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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9/23 23:15:28 |
Name |
IntiFadA |
Subject |
[픽션] 파우스트 V2.1 - 제1화 ~ 3화 |
"파우스트"라는 글을 기억하시는 분들께...
안녕하세요? IntiFadA라고 합니다.
꽤나 오래전에 pgr에 '파우스트 V2.0'이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뭐...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듯하지만..ㅠ.ㅠ(제 아이디로 검색하면 나올 듯)
그래두 꽤나 정성을 들여서 쓰던 연재글인데 개인사정으로 중간에 중단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얼마전 인연이 닿아 pgr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연재를 했고, 1분전쯤에(^^;;) 최종회를 업로드 했습니다.
(V2.1로 제목을 업그레이드 했지요...^^)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pgr에서 시작한 글인데 pgr에서 끝을 맺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올리고자 합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너무 심해서...대략 두 개로 나누어 올립니다.(하나씩 올리면 너무 심한 도배라...)
===> 너무 길어서 두 개로는 못올리게 되네요...ㅠ.ㅠ 별 수 없이 도배의 죄송스러움에도 불구하고 3개로 올립니다...
그럼 행복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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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 메카닉 테란의 제왕
"강성주 선수의 뮤탈리스크가 최도건 선수의 본진 위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최도건 선수
얼마 남지 않은 골리앗을 SCV로 수리해가며 안간힘을 다해보지만 골리앗은 하나 둘 파괴됩니다."
"아, 최도건 선수, 망했죠."
"네. 이 경기는 강성주 선수가 거의 가져가네요. 최도건 선수, 고질적인 대 저그전 약점을 오늘도
극복하지 못했어요."
[clissic]..Faust : GG
ZZone_H.O.T : GG
"아~ GG~ 최도건 선수 GG를 선언합니다. SGF배 스타리그 C조 2경기, 뮤탈리스크의 귀공자 강성주
선수가 메카닉의 제왕 최도건 선수를 꺾고 먼저 1승을 올립니다. 자, 엄위원님 오늘 경기 한 번
정리해주시죠."
"네, 오늘 경기는 최도건 선수의 기습적인 초반 벌처를 잘 막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정리하던 도건은 기뻐하는 성주를 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오늘로써
대저그전 공식전 전적 3승 12패. 테란과 저그의 기본적인 종족 상성을 비웃듯 그의 대저그전 성적은
참담하다. 그나마 3승도 기습적인 메카닉을 통한 승리일뿐, 정석적인 바이오닉으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이렇다보니 아예 그를 상대하는 저그들은 초반부터 그가 메카닉인가 아닌가에 더욱 신경을
쓰게되고, 그 결과는 오늘과 같은 참담한 패배로 이어진다.
메카닉 테란의 제왕. 알고도 못막는 무적의 원팩 더블 커맨드. 테테전의 괴물. 그의 메카닉은 프로
사이에서도 최강으로 꼽힌다. 그러나 입상 경력은 전무. 대회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저그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하며, 좌절에 좌절을 거듭해왔다. 챌린지와 듀얼에서 연달아 프로토스와 테란을 만난 대진운
덕에 무려 4시즌만에 스타리그에 올라왔지만, 첫 경기에서 저그를 만나 또 다시 패배. 16강에서 저그전
한 경기를 더 남긴 그에겐 암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숙소에 돌아온 도건은 내던지듯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당연히 예의 그 엄청난 잔소리
늘어놓을 줄 알았던 주수균 감독은 단 한 마디만 남긴채 뭘 사러 간다며 나가버렸다.
"저그를 극복하지 못하고선 넌..."
"됐다. 너도 생각이 있겠지. 피곤할텐데 쉬어라."
'제기랄....'
늘 활기차던 감독의 저런 모습이 도건에겐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어디 감독 뿐일까...그의 저그전
문제점을 싸그리 고쳐놓겠다며 그를 도와준 운제, 동인, 길석 등 팀내의 테란 플레이어들과 바쁜
와중에도 연습 상대를 해준 영준과 효명 등 팀내 저그 플레이러들을 보는 것도 다 부담스럽다.
