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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9/04 00:55:52 |
Name |
Artemis |
Subject |
[잡담] 빈 자리, 허전함, 그리움, 그리고 편지... |
2주 만에 본가인 수원집에 내려왔습니다. 원래 올 예정이 아니었는데, 엄마께서 전화로 집 안이 너무 쓸쓸하다고 오늘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내용과는 다르게 씩씩한 목소리에 반은 협박조였지만, 그래도 그 말투에서 허전함과 그리움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원집에 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리는 낯설음. 제일 먼저 달려나와 반겨야 할 '똘이'가 보이지 않았고, 그 시간 의자에 앉아 스타를 즐기고 있어야 할 그 사람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누나 오늘 스타리그 말야...."
금요일 저녁, 집에 도착한 내게 그는 스타를 하면서 그날의 스타리그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고, 12시가 되면 거실에 누워서 함께 재방송을 시청했었습니다.
아빠께서 예전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나 썼던 16절 크기의 회색 종이를 보여줍니다.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달랑 한 줄의 편지. 아빠께서는 기껏 온 편지가 이거라면서 허탈해 하십니다. 하지만 뒤이어 엄마께서 보여주신 것에는 편지지에 한가득 글자가 들어있더군요.
"엄마는 몸 건강하시고 저 없다고 울지 마시고, 아빠는 회사 잘 다니시고 누나들 좀 그만 괴롭히시고, 누나들은 빨리빨리 결혼 해서 나 휴가 좀 많이 나오게 해 줘."
대충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지만 첫 마디.
"가족들에게는 처음으로 편지를 써 보는 것 같군요. 군대에 오니 이런 기회가 있으니 좋습니다."
그 말에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동생이 군에 입대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네요. 그 2주 동안에 수원 본가엔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남동생이 군에 입대한 그날부터 우리 집 '똘이'가 너무 심하게 짖는 바람에 이웃집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와 결국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고 하더군요. 오늘 집에 들어섰을 때 똘이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허전함이 집 안에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대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외출이 그다지 잦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냈죠. 연애는 돈 들어 싫다고 안 하고, 술은 얼굴이 잘 빨개져 안 마시고, 흡연은 얘기만 들어도 질색하고... 대부분 게임 많이 하고, 만화책 많이 보고, 누나들이랑 쇼핑이나 영화 보러 가고, 엄마 할인마트 모시고 가고, 가끔 친구들 선후배 만나서 노는 정도였어요. 누나들 엄마 다 바쁘면 자기가 아빠 밥상 차려드릴 정도로 가정적인 면이 있는 아이죠. 그런 사람이 난 자리니 더욱 크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2주 만에 집에 온 저도 확연히 느껴지는데 부모님과 여동생들은 오죽할까요. 훈련소에서 보내온 옷 빨았는지 확인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애틋함이 느껴집니다.
딸 셋 끝에 본 아들인지라 부모님의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을 받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아빠가 외아들이고 한자교육을 받은 경남 사람이다 보니 그런 쪽으로 의식이 강해서 아들을 좀더 신경쓴 것뿐이지 딸들과 차별 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렸을 때의 딸들은 부모님께서 아들만 예뻐한다고 투덜댔었죠. 물론, 지금은 아니란 걸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남동생과 저의 사이는 매우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첫째고 남동생이 막내인지라 나이 터울도 많이 지고 해서 서로 투닥거릴 일이 없었죠. 원래 형제들끼리의 싸움은 아래위의 경우가 가장 많고, 같은 성(性)끼리의 싸움이 잦은 것 같더군요.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나 남동생이나 고집이 무척이나 세서 한 판 붙으면 크게 되는 경우가 많았죠.
스타크래프트는 남동생 때문에 처음 알았고, 그래서 남동생에게 배웠고, 어느 정도 실력이 갖추어졌을 땐 매일 둘이 겜방에서 팀플을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아빠한테 무진장 욕 먹었어요. 제일 큰 누나가 어린 동생 데리고 게임이나 한다고...^^; 그래도 스타하는 게 마냥 즐거워서 툭 하면 남동생과 겜방에 가곤 했습니다. 스타 중계 보기 위해 둘이 한 편이 되어서 식구들과 싸우기도 하고, 다행이 중계를 볼 수 있는 날이면 경기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하고 그랬었죠. 지금이야 텔레비전 두 대라서 그런 걱정은 없고, 최근엔 제가 그때만큼 실력이 안 되어서 거의 남동생 1 대 1 하는 걸 지켜보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요. 뭐, 가끔 제가 집에서 팀플하다가 종족 선택 잘못 눌러 못하는 거 나오면 남동생 불러서 대신 시킨 적도 있긴 하네요.^^;
이제 2주일일 뿐인데 남동생이 참 많이 보고 싶어요. 더불어 없어진 똘이도 그립고... 그러다 부모님 생각에 문득 가슴이 아픕니다. 올 3월 제가 직장의 문제로 집에서 나오고, 남동생은 군대를 갔네요. 올 가을 결혼할 예정이었던 둘째는 내년 가을로 일정이 미뤄지긴 했지만, 결국 올해 안에 집을 떠난 사람이 둘(물론, 한 명은 다시 돌아올 예정이지만 2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하죠)이고 앞으로 한 사람이 더 이 집을 떠나게 되네요. 당신들 마음이 참 아플 것 같습니다. 떠나온 자는 자기의 빈 자리를 알지 못하죠. 저 역시 남동생의 빈 자리를 보고서야 집 안 분위기가 다름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독립하기 전 식구들에게 왜 좀더 잘해 주지 못했는지 참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논산에 있는 훈련소에 있는 남동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다음에 자대 배치 받게 되면 그때 저도 난생 처음으로 남동생에게 편지 한 번 띄워 보려고요. 어쩌면 그 편지를 쓰면서 또 울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어떡하죠? 남동생의 바람대로 전 제 결혼으로 남동생의 휴가를 얻어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휴가 때 맛있는 거 사주죠 뭐.^^
돌아오는 추석은 왠지 모르게 더 쓸쓸할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식구 한 명이 빠진 명절이라서요. 아무쪼록 남동생이 몸 건강하게 군 생활 잘 마치고 집으로 무사귀환 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식구들에게, 특히 부모님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생기는군요. 살면서 오늘 같은 마음만 든다면... 가족들이랑 큰소리 낼 일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이지 좋겠군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네요. 이 마음 제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Artemis
p.s.
지난 번 메가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은 프로게이머(혹은 프로게임계)를 알아주지 못해서 기분 나빴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빴다는 의미였는데,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시더군요.ㅜ.ㅜ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 성실한 답변을 해준 제게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렸다는 것이죠. 그건 배려와 예의의 문제지, 게이머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아는 제가 그 순간 모멸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뭐, 결국 전달이 약했던 저 자신을 탓할 수밖에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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