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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9/07 23:05:03 |
Name |
GoodSense |
Subject |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소설이 지닌 심각한 역사 왜곡의 문제(아래글에 이어서..) |
이러한 사례들은, 이순신이 계미년의 니탕개 토벌전과 정해년의 녹둔도 전투 및 무자년의 시전부락 토벌전 등, 북도에서 벌어졌던 대 여진족 전투들을 통해서 무장으로서 자신의 성가를 대단히 높이면서, 위로 임금과 아래로 신하들의 주목까지 모두 받는 장수로 크게 성장했음을 웅변한다. 이 사료들은 또한 김탁환이 <불멸>에서 원균을 두고 "랑캐 토벌전으로 '육진의 수호신'이란 칭호까지 받은 명장"이라고 강력하게 내세운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 임진왜란
① 임란 최초의 승첩은 어느 전투인가
그간 역사는 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승전 장수는 이순신이고, 승전 전투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자신의 휘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건너가 싸운 '임진년(1592) 5월 7일의 옥포 해전'이라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은 그것을 부인한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이 처음 바다를 건너온 날인 4월 13일 자정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4월 14일에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싸워서 30여 척을 격침시켰다는 것이다.(<불멸> 1, 296~308쪽). 그렇다면 시기로나 규모로나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첩이다. 과연 사실인가.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닌 역사의 왜곡에 불과하다.
당시 일본 침략군은 4월 13일 오후에 경상좌수영 관할 바다로 들어가서 아무런 전투 없이 부산포 건너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14일에 부산을 치고 15일에 동래를 함락시키느라고 경상우수영 바다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의 14일 오전까지도 원균은 전쟁이 일어난 것조차 몰랐다. 13일에 수많은 왜선이 부산포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응봉(鷹峯) 봉화대의 보고를 받은 가덕진 첨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이 띄운 급보를 14일 오전에 받은 뒤, 당시의 제도에 따라 급보를 받았다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그 사실을 인근의 이순신에게도 통보하면서 "필시 세견선(歲遣船:해마다 대마도 왜인들이 보내던 무역선)인 듯하나"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 임진년 4월 14일의 원균이었다.(이순신,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15일 술시 계본, '인왜경대변장(因倭警待變狀)')
일본군의 공격으로 경상좌수영과 연안 고을들이 모두 무너진 뒤, 경상우수사 원균은 막대한 적의 군세가 경상우수영으로 덮쳐오는 듯하자 화급하게 경상우수영의 전함과 전구(戰具)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 적과 싸워서 물리칠 수 없으면 무기와 군량을 물에 넣거나 불태워서라도 적에게 넘겨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장수의 책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배 한 척에 몸을 담아 전라도 경계에 가까운 사천(泗川)쪽 바다로 피했기 때문에 경상우수영 소속의 군사 1만여 명은 아무런 전투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 뒤 원균은 이순신에게 "본도의 수군이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분멸(焚滅)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상적(相敵)할 수 없어서 본영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알리면서 경상도로 건너와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비슷한 자료가 <선조실록>의 선조 25년(임진년) 5월조에 들어 있다. 4월 하순에 경상도에 내려갔던 선전관 민종신(閔宗信)이 5월 10일에 평양 행재소의 어전에 나가 복명하는 중에 원균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느라고 "원균은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원균이 스스로 주장했던 이 구절들이 훗날 뜬소문의 형태로 더러 전해졌는데, 김탁환의 <불멸>은 그쪽을 선택하여 '원균의 적선 30여 척 격파설'을 바탕으로 소설의 기본틀을 세웠다.
그러나 원균이 임진년 4월에 이루어냈다는 '적선 10척 분멸설'과 '적선 30여 척 격파설'은 오로지 위에 언급한 짧은 단편적인 문장들 뿐, 전투 자체에 대한 상세한 근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원균 자신이 경상우수영을 무너뜨린 직후의 대혼란기에 단지 두 번 아무런 근거도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주장했을 뿐, 그 후로는 이순신과 치열하게 '쟁공'하던 시절에조차 원균은 그런 주장을 전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원균을 마냥 치켜세우면서 이순신을 마구 깎아내리던 정유재란 초기의 어전회의에서도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수전에서 최초의 승첩을 거두었다'는 주장은 원균 지지자들측에서조차 전혀 주장된 바 없다.