처음 프로에 데뷔할 때만 해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바이오닉이 그닥 강한편은 아니었어도 종족간 상성
에 힘입어 5할 이상의 승률은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의 화려한 메카닉에 가려 다소 평가절하
되는 경향은 있어도 바이오닉이 '강하지 않은' 것이었지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진락, 변태준 등의 완성형 저그가 대거 등장하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저그가 각종 대회에서
활약을 펼치면서 그의 암울기가 시작되었다. 점점 저그전은 승보다 패가 많아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저그를 만나도 자신이 없다. 심지어 웬만한 온라인 저그고수와의 연습경기에서도 5할 승률을 유지
하기가 버거운 상황이니 바이오닉 능력만을 본다면 '프로'라는 네임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잠도 안오는군...'
도건은 컴퓨터를 켜고 배틀넷이 접속했다. 어지간해서는 게임에 진 날에는 배틀넷을 피하는 그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길드원들의 잔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할거 같다.
[clissic]..David : 어 도건형 왔네. 형 하이요~
[clissic]..Mozart : 어쭈리~ 도건쓰 웬일로 게임지고 접속을 다했냐?
[clissic]..Racine : 어이~우리 아트바이오닉 오셨군...
[clissic]..David : 종민형 또 시작이다..-_-;;;
[clissic]..Faust : 종민쓰 자꾸 비꼬면 듀거~
[clissic]..Racine : 억울하면 바이오닉 연습좀 해라. 그게 뭐냐? 스타리그까지 올라가서 허무하게
[clissic]..Faust : 그만해라. 나두 괴롭다... 내가 연습을 안해서 그러냐? 해도 안되는걸..
[clissic]..Mozart : 넌 스팀팩을 난사하는게 문제야...
[clissic]..Faust : 그만하고 게임이나 하자.
[clissic]..David : 오늘은 길드전 있어서 안되요 형.
[clissic]..David : FC길드랑 그쪽 길드 채널에서 길드전 하기로 했음.
[clissic]..David : 형두 와서 옵이나 하등가...프로라 참가는 안되겠지만..
[clissic]..Faust : 됐다. 난 갈란다. 뉘들이나 게임 잘해.
[clissic]..Faust : GooDByE
도건은 배틀넷 연결을 끊고 연습용 ID로 바꿔서 다시 로그인한다. 아무래도 프로인 자신의 원래 아이디
로 배틀넷에서 게임을 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도건은 고수들이 많다는 몇몇 채널을 돌아
다니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5연승인가 6연승인가를 하고 기분이 좀 나아질 무렵 누군가에게서
귓말이 들어왔다.
Mr.Mephisto : 한 게임 하실래요?
Dr.Faust : 누구?
Mr.Mephisto : 전 메피스토...쿠쿠쿠
'웃기는 녀석이군...자신은 메피스토고 난 파우스트라는건가...'
Dr.Faust : 주종이?
Mr.Mephisto : 테란. 저그킬러...ㅋ
'저그킬러라...'
Mr.Mephisto : You?
Dr.Faust : 저그. 맵은?
Mr.Mephisto : 로템. "괴테//괴테"로 조인.
Dr.Faust : OK
상대가 만든 방에 조인한 도건은 /stats로 상대의 전적을 검색해본다.
'51승 9패 1디스라...'
좋은 전적이다. 공방에서 논 것도 아닌 듯한데 이 정도면 아마 최고수 수준이라고 봐야한다. 그러나
도건도 나름대로 저그 플레이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로템은 초고수 수준에서는 저그맵이라는 것이
평소 도성의 생각이었다.
'저그를 못잡으면서 저그 플레이에 자신있다는 것도 모순인가?'
도건이 쓸데없는 생각은 하는 사이 상대는 'GG', 'GL'등의 메세지를 날리더니 어느새 게임을 시작한다.
도건의 위치는 2시. 12시로 오버로드를 날리며 드론을 찍어대기 시작한다. 손에 익은대로 가스트릭을
활용한 12드론 앞마당 빌드로 진행하며 정찰드론을 6시로 보낸다.
'6시에도 없네? 그럼 8시라는건가...?'
