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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29 17:11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으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군대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냥 당연히 여겨지는 사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부 단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건에만 크게 집중하고, 주목해 보았자 이득될 것 없는 사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04/06/29 17:20
작년에는 대통령의 메세지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윤영하대위의 미망인께서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했습니다. 오직 그만이 미망인에게 편지로 위로와 유감의 뜻을 보냈습니다. 미망인은 그때 이런 나라를 위해서 죽은 남편이 원망스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간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군요. 우리가 미국을 욕하지만 군인들의 죽음 앞에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04/06/29 17:45
서해교전으로 사망한 고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글입니다. 정말 눈물이 나는군요.
내아들아!누구를위해 목숨을받쳐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 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술 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 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 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 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 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 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 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 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 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 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 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 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 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 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 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 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 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 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 국 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 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 동만 교수는 서해교 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 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 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 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 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사람처 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 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 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 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 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 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 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 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분들게,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서해교전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숨진 고 박동혁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04/06/29 17:58
서해교전중 전사하신 군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잊고 살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시간내서 추모행사에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04/06/29 18:53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글..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눈물이 나네요. 6월 11일부터 9월 20일까지 3개월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04/06/29 20:11
김대중대통령 장례식때 월드컵이라고 일본에 있었습니다.
국군을 지휘하는 사람이 이렇게 무관심하니 .. .. 말다했죠.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에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생명이라며 그렇게도 흥분하던 오마이뉴스와 한겨례는 매우 이성적으로 접근을 하더군요. 마치 서해교전을 조명하면 북한과의 전쟁을 바라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했습니다... 그들 역시 목적에 의해서 생명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물론 이제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서해교전에 그나마 작년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김선일씨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중 한 명 입니다. 생명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부끄럽습니다.
04/06/29 20:32
제가 제대 한달도 안남았을때 서해교전이 터지더군요.....
온나라가 월드컵때문에 축제분위기였는데 말년에 꼬이는구나 하며 하늘을 원망했었는데 다행이 아무일도 안일어나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4/06/29 23:15
서해교전으로 전사한 황도현 중사의 동생이 올린글.- -(펌)
