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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8/19 21:34:52 |
Name |
blue wa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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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완결]빙화(氷花)14~20편 모음 서지훈, 이윤열, 강민 등장 무협소설 |
빙화(氷花)
*이 글은 edelweis_s님이 쓰신 글을 모은 것입니다.
*edelweis_s님의 글 쓴 후기는 분량의 압박으로 포함하지는 못했습니다.(양해 부탁)
*1~20 전편을 수록하고 싶었으나, 글이 너무 길어서 짤리는군요. 1~13편은 제가 모은 것이 있으니 빙화로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그리고 1~20 전편 한글 97로 첨부합니다.
*방학 동안 정말 즐겁게 읽었던 빙화가 끝나니 너무 아쉽군요. 작가 분에게 고맙다는 글이라도 남기시기 바랍니다.(바로 아래에 원본 글이 있습니다.) 짝짝짝~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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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화
-우리 셋이서 70명이면 거뜬하지. 안 그래?
아무래도 아군의 첩자가 사로잡혀 정보를 흘린 것 같았다. 여러모로 일이 귀찮게 된 셈이다.
“…….”
약 70명 정도 되어 보이는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엔 숨소리가 크게 들릴만큼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하지만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비음(庇蔭) 세 명이 내뿜는 눈빛은 보기만 해도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감히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주저하기만 한다. 그런 적들의 모습을 보고 인광(燐光-박태민)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 보니 대장부(大丈夫)가 아니라 잡배들만 모였구나.”
“…….”
“사내로 태어나서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쓰겠어? 빨리 빨리 덤벼!”
말이 끝나자마자 힘껏 던진 박태민의 창에 비명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를 들으니 한두 명 죽은 것이 아니라 여러 명 꿰어죽은 것에 틀림없다. 쓰러지는 동료들의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자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접근하는 족족 목이 잘려나가니 시간이 지나자 감히 덤비는 자가 없었다. 박태민이 그들을 조롱하며 욕설을 퍼붓는데 갑자기 적들이 술렁대더니 무리를 뚫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오호, 그래도 쓸만한 놈이 있구나.”
박태민이 비소를 흘리며 걸어 나온 적에게 말했다. 허나 그는 박태민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제 할말만 한다.
“천장. 태언장의 박용욱이라 합니다.”
“…….”
“시간이 남는다면 소장과 대작이나 하지요.”
******
어째 나온 술은 소흥주(紹興酒)다. 향이 높고 붉디붉은 비단이 풀어진 것 같은 빛깔. 소흥주가 붉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흰 잔에 따라놓고 보니 그 색이 더욱 더 붉다. 붉은 색 향과 맛이 정신을 앗아갈 듯 아릿하다.
“여러분들은.”
술을 내놓고서 정작 술은 한 순배도 돌지 않았다. 그런데도 먼저 말부터 꺼내는 저 심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박태민은 내심 박용욱의 무례에 마음이 상한 듯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박용욱 역시 그런 박태민의 모습을 외면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저희 태언장에 불순한 목적을 품고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박용욱이 차분하게 꺼낸 말에 서릿발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서지훈이 쏘아붙였다.
“알면서도 지금 한가로이 음주(飮酒)나 즐기자는 것인가.”
보통 사람 같았다면 그 냉랭함에 기가 질려 대답하지 못했을 터이지만 박용욱은 담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설마.”
“…….”
“소인이… 그리 착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 말에 서지훈, 박성준, 박태민 세 사람 모두 움찔한다. 술잔을 사이에 두고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해진다. 그러나 예의 바른 말투는 박용욱의 습관인지 계속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 것이 더욱더 성질 급한 박태민의 화를 돋구는지도 모르고.
“그저…….”
“…….”
“가시는 길에 술도 있지 아니하면 슬프지 않겠습니까.”
박용욱의 말이 끝나자 순간 싸한 분위기가 감돈다.
“듣자듣자 하니.”