도건은 8시쪽으로 드론과 오버로드를 동시에 보낸다. 스포닝 풀을 올리고 드론을 찍고 있을 즈음에
상대의 정찰 SCV가 나타났다. 드론 2기를 붙이고 상대 진영에 간 드론을 보는데 드론이 상대진영 입구
에서 빙빙 돌고 있다.
'어라? SCV로 입구를 막아놨네? 정찰을 허용하지 않으시겠다?'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오버로드가 올테니까...근데 혹시 무슨 깜짝 전략을 쓰는건 아니겠지? 어? 저건?'
도건이 발견한 것은 자신의 앞마당 한 쪽에 생겨난 붉은색 점이었다.
'벙커링? 정찰 SCV가 둘이었던가?'
부랴부랴 본진에서 드론 6기를 동원 앞마당으로 끌어내릴 즈음에 도건은 이미 마린이 2기나 도착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센터배럭...그래서 입구를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구나...'
앞마당을 취소할 것인가? 컨트롤 싸움을 벌일 것인가? 망설이는 사이에 해처리가 터져 버렸다.
이제 도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건은 부랴부랴 2개의 콜로니를 짓고, 저글링을 찍었다.
어느새 마린은 벙커 안으로 들어갔고, 이젠 콜로니의 완성과 함께 저글링으로 벙커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의 병력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추가되고 있었고 어느새 벙커를 지은 SCV를 포함, 무려 4기의
SCV가 콜로니를 공격하고 있었다. 결국 1개의 콜로니는 성큰으로 변태도 하기 전에 파괴되었고 다른
하나의 콜로니 또한 성큰으로 변태하자마자 마린과 SCV의 공격에 파괴되었다. 본진에서 나간 6기의
저글링 또한 무력하게 사살되고 만다.
Dr.Faust : GG
MR.Mephisto : GG
Dr.Faust : regame?
MR.Mephisto : sure
Dr.Faust has left game.
게임에서 나간 도건은 바로 같은 제목의 방을 만들었다. 곧이어 메피스토의 조인.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게임이 시작된다.
도건의 위치는 2시. 아까와 같다. 도건은 전 판의 교훈을 발판삼아 10드론 앞마당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드론 서치를 센터를 거쳐서 보내며, 상대의 기습적인 전략이 없음을 확인한다. 도건의 드론은
상대가 6시에 있음을 발견했다. 서플라이 없이 올라가는 배럭. 8배럭 BSB테란이다.
Dr.Faust : ho... bunker again?
MR.Mephisto : ^^;;;;
'들통났으니 설마 벙커링을 하지는 않겠지. 그럼 내가 유리하다!'
일단 그래도 벙커링을 의식한 도건은 4기의 드론을 앞마당으로 보낸다. 4기의 드론이 막 앞마당에
도착할 무렵, 도건은 어느새 벙커를 짓고 있는 SCV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벙커링?'
다시 2기의 드론을 앞마당으로 보내며 도건은 벙커를 짓는 SCV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도건은 타이밍상
벙커를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3기의 SCV를 보낸 상대는
절묘한 컨트롤로 수리와 벙커건설, 그리고 드론 공격을 병행하는 예술적인 SCV아케이드를 선보인 끝에
벙커를 완성하고 만다.
도건은 달려오는 마린이 벙커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4기의 드론을 보내며, 남은 2기의 드론으로
콜로니를 짓는다. 이번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본진의 라바 뿐 아니라 막 터진 앞마당의 라바까지 모두
저글링으로 변태시킨다. 벙커완성. 도건의 드론들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2기의 마린은
벙커로 무사히 진입한다. 오히려 드론 2기를 사살하기까지 하고.
도건은 입술을 깨문다. 한 개의 크립은 성큰변태에 실패하고 깨져나갔지만, 다른 한 개는 무사히 성큰
으로 변태했다. 막 터져나온 본진과 앞마당의 8저글링 2드론을 동원하여 상대의 벙커로 돌진한다.