반면에 왜적이 밀려오기도 전에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기록은 <선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공식 기록들과 당시대인들의 각종 기록들 도처에 남아 있다.
"흉칙한 적들이 형세를 떨쳐 패를 갈라 도적질하며 한 패는 연해안으로 들어가 남김없이 깨뜨리되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수군 진영으로 말하면 오직 우수영과 남해와 평산포 등 네 진 뿐이온데, 이제 듣자오니 우수영도 또한 함몰을 당했다고 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장계,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30일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미시본(未時本))
"(경상)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 해포에 우거하고 있고"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禹應辰)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경상우도 도순찰사 김수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전란 초에) 원균이 거느린 선척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시를 그릇 받들어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으므로(元均所領船隻 適於其時 謬承朝廷指揮 多數燒沈), 이순신의 온전한 군사가 아니었던들 장한 진세를 만들어 큰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약포집>)
이상의 자료들은 모두 당시의 장계와 신구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떠도는 풍문을 듣고 기록한 야사나 개인문집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왕에게 직접 올리는 장계나 신구차는 절대 거짓을 쓸 수 없는 문서이고, 그 안에 의도적인 것은 물론 몰라서거나 또는 부주의로도 거짓을 썼다면 응분의 처벌이 따르는 공문서들이다.
이순신의 경우는 그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로 구원하러 갈 진격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올린 공문인 장계이고, 김성일과 김수의 글은 임진왜란 초기에 그들이 당시 경상우도의 큰 벼슬아치들로서 현지에 있으면서 직접 파악한 현지 사정을 임금에게 급히 알린 장계이었다. 더구나 정탁이 신구차를 올릴 때는 이순신은 잡혀와 감옥에 있던 비상시였다. 당시 원균은 신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위세를 떨치고 있고 임금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공언하던 때인데, 그토록 긴박하고 불리한 시기에 정탁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 임금에게 올린 신구차의 문장 속에다 거짓으로 "전란 초기에 원균은 조정의 지휘를 잘못 받들어서 거느린 선척들은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었다"고 쓸 수가 있는가. 삼척동자라도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것이다.
더구나 이순신의 경우, 정유년에 체포되었을 때 그를 죽여야 할 죄목 중에 하나가 '원균의 아들의 나이를 틀리게 말해 그 공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전에 이순신이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에다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원균의)우수영도 함몰되었다'고 써보냈던 것이 만약 거짓이었다면, 이순신을 죽이자고 들 때 '원균의 아들 나이 문제'와 같은 구차한 사안을 드는 대신, 바로 그 장계 구절을 문제 삼아 원균을 모함하여 그 전공을 가린 장계를 올린 죄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탁환은 상세한 전투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단편적인 풍문을 기록해놓은 개인적인 야사의 기록인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그 근거라면서 "원균은 이순신의 함대가 오기 전에 독자적으로 삼십여 척의 적을 분멸"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결정적인 판별 기준이 또 있으니, 전란이 모두 끝난 후에 원균의 군공을 심사하던 공신도감의 기록이다. 심사 초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올리라는 선조의 특별지시를 거부했던 공신도감에서 선조에게 그 이유로 댄 것이 "원균은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無軍將)로서 해상 대전에 참가했고, 뒤에는 패하여 수군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조). 또한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극심해진 뒤에 선조의 앞에서 원균 지지파와 이순신 지지파들이 각기 두 사람의 전공을 거론하며 거듭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때조차, 원균 지지파들 입에서 "전쟁 초기에 원균이 독자적으로 '적선 10척' 또는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라는 주장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도 강력한 방증이 된다.
이 문제를 이리 상세하게 고증하는 것은, 이것이 ‘원균 명장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내세우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1994년에 KBS 텔레비전에서 제작 방영했던 '원균 명장설' 성향의 다큐멘터리 역시 첫머리를 원균이 적선 10척을 용감하게 격파하는 전투장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었다.