“…….”
“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서지훈이 날렵하게 발도하며 앞에 있는 술잔을 튕겼다. 티잉. 신기하게도 술잔 안에 들어 있던 소흥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박용욱의 안면을 향해 날려갔다. 그러나 박용욱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오는 술잔을 손등으로 세게 쳐내자 폭발하듯이 터지며 붉은 소홍주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정파가 자랑하던 비양팔조는. 지금 태언장과 규리어수류의 습격을 받고 있을겁니다.”
“뭐…?”
“비양팔조가 없는 정파는. 이빨 없는 호랑이지요.”
순간 아차 싶었다. 첩자가 비음의 정보만을 흘린 것이 아니라 비양팔조의 위치까지 불어버린 것이다. 태언장과 규리어수류의 협공에 비양팔조가 전멸하면 쾌이태풍장을 위시해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비록 전세가 비등하다고는 하나 모두 비양팔조가 은밀히 행동하며 적의 옆구리를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 박용욱의 말대로 비양팔조가 없으면 정파는 이빨 없는 호랑이에 불과 했다. 박용욱은 입꼬리를 뒤틀어 올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리고 물론.”
“…….”
“당신들도 여기서 죽습니다.”
순간 박용욱의 좌우에 두 사람이 바람과 같이 홀연히 등장했다. 한 사람은 덩치가 워낙 크고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 매우 단단해 보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수염을 길게 기르긴 했지만 그리 늙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오른 손에 채찍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우리를 음해(陰害)하려 하셨다구요.”
“…….”
“우릴 너무 우습게 보셨군요.”
******
그 순간 슬슬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던 비양팔조는 발칵 뒤집혔다. 대강 둘러놓아서 거처를 마련한 막사를 걷어내는 중에 산을 타고 내려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목격한 것이다. 하늘색 비단에 어(御) 자를 수놓은 규리어수류의 깃발과 흰 바탕에 태(太)자를 수놓은 태언장의 깃발이다. 수가 도합해서 족히 천 명은 넘을 듯 했다. 비양팔조의 조장들은 급히 휘하의 무사들을 정비해 하던 일을 관두고 병장기를 챙겨들게 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비양팔조는 소수정예로 이루어진 부대. 때문에 은밀하고 신속함이 생명이었다. 위치가 발각된다면 정예무사고 뭐고 간에 엄청난 수로 밀려오는 적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허나 어찌 된 것인지 그들의 위치가 노출이 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전멸 당할 수 있는 대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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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화
어둡고 답답한 진(陣)중의 막사. 그 내부에서는 이윤열, 안기효, 김성제, 이창훈 네 명의 지휘자들 끼리 치르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먼저 안기효가 발언한다.
“어째서 지금 쳐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바로 밀어붙이는 것이 더 좋을텐데요.”
안기효는 앞에 있는 탁상을 손으로 탕탕 내리쳤다.
“지금 적들에게 시간을 줬다간 아주 단단하게 포진(布陣)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열이 잔뜩 올라 있는 안기효를 이윤열이 일단 진정 시켰다. 안기효가 화를 삭이며 자리에 바로 앉자 이윤열이 바로 말을 받았다.
“적들이 어떻게 포진하느냐. 그건 중요하지가 않네.”
“…….”
“적들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바로 그 것이 중요하지.”
이 말에 안기효 뿐만 아니라 태언장의 이창훈, 김성제도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다.
“무슨… 생각을?”
“바로 야습(夜襲)이라네.”
******
규리어수류 태언장의 사파연합군은 양쪽이 높게 솟아 올라있는 협곡(峽谷)에 다시 진을 쳤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도현, 박경락이 비양팔조의 무사들을 이끌고 사파연합군의 진을 공격했다. 사방에 불기둥이 치솟고 도망 다니는 사파연합군들의 발소리가 좌우를 어지럽게 울렸다. 그 속에서 나도현 박경락은 물 만난 고기 마냥 날뛰며 사정없이 적군의 수급을 베고 있었다. 박경락은 사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릴정도로 큰 소리를 쳤다.
