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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7/21 12:41:30
Name 아랑
Subject [잡담] 慢, 그리고 滿
안녕하세요, 아랑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남기는 글이네요.
학기중의 바쁜 일정도 일정이었지만, 방학한 뒤 한국을 잠시 떠나 있었거든요.
그리 긴 일정은 아니었습니다만,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음.. 저로서는 첫 해외여행이었고, 첫 비행기 탑승 경험이었는데요.
갈 때, 중간 이동, 돌아올 때 모두 중국 민항기를 이용해서 결국 우리 나라 비행기는
한 번도 못 타봤네요^^;; (우리 나라 스튜어디스 분들이 최고 예쁘다던데.. 음..)

여행에서 느끼고 돌아온 점이라면 상당히 많았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중국이라는
그 큰 나라에서 보게 된 일 한 가지를 pgr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오랜만에 write 버튼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밤, 제가 머물게 된 곳은 항주였습니다.
그곳은 우리 나라보다 위도도 낮고 기온도 높습니다. 물론 습도는 더 높지요.
1년에 150일은 비가 온다는데, 다행히도 제가 있는 동안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호텔을 나와 밤 산책을 하게 되었지요.
항주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 산업은 다른 지방보다 덜 발전해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호텔이 시내와 가까웠는데도 말이죠.
호텔을 나와 그냥 쭉 따라 걷다가, 길 건너에 담배가게가 보였습니다.
제가 걷던 쪽에는 과일가게와 복권 파는 곳만 있어서, 담배가게가 신선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신난다, 하고 길을 건너려 좌우를 둘러보는데, 멈춰 있는 버스가 보였습니다.
멈춘 동안 얼른 뛰어 건너면 되겠다 싶어서 재빨리 뛰는데, 반대편에서 차가 갑자기
나타났지요. 하마터면 버스 피하려다 차에 치일 뻔했습니다. 굉장히 놀라서 길 중간에서
살짝 멈추어 있는데, 인도 쪽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소리를 치더군요.

"버스 가야지요-"

차를 피하는 동안 당연히 차선 바꿔 지나갔을거라 여겼던 버스가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허리를 열심히 숙이며 사과하고 길을 건넜지요.

담배가게 앞에 서서 가만히 차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신호등이 비교적 부족한 나라라서 그런지 대부분 저처럼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는데요,
한 사람도 뛰는 사람이 없더군요.
차도에 차가 없을 때 천천히 걸어가는데, 어떤 차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과는 굉장히 다른 풍경이었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차에 치일 뻔 했던 것은 제 탓이었습니다.
제가 길을 뛰어서 건너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더군요.
그냥 천천히 걸었으면 제 앞에 나타났던 차가 급정거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버스는
여유있게 가던 길 통과해 갔을 것이었거든요.
오히려 서두르면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사람들은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담배가게에 들어가 짧은 중국어로 물건을 사야만 했습니다.
호텔 근처이긴 하지만 거리 상점의 상인들은 영어를 거의 모르기 때문이죠.
제가 말을 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현지인들의 말은 방언이 좀 심했고
억양도 굉장히 독특해서 잘 못 알아듣고 엉뚱한 말을 잔뜩 하게 되었는데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껄껄껄 웃으면서 손짓 발짓 다 동원해 흥정을 하더군요.
장사를 하는 상인인데, 오히려 잡다한 질문을 하는 걸 더 좋아했고요.
근처 간식거리를 파는 곳에서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맛있다고 하니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잔뜩 해 주기도 했고요.
(안타깝게도 상인이 흥분한 채 말했기 때문에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요. -_-;;)

땅도 넓고 날씨도 더워서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던 전
이 날의 밤 산책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간 여행하면서 본 수많은 풍경들이 하나하나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죠.