도건의 공격력은 1성큰, 8저글링, 2드론. 상대의 공격력은 5마린, 3SCV, 1벙커. 벙커의 사거리가 성큰
에 닿지 않으므로 8저글링으로 3SCV를 파괴하면 무난히 막아낼 수 있다. 드론피해와 생산한 저글링의
숫자를 고려한다면 막아도 손해지만.
그러나 도건의 예상은 정확히 빗나간다. 도건의 저글링과 드론이 달려들자 상대는 환상적인 SCV, 마린
컨트롤로 SCV의 사망을 저지하였고, 겨우 1개의 SCV를 잡았을때 상대의 마린이 추가되며 도건의 병력을
모두 저지. 1개 남은 성큰과 결국 앞마당 해처리마저 파괴한다.
Dr.Faust : GG
MR.Mephisto : GG
Dr.Faust : 1 more game plz
MR.Mephisto : ^^ OK
'웃어?'
도건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벙커링에만 연달아 2패라니.
'테란으로 붙어봐?'
도건은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저그로 잃은 자존심은 저그로 갚아준다. 아예 벙커링을 못하게 스포닝
을 먼저 짓는 빌드로 가야겠다.
이후 도건은 정체불명의 메피스토라는 사나이와 3게임을 더 한다. 한 판은 9드론 스포닝 후 앞마당을
구사했지만 상대는 도건이 잠깐 방심하는 틈에 치즈러시를 감행, 도건의 앞마당을 날리고 본진으로
올라와 본진 미네랄 필드 뒤쪽에 벙커링을 하여 도건에게 GG를 받아낸다.
도건은 머리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고, 이후 두 판은 12드론 본진트윈 해처리와 심지어 9드론 발업
저글링 후 패스트 러커 빌드까지 시도해보았지만 두 판 모두 패하고 만다. 그것도 불가사이한 타이밍
에 들어오는 벙커링으로.
5번째 판을 지고 도건은 GG조차 선언하지 않은채 배틀넷을 나와 버린다. 9드론 저글링을 하고 벙커링
에 - 물론 정확하게는 치즈러시 이후 벙커링이었지만 -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찬물로 샤워를 하며 열을 식힌 도건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느새 새벽 2시. 팀원들은 오늘 게임에서
패한 그가 말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고 그를 건들지 않은채 먼저들 잠자리에
들었다. 도건은 정체불명의 메피스토와의 리플레이를 틀어놓고 첫 경기에서 5번째 경기까지 살펴보기
시작한다.
'도대체 뭘 하는 녀석이기에 이런 컨트롤을 할 수 있지?'
'이 타이밍은...전성기의 임대건도 이런 타이밍을 보여줄 수는 없을거야...'
'이 자의 벙커링은...'
리플레이를 통해 본 메피스토의 플레이는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는 테란 프로게이머인 그조차 갖지
못한 것을 세가지나 가지고 있었다. 칼날같은 타이밍. 환상적인 컨트롤. 그리고 일단 벙커링을 시작하
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 단호함까지.
도건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메피스토라는 자가 적어도 바이오닉에 있어서, 보다 정확하게는 벙커링에
있어서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정도면 나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바이오닉 테란을 구사하는 서윤성이라해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을거야. 도대체 메피스토가 누구지?'
들어본 적 없는 아이디이다. 누군가가 연습용 아이디로 게임한 것일까?
도건은 메피스토와의 게임을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타이밍이고, 컨트롤이다. 도건
자신도 벙커링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동안은 자신의 약한 바이오닉을 극복할
포인트를 벙커링으로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바이오닉 병력에 대한
컨트롤 문제와 대 저그전 타이밍 감각의 부재로 포기한 바가 있다.
'나에게 저런 벙커링이 있다면...'
새벽이라서 그럴까. 리플레이를 보고 있던 도건은 갑자기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프로게이머가 된 지
5년째. 대뷔 당시 메카닉의 제왕이라고 그를 떠받들던 많은 팬과 전문가들도 지금은 그를 메카닉이
강한 게이머라기 보다는 바이오닉이 약한 게이머로 기억한다. 몇 차례 메이저급 대회에 진출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1회전을 돌파한 적이 없다. 대저그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밤새워 고민해보고, 자존
심마저 접어두고 바이오닉이 강한 후배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도 했지만 별무소용이다.