“이 놈들! 이윤열이라는 놈은 어디에 숨었느냐! 썩 나오지 못할까!”
말이 끝나자마자 한손으로는 철퇴를 흔들고 한손으로는 검을 휘두르며 주위의 적들을 베고 또 벤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적의 지휘장들은 보이지 않고 진에 있는 무사들의 수가 유난히 적다. 그 무렵 나도현의 뒤편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린다.
“놈! 무림의 평화를 위해 출병한 우리에게 이 무슨 짓인가!”
“네 놈은 누구냐!”
흠칫 놀라 바라보니 안기효가 겨드랑이에 장창을 끼어 꼬나쥐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현은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잡졸의 수급 따위는 내 알바가 아니다! 비켜라!”
나도현의 고함에 안기효는 장창을 붕붕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앗! 짧은 기합성과 함께 안기효가 창을 들어 나도현에게 질주한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릴 만큼 강맹한 공격이 나도현을 단숨에 꿰뚫을 듯 쏘아졌다. 허나 나도현은 허리를 살짝 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나도현의 세검(細劍)이 안기효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챙. 새된 소리가 나며 안기효의 장창과 나도현의 세검이 맞물렸다. 사선으로 엇갈린 서로의 병기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는다. 안기효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조소하듯 말했다.
“너희들도 이제 끝이구나.”
순간 사파연합군의 진 북쪽과 남쪽에서 규리어수류와 태언장의 깃발을 든 무사들이 맹렬히 들고 일어섰다. 남쪽에 200, 북쪽에 200 족히 400명은 될 듯 했다. 삽시간에 많은 수의 적군이 등장하며 퇴로가 차단당하자 나도현 박경락이 지휘하는 비양팔조의 무사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도현은 이를 갈며 안기효를 올려보았다.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이 놈들!”
“후후, 이 걸로 놀라면 안 되지!”
다시 한 번 안기효가 웃음을 터뜨리자 이젠 솟아오른 양쪽의 절벽에서 수많은 무사들이 들고 일어난다. 역시 규리어수류와 태언장의 깃발을 들고 있다. 나도현이 대경하여 위를 쳐다보니 활시위에 활을 매기고 있었다. 현재 진(陣)중에는 비양팔조의 무사들뿐이고 퇴로마저도 막혔다. 위에서는 화살이 날아오고 도망치자니 목이 베여 죽을 형국. 자칫하면, 아니 전멸이 확실시 되는 것처럼 보인다.
******
“됐다!”
이윤열은 쾌재를 불렀다. 일부러 협곡에 진을 치고 야습을 기다렸던 계책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탓이다. 이제 여기서 화살비만 쏟아주면 저 비양팔조의 무사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윤열은 손을 들어 올려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
“와아아아아!”
이윤열의 명령에 배치 된 궁수들이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뒤를 돌아보니 ‘비양(飛揚)’이라는 초록색 깃발을 휘날리며 적들의 무사가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이제서야 이윤열은 아차 싶었다. 어째 나도현 박경락이 야습을 위해 끌고 온 무사의 수가 이상하게 적더니만 이것이. 반대편 절벽을 쳐다보니 그 또한 매한가지로 습격을 받고 있었다. 속았다. 복병 위에 복병을 놓다니.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읽지 못했다면 이런 계책은 불가능 할터인데.
“크윽……!”
활을 쏘기 위해 활과 화살만을 지급 받은 사파연합군의 궁수부대가 등 뒤에서 돌격해오는 비양팔조의 무사들에게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가 있을리 없었다. 순식간에 매복한 궁수들 반 이상이 무참히 베여나갔다. 비양팔조의 무사들은 널려 있는 활을 주워들었다. 그 활로 양쪽에서 나도현 박경락의 퇴로를 막고 있던 무사들을 향해 힘껏 쏘아 보내니 우루루 쓰러지는 꼴이 그리도 통쾌할 수가 없었다.