[장계의 내용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는가]
여기서 잠깐 '장계 제도'의 문제를 짚어본다. 김탁환은 <불멸>에서 이순신을 야비하고 간교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서 '장계' 문제를 거듭거듭 거론한다. 원균이 연명장계를 보내자고 하자 이순신이 나중에 보내자고 하고 먼저 몰래 보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원균의 공을 빼앗느라고 몰래 장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내 말 잘 들으시오. 옛 인연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요. 다시는 날 의식하지 마시오. 그대의 적은 나 원균이 아니라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들이오. 나의 전공을 훔치는 것은 용납하겠으나 내 앞에서 함께 연명 장계를 올리자느니 하는 수작은 부리진 마시오. 또 한 번 그런 속임수를 쓴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이순신이 쓴 장계 초본을 보자고 요구하는데, 이순신이 초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초본은 없소이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숨기고 계속 내놓지 않자, 원균이 "그대가 쓴 장계는 한 달 안에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오. 조정 대신들을 거치면 한 달 안에 그대가 쓴 장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말이오.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소." 운운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불멸> 2, 122~124쪽)
장계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장계가 임금에게 도달할 때까지는 장계를 쓴 사람만 그 내용을 알 뿐 다른 사람은 일체 알 수 없고, 다만 그 장계에 대한 회답인 유시가 내려왔을 때 유시 속에 언급된 내용에 의해서 짐작하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조정에 있는 대신들을 통해서 알아보면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장계제도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사료들을 분석해 보면, 자신이 보낸 장계의 내용을 즉각즉각 인근 지역 책임자들에게 통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에는, 그런 장계운용제도에 의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원균 자신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의 내용을 인근 지역 책임자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는 공문 안에 그대로 다시 기록해놓고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음'을 통고한 대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이순신 또한 원균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음을 다시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 임금과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가지 사안을 여러 갈래로 상호 교차하여 검증하고 확인하는 조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장초> <인왜경대변장>, 임진년 4월 15일 술시본 참조). 이것은 아마도 사실과 다른 허무맹랑한 말이 아무도 모르게 장계로 올려질 경우에 발생할 행정의 오도와 혼란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상호교차 확인과 감시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운용했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장계제도가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음은, 이순신의 죽을 죄 3가지 중에서 첫째 죄목으로 꼽혔던 '부산 왜영 대화재사건 관계'에 관련된 이순신 및 이원익측의 장계들에 의해서도 극명하게 증명된다.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고, 이원익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임을 띠고 남도에 내려가서 수륙군을 모두 통괄하면서 왜적에 대한 방어를 총지휘하고 있던 이순신의 상관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거제 현령 안위 등이 사신의 복물선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갔을 때 왜영을 불태웠다고 보고했다면서 그들의 보고 내용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면서 포상해주기'를 청한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유년 1월 1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월 2일에, '이순신의 그 장계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올린 것으로서 진상은 그와 다르다. 그 일은 이원익이 자신의 군관에게 명하여 도모하게 하여 실행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이 청한 대로 그의 부하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이원익측의 장계가 조정에 도달했다. 이원익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라는 지시를 받은 이조좌랑 김신국이 올린 보고였다. 그것을 본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이려 했다"면서 격노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조, 1월 2일조). 다음 달에 이순신을 체포하여 서울로 끌어다가 투옥시킨 선조는,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죄 세 가지 중에서도 첫번째 죄로 꼽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측의 장계 내용과 두 장계가 조정에 도달한 날짜를 고찰해 보면, 그 장계를 보낸 뒤에 이순신이 상관인 이원익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의 장계를 임금에게 보냈음을 즉각 통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벌어질 리 없었던 사태 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이순신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이순신을 아낀 사람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는 것을 이원익이 사전에 알았더라면 사실을 설명하여 그런 장계 자체를 올리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인데, 사후에 알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토록 비통한 비극의 빌미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첫 승첩인 옥포해전 뒤에 원균이 요구한 연명장계를 거부한 까닭은, '연명'이란 형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연명한 사람들이 함께 장계의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한 연명 장계는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균이 그 전투에서 행한 행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이순신은 연명 장계를 거절하고 따로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그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었고, 그 일로 두고두고 끈질기게 원균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김탁환이 주장하고 묘사한 것처럼 장계의 내용을 원균 전혀 모르게 몰래 보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르게 장계를 보낸다는 것이 제도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이순신은 '왜적의 간자(스파이)'를 사칭한 사기극을 벌였는가
남해현은 경상우수영 소속으로서 전라좌수영의 바로 이웃 고을이다. 이순신은 휘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를 구원하러 가던 때, 먼저 남해현에 사람을 보내서 "현령이 군선을 정비하여 중로까지 나와서 전라도 수군을 맞이해 달라"고 통고하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낯선 경상도 바다의 물길을 안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남해현은 '적이 급하게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성 안에 인적이 없고 곡식창고와 병기창고의 문도 열려 있었다"고 복명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왜군이 들어가 주둔하면 인접한 전라도까지 위험해지겠다 싶어서 군관 송한련에게 "정말 남해현 성 안이 모두 비어 있으면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사르라"고 명령해서 보낸 바, 송한련이 가서 창고들을 태우고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일을 자신의 <난중일기>에 명확하게 기록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불태운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자로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그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보고했다 (<임진장초>의 '근계위대변사(謹啓爲待變事)',임진년 4월 30일 미시 계본).