'난 이렇게 그렇고 그런 게이머로 잊혀지는 걸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저그만 이길 수 있다면. 저 메피스토란 자와 같은 벙커링을 가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높이 비상할 수 있을텐데.
도건은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운채 그는 다시 한 번 메피스토라는 자와의 게
임을 생각해 보았다.
'분명 프로일거야. 그의 컨트롤과 타이밍은...아마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아니, 그의
벙커링은 프로의 실력 그 이상이야.'
'내가 그런 벙커링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런 컨트롤과 타이밍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메피스토...메피스토라...후후 그가 정말 메피스토라면 내 영혼을 그에게 넘겨서라도 그의 능력을
빌릴 수 있을텐데...'
도건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괴테의 소설속의 진짜 파우스트가 되는 자신을 상상하며.
제2화 : 만남. 그 첫번째.
도건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맵은 네오 로스트템플. 도건의 위치는 6시, 상대의 위치는 2시.
가뜩이나 테란에 약한 도건에게 6시는 정말 암울하다. 도건은 언덕탱크를 생각하며 입구를 봉쇄하고
빠르게 테크를 올린다. 상대가 뮤타가 아닌 러커쪽으로 방향을 잡아주길 기대하며.
아카데미조차 올리지 않고 투 탱크 드랍을 준비하던 도건은 상대의 테크를 확인하기 위해 SCV 1기를
상대 진영으로 보낸다. 성큰의 공격을 운좋게 살아서 지나친 SCV는 상대가 히드라덴을 지었음을
타전하고 저글링의 발톱에 산화하고 만다.
'됐다. 러커다.'
워낙 빠르게 테크를 올렸기 때문에 상대가 수송업이 되어 있을 염려는 없다. 언덕 탱크로 상대의
앞마당을 무력화시키고 상대의 역습 타이밍을 벙커와 추가 탱크로 막아내면 필승 분위기다.
'오랫만에 저그를 잡을 수 있겠는걸..'
행복한 상념에 빠지며 도건은 탱크 두 기를 실은 드랍쉽을 상대의 앞마당 언덕으로 날린다.
막 탱크 두 기가 내려지고 시즈모드로 변환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8기 가량의 뮤탈리스크가 날아온다.
'뮤타? 분명 히드라덴이었는데...훼이크였나? 아냐, 그렇다해도 이 타이밍에 뮤타 8기라는건...'
도건은 급히 본진에 벙커와 터렛을 추가하며 드랍쉽을 뺀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온 스콜지에 드랍쉽은
격추되고 탱크 2기는 속절없이 뮤타의 밥이 되고 만다. 완전한 암울모드. 그러나 도건은 포기하지 않고
본진 방어에 여념이 없다. 적지 않은 터렛과 벙커 건설로 조금 안심할만하다는 생각을 할 즈음 상대의
병력이 도건의 본진을 급습한다.
'이....이게 뭐야...뮤타에 러커에 저글링에 히드라와 울트라까지? 마...말도안돼. 이건...'
두 부대에 달하는 뮤탈리스크가 터렛과 벙커를 농락하듯 공격하고 있었고, 엄청난 숫자의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된 저글링은 울트라리스크의 틈속에서 건물을 파괴하고 있었다. 저글링과 울트라의 공세를
피해 하늘로 뛰워진 건물 또한 히드라의 입에서 뿜어지는 산성병기 앞에 급격히 HP가 떨어지고 있다.
도건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은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이 병력은.......'
분명 기껏해야 뮤탈리스크 한부대 남짓과 저글링 한 두 부대가 있을 타이밍이다. 상대가 앞마당쪽에
성큰을 그리 많이 짓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와 같은 병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도건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상대 게이머를 응시한다. 저만치 앉아 있는 상대 게이머의 얼굴이 흐릿하게
그의 눈에 들어온다.
'누구지? 내가 누구와 게임하고 있는거지?'
상대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 이제보니 그의 얼굴은 엇그제 그를 이겼던 강성주를 닮았다. 아니, 다시보니
그는 당대 제일의 저그 플레이어 조진락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변태준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쩐지
장학철을 닮은 듯해 보이기도 하다.