******
“성공입니다, 성공!”
강민은 옆에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재훈을 부둥켜안았다. 복병 위에 복병을 놓는 계책을 생각해낸 것은 강민이었다. 그러나 수적 차이가 두 배 이상 나다보니 성공해도 적을 격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오히려 화력을 분산시키는 꼴이 되어 허망이 각개격파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정확하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이재훈 역시 크게 기뻐하며 강민을 부둥켜안았다. 적들은 태반 이상의 군사를 잃고 퇴각하고 있었다. 이로써 큰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강민과 이재훈 둘 다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적들이 모두 물러나고 그들은 무리한 추격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 오늘 승리의 주역 몽상가에게!”
전태규가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이 넘치게 술을 따랐다. 강민은 멋쩍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모두들 한 명씩 와서 강민에게 독한 고량주(高粱酒)를 권했고 얼마 못 있어 그는 술이 거하게 취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거 싸우는 태는 호걸인데, 술 먹는 건 웬 아낙 보는 것 같구나!”
역시 술이 취해 얼굴이 붉어진 전태규의 농담에 사람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재훈도 실없이 웃다가 술잔을 들었다. 오늘의 일전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적들이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는 꼴을 볼 때 그 통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과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키는데 순간 잊고 있던 사실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양팔조의 위치가 발각된 것은 태언장으로 보낸 첩자가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한데. 허면 먼저 출발한 비음(庇蔭)의 삼인방은 어찌 되었나. 서둘러 태언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허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이 아찔하다. 지금 가야하는데.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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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화
-죽음을 재촉하는군.
옷깃 스치는 소리가 시끄러이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 이 곳 객잔에는 다른 사람 하나 없이 오직 그들만의 무거운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만이 존재한다. 그 기세에 대기도 질렸는지 코로 맡는 공기의 냄새조차 전에 없이 역하다. 그 와중에 갑자기 들리는 발도음(拔刀音)은 차라리 귓불을 잘라내는 듯 했다. 서지훈의 발도에 이어 뒤통수를 때리듯 작렬하는 박태민의 호쾌한 고함이 시원시원하다.
“뭘 그리 멀뚱멀뚱 보고 있는 거야? 빨리 시작하지 않구!”
그러나 임요환은 박태민의 말을 묵살하고 서지훈에게 눈길을 돌렸다.
“능숙하군.”
서지훈은 역시 담담하게 응수한다.
“적에게… 칭찬인가?”
“그러나. 당신의 날에는 확신이 없소.”
“뭐……?”
여태껏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해왔던 서지훈은 물론이고 박성준과 박태민까지도 흠칫 놀라 안색을 바꾸었다. 임요환은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본 체 만 체하고 눈을 살짝 감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빙화(氷花) 당신을 보고 도법(刀法)의 최고라고 하곤 하지.”
“…….”
“모두 틀린 말은 아니오. 다만.”
“…….”
“당신 흔들리고 있소.”
“뭐가 말이냐.”
임요환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더없이 적대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말은 그리 하면서도 서지훈은 무언가 찔리는 것이 느껴졌다. 최근에 까닭 없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던 이유. 칼이 무겁고 붕 떠있던 것 같은 이유. 잠 이루지 못하고 밤중에 계속 발도와 납도를 반복했던 이유들을 임요환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적에게 약점을 들켜 곤란한 생각이 들기보단 그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유 없이 무기를 휘두르고, 살인을 반복하고 있소.”
“…….”
“즉, 목적이 없단 소리라오.”