.. 끝까지 읽어라.. 분명 내가 말했었지... 김선일이라는 사람 한명 죽은걸로 오바들 하지 말라고.. 그렇게 김선일이란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보이던 사람들이 이제와서는 조의금 돌려 받아라 국립묘지 망발하지 말라며 떠들고 있더군..몇일전..당신들 김선일씨에 대해서 아주 큰 우리나라 위인이라도 죽은듯이 슬퍼하고.. 너무 오바한다며..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어떻게 말했었는지 기억들 하나?? 그리고 김선일 부모..어처구니 없는 집안이구만.. 어떻게 자기 친자식 아니라고..죽은지 지금 몇일이나 됐다고.. 벌써..돈을 50억을 내놓으라..국립묘지라.. 조의금으로 지금..그 집안 사람들 몇억씩 들어왔던데.. 서해교전때 죽은 군인들이 얼마 받았는지 기억하고 있나..? 겨우 3천이다..알고나 있나..??그런데 뭐..50억?? 그때..이렇게 온 국민들이 난리 치면서..위로 해줬나..? 당시..조문객중에..시민분들이 몇명이나 오셨었는지..알고있나??? 나라를 위해서..당신들..누군지도 모르는 당신들 지키려다가.. 나라를 지키려다가..죽었어..찾아와서 미안해 하며.. 눈물까지도 바란적 없지만..그래도..적어도..위로의 한마디씩 해주고 가길 바랬다..그런데..월드컵으로..아주 신나들 있더군.. 진정으로 진정으로..위로 받을만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줄 알았고..지금도 욕심이라고 생각안한다.. 가끔..찾아와서..정말 자신의 가족을 잃은듯..위로해주던 분들도 있었지만.. 당신들..하는거 보면서..왠지 점점 그 사람에 대해서 참 우스운..질투란 감정이 들더군.. 사람들이 더 많이 더욱더 슬퍼하고 위로할수록 나는 점점 당신들이 싫어졌고..그사람이 싫어졌어.. 얼마나..서럽고..얼마나 비참했는지.. 겨우..3천이었다..겨우..3천..우리형이 그 젊은나이 22살때..나라를 위해..당신들을 위해서..그 젊은나이에.. 멋지게 살아보지도 못하고..겨우 3천이란 돈과.. 나라에서 주는 훈장이란..쪼가리랑 우리형을 바꿨어.. xX..지X들 하지마..그따위..3천..그게..그게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한 댓가냐.. 당신들..월드컵으로 신나서 있을때..우리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가장큰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억이나 할까..그런 사람이 있었다는걸..황도현 중사.. 당신들 이름이나 알고있어??기억이나 해?? 월드컵..그 즐겁고 뜨거운 열기속에..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정말..멋지게 살길 원했던 젊은 청년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던걸.. 이번에 궤축할때..묵념하고..검은..리본..가슴에 달고..하더라.. XX..월드컵땐..묵념도 하면 안되냐..조금만 신경 써줬어도.. 당신들에게 헛되지 않은..정말 자랑스러운 죽음이 되었을꺼야.. 아..우리나라..정말 뭣같다.. 정말 유치하네 --------------------------------------------------------------- 그리고 이건 우리 나라 교회들이 왜 욕을 먹는지 말해주는 증거 자료 http://home.megapass.co.kr/~jkj8301/Gaerists1.jpg 위 그림에 나오는 교회의 목사는 김선일씨 유가족 대변인을 하고 있고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선임된 변호사는 이 교회 신자입니다 더불어 가나 무역과도 관계가 있는 교회이구요 이미 교회측에선 피납 사실을 오래 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김선일씨 가족에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뭐 사실 가족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관계지만... 아버님 칠순 잔치에 맞춰 한국에 들어온다는 전화통화를 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밝혀졌습니다 그 전화 통화를 했다고 주장하는 시점에 이미 김선일씨는 피납된 상태였습니다) 막상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가 김선일씨를 죽였다고 그 난리를 치고... 정부에 보상금을 내 놔라 국립묘지에 안장 해 달라 추모기념교회를 세워 달라는 생떼를 쓰고 있으니 (보상금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김선일씨와 교류도 거의 없었고 가족중에 개신교 신자가 아무도 없는 김선일씨 유가족이 추모기념교회를 건설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죠 아마도 뒤에서 유가족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거겠죠 그리고 보상금 50억설은 낭설이라고 하지만 보상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액수가 몇억 정도가 아닐거란 것도 사실이겠죠) 이 스리랑카씨푸드 같은 교회분들 그렇게 살다간 언젠가 하나님의 날이 열리는 날 당신들에게만 하나님의 손은 내밀어지지 않을겁니다
04/06/29 23:19
정말 비교가 됩니다......
월드컵 탓도 있지만 이 분들의 전사는 각종 운동(?)하시는 분들에게는 물론이고 국가에게서도 외면당한 듯 하여 정말 안타깝습니다.
04/06/30 00:20
저도 서해교전에 대한글을 아침(29일)에야 읽게 되었었습니다...
정말 머라 할말을 잃었습니다... 놓치지않으려해도 소홀했던 제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4/06/30 04:15
그렇습니다,..
냄비근성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준 어제 하루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나라를 지킨것이 무슨 죄이길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정말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 그들이 느꼈던 아픔... 그들의 가족들이 느꼈던 아픔들... 알수는 없으나 잊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부디... 내년에는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었음 좋겠습니다..
04/06/30 06:37
전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여중생 사고와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또 혼자 화가 나고 있습니다)
소위 진보주위자들은 서해교전에 대한 생각 보다는 여중생 사고에 대해서 격렬히 흥분하고, 여전히 미군 철수 주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고, 대북친화주의에 또한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다 맞는말이지만, 서해교전의 피해자들에 위해서 북한에게 확실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건 왜 주장하지 않을까요... 저도 당시에 해군에 복무 했습니다. 그날의 그들도 지금 우리 처럼 열심히 일하고, 밤에 월드컵을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형과 친구들 이였습니다. 촛불시위에 참석한 사람들도 이제는 제발 이 사실도 알면 좋겠습니다.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해교전 있고난후, 아시안 게임에서 동반입장하는 북한과 남한을요... 어느 사설가의 말처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잊어버리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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