'누구냐....너....?'
도건을 둘러싼 공기가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몇 가지 색상의 물결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자신의
주위를 감싸는 것을 느낀 도건은 아득함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간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도건은 방안에 서 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아니, 안개가 낀 듯하기도 하다. 어쩌면 방 안이 아닌지도 모른다.
도건은 가벼운 두통을 느낀다.
'여기가 어디지...?'
모든 것이 불명확하다. 이곳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고 시계가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내가 어디로 온거지...?'
도건은 게임을 하고 있던 자신을 기억해냈다. 말도 안되는 타이밍에 나타난 말도 안되는 병력에게 무력하게
밀려 버렸고, 상대 게이머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서 있다. 마치
다크스웜의 안에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
"뭘 그렇게 불안해 하는가?"
묘하게 울리는 목소리. 도건은 놀라 뒤로 돌아섰다. 거기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사내는 마치 흰색의 광적인 신봉자라도 되는 듯 온통 흰색으로 칭칭감고 있었다. 하얀 양복에 하얀 중절모.
하얀 장감과 양말, 그리고 구두까지. 심지어 사내의 얼굴마저 비정상적으로 흰 빛을 띄고 있다.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다른 색깔은 오직 칠흙처럼 검은 머리칼과 주사빛 입술 뿐.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가?"
"메....메피스토..."
특별한 근거는 없다. 그저 온라인상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 Mr.Mephisto. 성별도, 나이도, 이름도, 직업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 게이머. 그러나 어찌된 샘인지 도건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그 메피스토라는 것을. 그가 바로 악마의 벙커링의 주인공임을.
"내가 왜 여기있죠? 그...그리고 당신은 또 왜 여기있는 거죠?"
"후후후후...우리가 왜 여기 있느냐고?"
마치 동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소리로 낫게 웃으며, 그는 말을 이어간다.
"왜냐구...그건 중요한게 아니지. 그런 질문은 단지 궁금증을 채우기 위한 질문일 뿐이야. 그런 면에서 전혀
미래 지향적이지 않을 뿐더러 창조적이지도 않은 질문이야."
메피스토의 발음은 마치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삼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우물거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심령 깊숙히까지 새겨지는 듯한 느낌이다.
"좀 더 미래지향적인 질문은 '어떻게'라고 해야지. 그럼 최소한 무언가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으니까. 혹은
'언제'라는 질문도 좋아. 이 상황에서 좀체로 그런 질문은 하지 않으니까 창조적인 구석이 있거든.
큭큭큭큭..."
이번의 웃음은 조금은 을씨년스런 느낌이다. 원래 이 자의 분위기 자체가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지금 자네가 해야할, 그리고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은 세 가지 모두 아니지. 자네가 지금
해야할 질문은 바로 '무엇을'이야. 지금부터 자네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 물어봐야 해."
"무엇을...?"
"그래.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군.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자넨 어떤가? 자네는 무엇을
하고 싶지?"
갑자기 이 곳에 들어서서 이 자와 대화를 시작한 이래, 그는 계속해서 끌려다니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내가 무엇을? 내가 이 자와 무엇을 하고 싶냐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잖아. 자네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 자네가 날 보는 순간 떠올린 것. 아니, 날
보기 전부터 원했던 것.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도건이 대답하려는 순간, 메피스토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진짜 파우스트가 되고 싶지 않은가? 메피스토를 만난 파우스트 말이야."
"파우스트...?"
"저그를 이기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저그를...이긴다고...?"
"이런..이런...이제보니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친구로군 그래. 나를 보는 순간부터 자네 마음속에서는
외치고 있지 않았는가? 저그를 이기게 해 달라고. 내 벙커링을 배우고 싶다고. 나는 이미 그 소리를
다 들었네."
"벙커링...당신의 그 벙커링..."
도건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 사내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저 자를 보는 순간, 아니 배틀넷에서
저자와 게임을 한 직후부터 그는 끝없이 저 자의 플레이를 동경해왔다. 그걸 배울 수만 있다면...저 자의
컨트롤과 타이밍을 나의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벙커링을....내가 배울 수 있다구...요?"