하. 평소에 그리 잘 웃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절로 웃음이 튀어나온다. 그 웃음이 진정 기뻐서 나오는 웃음이라면 좋으련만, 어이가 없음에 나오는 웃음이라는 것이 아쉽다. 목적이 없다라. 서지훈에게 언제나 목적은 존재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 칼을 휘두르고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다. 그런 그에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임요환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단순히 적을 동요 시키려는 목적일까. 아님 진짜 무언가를 서지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웃기는군. 난 강해지기 위해서 칼을 쓴다. 여태껏 한 번도 생각이 변한적도 없어. 헛소리는 그만 하고 싸움이나 시작하지.”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강해지려고 하는 것이오?”
쿵. 머리 위로 큰 바위가 떨어지는 것 같다. 후두부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은 나지 않았고 당연히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소리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강해지려 하는가. 생각해 본적이 없다. 생각을 하려 한 적도 없다. 그저 막연하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무엇 때문에 강해지려 하는가.
“당신에겐 수단적 목적만 있고 궁극적 목적이 없소.”
“…….”
“뿌리가 실하지 못한 나무는 얼마 못가는 법이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절로 침이 베어 나온다.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여태껏 그저 답답함만 느껴지더니 날의 흔들림이 자신에게도 보이는 듯하다. 마음의 동요는 곧 외부로도 드러난다. 하얗게 질린 서지훈의 얼굴을 보더니 박태민이 힘껏 소리쳤다.
“이, 이 놈들! 얕은 수를 써서 승리를 취할 셈이냐? 비겁하구나!”
“그럴 맘은 없소. 다만 저 자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하여…….”
“으윽.”
“만약 빙화(氷花) 당신이 그 이유를 찾는다면 가히 중원의 최강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테지.”
곧이어 더 이상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간 박태민에 의해서 싸움은 시작 되었다. 텅 빈 객잔에서 6명이 뒤엉켜 싸우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박태민과 박성준은 각각의 상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고 객잔에는 서지훈과 박용욱만이 남아있었다. 채앵! 멍하니 혼을 빼놓다가 갑자기 달려드는 박용욱의 도를 막아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온다. 아차, 이도(二刀)……. 서지훈은 빙화(氷花-서지훈의 애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막아냈던 것을 튕겨내고 재차 날아들었던 한 개마저 쳐냈다. 그리 큰 공격이나 어려운 공격은 아니었는데도 숨이 차온다.
-뿌리가 실하지 못한 나무는 얼마 못가는 법이지.
그 말. 임요환이 꺼낸 말이 여전히 귓속을 맴돈다. 하하. 만약 날 동요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면 아주 적중했군. 확실히 집중이 안 된다. 날은 눈앞에서 흔들리며 오히려 자신의 눈을 교란하고 있었다. 집병(執柄) 자세고 뭐고 엉망이어, 날 좀 죽여주어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어도 자신을 다스리는 것쯤은 이미 예전에 완성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무시한 칼이나 두근거리는 전장이 아닌, 그깟 말 몇 마디 때문에 이리도 흔들리다니.
“싸우는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퍼뜩 정신을 차려오니 양손에 도를 들고 달려오는 박용욱의 모습이 이미 코앞이다. 현란한 손놀림과 두 개의 병장기로 정신없이 공격해오는 박용욱을 상대로 역시 정신없이 손을 놀리며 상대했다. 허나 이리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자꾸 딴 생각이 든다. 당혹했고, 화가 나고, 슬프다. 강해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쉬운 그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서지훈에게 그 것은 문인들이 주고받는 문답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이다. 수련을 하는 것은 당연히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정파와 사파가 기를 쓰고 서로를 죽이려들면서까지 대립하는 것도 자기들의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강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빙화(氷花) 서지훈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그래서 기뻤다. 아니, 기쁜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에게 기쁨을 강요하고 있던 것이다. 가슴 한 구석에서 몰려오는 답답함을 애써 무시한 채,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우울했다. 걷잡을 수 없이 우울했다.
“으헉!”