더운 날씨인데도 음식점이나 호텔 부페에 존재하지 않던 찬물(내지는 얼음물).
뜨거운 음료수와 차, 그리고 천천히 나오는 음식들.
관광지 앞에서도 재빨리 사진찍기 바쁜 해외 관광객들과는 달리 천천히 걸어다니며
자기들끼리 떠들기에 더욱 주력하던 사람들. (그래서 여기저기 길이 막히지요.)
녹슨 자전거를 끌고 공원에 모여 춤을 추고 기체조를 하며
물로 길바닥에 서예를 하는 할아버지, 무한 랠리 배드민턴을 치는 할머니.

그들은 분명 우리가 보기에 느린 사람들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길거리에서 사각 팬티 한 장 입고 돌아다니며 배를 두드리는 것도 그렇고,
뜨거운 날씨에 뜨거운 차만 마시는 것도 그렇고요.
하지만 그 이유는 너무나도 타당했습니다.
옷을 벗는 건 더우니까 그런 것이고,
공원에 모여 춤을 추고 기체조를 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이고,
뜨거운 날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은, 뜨거운 날씨에 뜨거워진 몸 안에
갑작스레 차가운 것을 부어 넣어 느끼는 잠깐의 즐거움보다는
뜨거운 것을 마셔 속을 편안히 하고 더욱 땀을 빼게 해 천천히 뜨거움에
동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비행기나 버스가 늦어져도 그냥 의자에 편안히 누워 기다리고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에게 차가 속도를 맞추고, 함께 천천히 다니는 곳.
그들이 말하는 "慢慢地(만만디)"의 의미는 단순한 느림이 아니었습니다.

한 조각 여유가 가져오는 편안함과, 알아서 흘러가는 질서.
어딘가 한 구석 빈 것 같은 커다란 나라는, 그래서 꽉 찬 나라였습니다.

pgr에 들어올 때마다 보이는 화면 상단의 커피 한 잔.
그 여유의 의미가 다시 한 번 깊게 다가온 여행이었습니다..^^

오늘도 날씨가 덥습니다. 그럴수록 따뜻한 차 한 번 드셔 보시는 건 어떨까요.




ps. 강민 선수... 늦게 난다고, 높게 날지 않는다고 뭐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의 비상을 믿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번의 계기로 꽉 찬 비행을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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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리
04/07/21 12:55
수정 아이콘
중국 심양에서 유학중인 학생입니다. ^^; 간단하게나 중국여행을 갔다오셨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군요 :)

중국 만만디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집 근처 대형 할인마트에 칫솔 하나 사러 가서, 계산대 앞에서 30분동안이나 기다린적 있습니다 .^^; 바코드 찍는 시간이 상상을 초월하죠. 기다리면서 '내가 해도 빠르겠다-_-'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깐요. 물론 초조해하는건 한국인인 저 뿐이구요.

중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많은 걸 느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
04/07/21 13: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을 읽는 기쁨은,
이 더위에 얼음냉수 마시는 것 보다 더 한 기쁨입니다. ^^

여행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기에 들이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지요.
중국은 광활함을 느끼게 하는 면에서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전 그 엄청난 역사성에, 유적들에 질려 버렸었답니다. ^^
04/07/21 13:32
수정 아이콘
그런데 혹시 아랑님,
창원의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아니신가요?
04/07/21 14:16
수정 아이콘
아... 그래서.... 아무튼 오랜만에 아랑님글이네요. 중국.... 아 좋겠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04/07/21 16:36
수정 아이콘
밀가리님/ 맥주 한 캔 사려다 15분쯤 기다렸는데.. 밀가리님 칫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 저 역시 초조해한 건 저 혼자였습니다;;
p.p님/ 좋은 글들에만 코멘트를 달아 주시는 p.p님께 코멘트를 받아볼 일이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 했었는데-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서울의 한 대학생이에요..^^;
lovehis님/ 예전부터 글 쓴다고 해놓고..; 양치기 소년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아케미
04/07/21 18:4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중국 여행… 부럽습니다 흑흑.
여유를 갖는 일, 힘들더군요. 조금만 늦어도 괜히 긴장해 허둥대면서 뛰어나가는 것이 일상인 저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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