"물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벙커링을! 저 자의 벙커링을 가질 수 있다니!
그러나 다음 순간 도건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 장면은, 지금 이 자와 나의 대화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악마와의 계약 바로 그것이 아닌가.
도건은 갑자기 섬찟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댓가는? 소설속의 파우스트처럼 내 영혼인가?"
"이런...이런...쯧쯧쯧.."
메피스토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이나 만화를 통해 잘못된 상식을 배우지. 그 중 대표적인게 이른바 악마와의 계약에
대한 거야. 영혼을 팔다니...그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악마라는 존재는 말이야, 자신의 계약자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네. 바로 그 계약자들 덕분에 우리가 존재
하는 거거든?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은 고객을 기업들이 대하는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고객을 대하는게 바로 악마란 말일세.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원조는 우리 악마들인 샘이지."
메피스토는 얼굴을 들어 도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메피스토의 섬뜩하리만치 하얀 얼굴은 마치 빛
을 내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두 눈은 마치 도건을 빨아들이는 듯한 착각을 할 만큼 깊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고객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고? 그건 말이야, 이른바 종교를 믿는 자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야. 자네도 알지 않는가? 종교를 믿는다는 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자기 배만 채우는
거짓말쟁이 들인지를."
도건은 그의 말이 궤변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묘한 설득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각종 게임을 즐겨온 그에게 있어서 사실 악마라는 캐릭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훔쳐먹는 사과가 더 맛있는 것처럼, 금지된 무언가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저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도건에게 있어 영혼을 팔아서라도 한번쯤은
가져보고 싶은 유혹이었다. 더구나 - 적어도 이자의 말대로라면 - 영혼조차 빼앗기지 않는 다면야!
도건은 고개를 들어 메피스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꿈에 나올까 몸서리쳐질만큼 섬뜩하고 깊은 눈이다.
그러나 도건은 위축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승부다. 기싸움에서 밀려서는 승산이 없다. 마치 스타
크래프트를 할 때 그런 것처럼!
"그럼 당신은 뭘 갖겠다는 거지? 내게... 내게 그 벙커링을 주어서 당신이 얻는건 또 뭐지?"
"후후후. 내가 얻는거라... 물론 내가 얻는거야 있지. 악마는 자선사업가가 아니거든..."
"하지만 그걸 말해줄 순 없어. 나만의 비밀이니까. 다만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지. 난 자네에게 그 무엇도
빼앗지 않을거야. 내가 자네에게 벙커링을 알려 줌으로써 갖게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것이지
애당초 자네의 것은 아니거든... 어때?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도건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메피스토의 제안은 한 마디로 불안했다. 그가 무엇을 얻는지 알 수 없다니!
하지만 한 편으로 거부하기 힘든 제안인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잃는 건 없다! 그리고 대 저그전의
강력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도 비상할 수 있다. 서윤성처럼, 조진락처럼,
강정욱처럼 수많은 게이머의 머리위에 군림할 수 있다!
메피스토는 도건의 망설임을 잠시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특유의 하얀 미소를 띈 채.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스타카토를 넣은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지는 어조로.
"나의 벙커링이라면 너는 앞으로 저그에게 단 한 게임도 패하지 않을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도건은 멍하게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메피스토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아 보였다. 도건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내게서는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요?"
이제 메피스토의 모습은 절반쯤 투명해져 있었다. 그리고 온 방안을 울리는 듯한 음성으로 메피스토의 말이
이어졌다.
"약속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름으로... 인간이여, 이제 시간이 없다. 나의 제안을 받아드리겠는가?"
도건은 잠시 후면 그에게 왔던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급히, 소리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메피스토!"
메피스토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결에 그의 웃음소리와 희미한 음성이 흩어졌다.
"Deal.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여.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아. 너는 나의 제물이 아닌 제사장이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고, 메피스토의 존재는 공기중으로 흩어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혼자 남은 도건은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고, 다음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여러 색으로
갈라지며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것을 느낀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겪으며, 도건은 서서히 정신을 잃어간다.
제3화 첫번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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