그러나 순간 찾아온 고통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게 하고, 머릿속에서 고민하던 그 모든 것들을 잊혀지게 했다. 고통의 근원지인 복부를 쳐다보았다. 복부에 깊숙이 꽂혀있는 두 개의 도가 보인다. 피가 옷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어헉… 컥…….”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흐르고 바람바진 소리가 난다. 이제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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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화
******삽화(揷話)
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날 추위에 손이 부르트고 귓불이 얼어붙어 더 이상 참지 못한 서지훈은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강민은 손을 녹이려고 입김을 후후 부는 그를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서지훈은 감각이 없어진 손을 부여잡고 강민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추운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창을 휘두르고 있다.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펄럭이는 붉은 창영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답단 생각 전에 추위가 먼저 스며든다. 몸을 한 번 크게 떨고서 이대로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애써 몸을 일으켰다. 쌀쌀한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사형. 이렇게 추운데 조금 쉬엄쉬엄 하죠.”
“허허, 녀석.”
서지훈의 말에 강민은 너털웃음을 한 번 터뜨리더니 말없이 계속 창을 휘두른다. 그런 그를 보고 서지훈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사형. 사형은 이미 강하잖아요? 스승님도 사형정도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해요?”
재차 이어지는 서지훈의 물음에 강민은 겨우 창대를 땅에 짚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달아 서지훈도 그 옆에 주저앉는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강민의 손이 싫은 듯 고개를 흔드는 태가 매우 귀엽다.
“훈아. 넌 왜 이 추운 날에 수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거야 실력을 쌓기 위해서죠.”
강민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서지훈. 강민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다면 왜 실력을 쌓을까, 우리들은?”
이번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관자놀이를 문질러가면서 까지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더니 결국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한다.
“글쎄요. 막상 생각하려니 모르겠네요.”
“사실 이유라고 할 만큼 거창할 것 없어.”
“……?”
“대장부로 태어나서 무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오직 내일을 향해, 앞을 보고 달리는 거란다.”
“에에.”
“그런데 앞을 보고 달리다 보면 장애물이 생기겠지? 우린 바로 그 장애물을 해치우기 위해 수련을 하는 거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라. 뒤돌아보지 마. 만약 방해하는 녀석이 있으면 단칼에 해치워 버리는 거야!”
“…….”
******
“이유……? 그게 뭐야. 난 그런 거창한 건 몰라.”
“뭐……?”
박용욱은 몸을 배에 두 개의 도(刀)가 박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서지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흠칫 놀랐다. 그 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신음성이었다면 놀랄 일도 없었겠지만 그 것이 아니었다. 비록 피 냄새가 섞인 고통스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것에는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유 같은 건 상관없어. 그냥 앞만 보고 달린다. 난 내일도 달릴 거야.”
“…….”
“막는다면… 단칼에 해치운다.”
문득 도신(刀身)에서 손끝으로 이질적인 느낌이 쥐어진다. 이런…. 박용욱은 흠칫 놀라며 도를 빼냈다. 서지훈이 양 손으로 도를 움켜잡고 부러뜨리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 쪽은 무사히 빼냈지만 한쪽은 뚝 소릴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서지훈은 조소를 흘리며 배에 박혀 있는 날을 맨손으로 움켜쥐어 배에서 뽑아냈다. 푸슉. 피가 배에 뚫린 구멍에서 터져 나온다. 고통도 심할 터인데, 서지훈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빙화(氷花-서지훈의 애도)를 굳게 쥐었다. 그런 서지훈의 모습에 무시무시한 투기가 흘러나오는 듯해 박용욱은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진 하나의 도를 땅에 버렸다. 부러진 도가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싸움은 재개 되었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둘의 도가 연거푸 부딪힌다. 푸른색 불꽃이 튀며 새된 소리가 내부를 가득 메운다. 서로를 향해 휘두르는 도는 집요했다. 상대의 허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예리하고 정확한 공격. 둘이 언제까지나 공격을 주고받나 했더니만 갑자기 허리를 뒤틀며 어깨를 한껏 뒤로 재낀다.