그런데도 김탁환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해괴하게 왜곡했다. <불멸>을 보면, 이순신은 부하들과 비밀히 짜고 남해현의 무기고와 곡물창고를 태운 뒤에 왜군들의 방화로 위장하여 "불지른 건 '왜군의 간자'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다들 속아넘어갔으나 원균과 그의 부하들은 지혜롭게도 목격자를 찾아내어 데리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찾아가서 대질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목격자의 증언 때문에 이순신측이 할수없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자 이순신을 향하여 "천벌을 받소이다, 장군. 그렇게 덮어버리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소이까?" 라느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이까?" 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간악하다"느니 "왜놈보다 더 비열하다"느니 하며 마구 야단치고 이순신의 부하들의 멱살을 잡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 크게 혼내주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은 꼼짝못하고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불멸> 2, 44~122쪽)
어째서 김탁환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이처럼 비루하고 추악한 꼴로 왜곡하는가. 소설의 세부 묘사를 보면, 김탁환은 이순신이 몸소 기록해놓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서 남해현 창고 방화사건을 취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그 부하들이 그 사건을 숨기기 위해서 몰래 짜고 '왜적의 간자'까지 사칭하는 사기극을 벌여 세상을 속이다가 원균과 그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혼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③ 이순신은 정유년에 부산에 진격하지 못했는가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1597년(정유년)이다. 그는 생애 최대의 고난과 슬픔은 물론 최상의 영광을 모두 이 해에 겪었다. 그런데 1월의 정유재란 발발부터 2월에 이순신이 체포되고 7월에는 원균이 전사하는 등, 극히 중요하고 긴박했던 상황이 두 소설에 모두 매우 부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이순신이 정유년 2월 10일에 직접 함대를 이끌고 다시 부산 앞바다에 진격했었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때의 부산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초기인 임진년에 이순신 함대가 부산의 왜영을 치러 갔던 부산 전투와 다른 전투임)을 두 소설의 저자 모두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경우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해도 특유의 소설 구조상 큰 무리 없이 넘어간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치욕적인 결점이 된다. <불멸>에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이순신은 너무 두려워서 끝내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까닭이 바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죄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극력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멸>에는 잡혀간 이순신 대신 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도원수 권율을 상대로 "이순신은 부산을 치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잡혀간 것이오이다. 그러나 소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불멸> 4, 99쪽). 그러나 그것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왜곡된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하긴 이순신이 정유년 2월에 감행한 수군 단독의 부산 왜영(倭營) 공격전은 위의 두 소설가만 모르는 게 아니다. 실로 기이한 일이지만, 정유재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전문적인 이순신 연구가들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관련 자료들이 충분히 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런 실정이다. <선조실록>의 선조 30년(1597)조에 실린 기록들을 날짜별로 정리하면서 살펴 보면 정유재란 당시의 긴박했던 정황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1월 13일: 지난 수년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교섭이 깨진 결과, 풍신수길의 재침 명령을 받은 일본 가등청정 부대가 부산에 상륙. 다시 발발한 왜란 때문에 선조와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온나라 백성이 모두 전쟁의 공포에 빠져들었다.
