4, 3, 2, 1....
"경기 시작했습니다. 백두대간 맵에서 벌어지는 테란대 테란전. 최도건 선수의 스타팅 포인트는 11시 붉은색 테란,
그리고 서윤성 선수의 본진은 5시에 있습니다. 녹색 테란."
"아, 양 선수의 진영이 대각선으로 멀게 나왔네요. 이렇게 된다면 스피드와 기동성의 플레이를 하는 최도건 선수
쪽보다는 아무래도 러쉬거리가 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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