“으아아아압!”
“하앗!”
쩡! 순간적으로 두통을 일으킬 만큼 큰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서지훈과 박용욱은 모두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맞부딪힌 양쪽의 도는 그만 반으로 동강이 나 버린다. 대단한 소리만큼이나 강한 힘끼리 부딪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똑같이 휘청이고 똑같이 부러진 이 때까지와는 달리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생겼다. 서지훈은 중심을 잡아 안정감 있게 서 있었고 박용욱은 여전히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서지훈의 완벽한 기회였다. 놓칠세라 서지훈이 도를 들고 맹렬히 달려든다. 그 기세에 박용욱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여기서 끝인가. 배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고 대체 어떻게. 박용욱은 곧이어 찾아올 자신의 패배가 믿기지 않았다. 아마 그 것은 패배가 의미하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헛.”
순간 귀에 들려온 탄성에 박용욱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서지훈도 휘청이고 있었다. 순간 안도감이 박용욱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서지훈은 빙화가 부러진 사실을 잊고 거리를 잘 못 재 엉뚱한 허공을 찔렀던 것이다. 아마도 부러진 도를 들고 싸우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리라. 살았다. 아직 기회가 있다!
“방해하는 건…… 단칼에 해치운다.”
허나 박용욱의 안도감이 외부로 크게 드러났던 탓일까. 서지훈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핼쓱해졌던 안색도 어느새 담담하다. 서지훈은 손을 풀어 부러진 빙화(氷花)를 허공에 붕 띄웠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굴리더니 팔로 땅을 힘껏 밀며 발로 도병의 끝을 강하게 찬다. 부러진 도라고 해도 그 것은 날이 서있는 무기. 손 대신에 발로 쑤셔 넣은 빙화는 정확하게 박용욱의 왼쪽 가슴에 작렬했다. 박용욱은 입이 쩍 벌어진 채로, 심장 깊숙이 박힌 금속의 차가움을 느꼈다.
******
급히 후퇴해 돌아온 이윤열과 일행들은 객잔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두운 객잔에 혼자서 우두커니 서있는 한 사람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몸은 비틀거리며 손에는 부러진 도 밖에 들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 자. 곧 들려온 목소리는 이윤열의 마음을 얼어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차가웠고 그만큼 잔혹했고 그만큼 애처롭다.
“너희도…….”
“…….”
“죽을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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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화
-방해 하는 놈들은…… 단칼에……. 해치운다.
“허억!”
서지훈이 벌떡 몸을 일으켜 보니,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풀어헤친 긴 머리가 앞을 가려 시야가 확보 되지 않는다.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겨보니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작은 방이었다. 침대와 작은 탁상밖에 없는 이 방에서 백의(白衣)를 입고 그는 혼자였다. 땀이 나 몸에 달라붙은 옷을 털며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오랫동안 누워 있던 것인가. 다리에 힘이 없다. 탁자 위에는 붉은 칼집의 빙화(氷花-서지훈의 애도)가 놓여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뽑아보니 반 이상이 잘라져버린 도신(刀身)이 차라리 처량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것을 보는 서지훈의 마음도 살갑진 못하다. 부러져서 이미 명이 끝난 무기라 하지만 수련 때부터 몸에서 떼지 않은 가족과 같은 것이다. 감히 외면하지 못하고 손에 집어 들었다. 휴우.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고 방을 나섰다. 드르륵. 문을 여니 바로 앞에 뜰이 보인다. 조촐하긴 하지만 침대도 있고 바로 앞에 뜰까지 있는 것을 보니 누워있던 곳은 손님을 모시는 사랑채였구나 싶다. 잠시 뜰을 거닐자니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자기를 부른다.
“깨어났느냐.”
“…예.”
돌아보니 주창영을 길게 잡은 채 다가오는 강민이었다.
“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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