1월 22일: 전라병사(全羅兵使) 원균이 수군의 부산진공작전을 건의한 장계가 궁중에 닿았다. 원균은 상관인 통제사 이순신과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1595년 3월에 육군인 충청병사로 임명되면서 수군을 떠났고, 1596년 8월에 역시 육군인 전라병사로 전임되어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全羅兵營)에 주재하고 있었다. 이젠 육군 장수인 그가 수군작전을 건의한다는 것은 월권에 해당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바로 이 건의가 뒷날 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주, 현재의 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여 명이나 200명씩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면, 가등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이 장계는 몹시 선조의 마음에 들었다. 조선 육군의 전투력을 전혀 믿을 수 없던 당시 실정으로 선조가 바란 것이 바로 이런 식의 해결책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조)
1월 27일: 선조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신하들이 이순신과 원균을 두고 크게 다투는 설전이 다SI@_@ 벌어졌다. 신하들은 당파별로 나뉘어 동인은 이순신을 지지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선조가 원균을 수군으로 돌려보낼 뜻을 굳히고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라고 선언한 것이 이 날이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
1월 28일: 선조는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로서 승지 유영순에게 전교하여 다음과 같이 원균에게 하유하도록 명령했다.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바다의 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선조는 이 날만 해도 '경상도 통제사'직을 신설해서 원균에게 주고 이순신은 전라충청 통제사로서 원균과 같이 수군에 있게 하는 선에서 처리하려고 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사발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2월 4일: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라"고 주청했다.
2월 8일: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이 함께 수군에 복무하게 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원균에게 수군 전체를 맡기고 이순신은 처단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이순신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운운.
2월 10일: 한산도의 이순신은 임금이 이미 자신을 통제사직에서 파면하고 체포령을 내려서 선전관이 잡으러 내려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 날 해뜰 무렵에 함대를 거느리고 통제영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진격했다. 전투 현장인 경상도의 무장들인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경상우수사 배흥립을 함대에 동행시켰다. 함대는 이 날 미시에 부산 앞바다에 닿아 왜적과 싸우고 날이 저물자 절영도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다시 싸웠다. 왜적들은 육지에 올라가서 일체 바다에 나오지 않았기에 해안에 정박해 있는 적의 함선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공격하는 싸움이었다.
2월 12일: 이순신은 함대를 돌려 귀영길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순신 함대는 가덕도 바다에 가서 주둔하고 일대의 왜적들을 치기 시작했다.
2월 17일: 남쪽에 내려가 있던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의 부산 진격작전에 관해서 올린 보고가 이 날 처음으로 조정에 도착했다. 관련 보고는 2월 20일, 2월 23일 계속 조정에 올라왔다.(<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조). 이순신은 적을 치고 있던 가덕도 앞바다로 찾아온 선전관에게 체포되어 함께 한산도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선전관과 함께 온 원균에게 한산도에 있는 모든 물품을 인계했다.(<이충무공전서>)
2월 26일: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의하면,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사무 인계를 마친 이순신은 이 날 죄인의 신분으로 한산도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이충무공전서>)
3월 4일: 이순신은 초저녁에 서울에 도착하여 옥에 수감되었다.(<이충무공전서>)
3월 13일: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고문당하면서 신문 받고 있는 이순신의 죄목 3가지를 적시해 주면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도록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는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게 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
3월 20일: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2월 28일자로 올린 장계가 궁중에 도착했다. 내용은 지난 달에 있었던 이순신 함대의 부산 공격을 매우 헐뜯는 것이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면서 병위(兵威)를 과시하고 가덕도 등처에서 접전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이번 부산 거사에서는 우리나라 군졸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한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諸將)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20일). 원균은 감옥에 갇혀 있는 이순신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 장수들까지 이순신 함대의 부산 진격전과 관련된 죄인으로 처단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석방되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복무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4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이 3월 29일자로 올린 서장이 조정에 도착했다. 원균은 이 서장에서 새로운 수군작전을 제시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였던 지난 1월에 자신이 제안했던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가 무위를 과시하여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수군단독작전 대신,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 곧 "육군 30만명을 뽑아서 수륙합동작전으로 왜적을 쳐야 한다"는 게 자신이 통제사가 된 뒤에 그가 새로 생각해낸 작전이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19일조). 이후 원균은 계속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하면서 수군 단독의 부산 진격전을 거부했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조차 실행할 수 없었던 조선의 당시 국력으로 ‘육군 30만명을 동원한 수륙합동작전’은 실현이 전혀 불가능했다.
7월에 들어서자 선조도 수군 단독의 부산진격작전을 계속 거부하는 원균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던 모양이다.비변사에 전교하여 "원균에게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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