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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배 스타리그 16강 3주차. C조 3경기는 메카닉 테란의 제왕 최도건 선수와 매지컬 저그 나상호 선수가
네오 버티고2에서 맞섭니다. 엄위원님, 경기 예상을 말씀해 주시죠."
"네, 역시 오늘 경기의 초점은 최도건 선수가 고질적인 대 저그전 약세를 극복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탈락하느
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도건 선수의 경우 남은 한 경기가 본인이 자신있어 하는 프로토스전이기 때
문에 오늘 경기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면 8강 진출의 전망이 밝다고 할 수 있구요.
그리고 현재 최도건 선수는 온게임넷에서 저그전 9연패 중으로 특정종족 연패 타이기록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거든요. 아마 최도건 선수도 이와 같은 불명예스런 기록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도건 선수가 오늘 경기를 패배할 경우 특정종족 상대 연패 신기록을 세우는게 되는군요!
김위원님,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맵이 네오 버티고2이니만큼 기본적인 경기양상은 중앙 힘싸움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의 넓은 공간을 누가 장악하느냐, 저그가 테란의 두번째 멀티를 어떻게 저지하느냐가 경기의 관건으로
되는 것이 이 맵에서 일반적인 저그대 테란전의 경향이거든요.
하지만 최도건 선수가 대저그전에 자신이 없어하는 편이라 본진 주변의 도넛 모양의 언덕 등을 이용한
전략적인 승부를 볼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 최도건이 대저그전 9연패의 사슬을 끊느냐, 나상호의 마법이 최도건을 다시 한 번 절망으로 밀어넣느냐?
경기 보시겠습니다."
도건은 묘하게 침착한 기분이었다. 항상 저그전을 앞두고는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지나치게 불안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어쩐지 차분한 느낌이다. 연습에서 특별히 승률이 좋았다거나, 맵이 테란맵인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도건은 일꾼을 가르고 SCV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연습을 했지만 사실 지금까지도 도건은 어떤
빌드를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정상적이 투배럭, 원 배럭 더블 커맨드, 기습적인 두팩벌쳐,
심지어 투스타 레이쓰까지 연습에서 사용해봤지만 대부분 패배로 이어졌다. 정상적인 바이오닉은 늘 그랬듯
체질에 맞지 않았고, 기습적인 전략들은 이제 최도건을 상대하는 저그들에게는 기본적인 체크 포인트가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최도건 선수 두 시 붉은색 테란, 나상호 선수 여덟시 초록색 저그입니다. 대각선이 나왔네요."
전상민 캐스터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차분한 어조로 중계를 이어간다. 엄창준 해설이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 저그와 테란의 경기에서 이렇게 대각선이 나왔다고 하면 저그에게 조금은 좋다고 보는건 이제
상식입니다만...최도건 선수가 잘 쓰는 데로 기습적인 메카닉 등의 전술을 준비해왔다고 한다면 오히려
대각선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 왜 예전에 KT배 리그였던가요? 조정섭 선수가 이 맵에서 국준우 선수
와 경기하면서 대각선 방향에서 기습적인 두스타 레이쓰로 쓰리 해처리로 가던 국선수에게 초반 승기를 잡
은 끝에 경기를 잡아낸 적이 있었거든요. 대각선에서는 써치를 간 드론이 상대 본진에 못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승부가 잘 먹힐 수가 있습니다."
"네, 나상호 선수 두 번째 해처리를 도넛 모양의 언덕 위 입구쪽에 짓고 있습니다."
"쓰리 해처리네요. 나상호 선수 무난하게 입구쪽 해처리를 건설하며 멀티까지 먹고 중앙 싸움을 하겠다는
의도에요."
"어? 근데 지금 최도건 선수, 센터쪽에 짓는게 배럭인가요? 센터쪽을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아~ 배럭 맞네요. 최도건 선수 센터 배럭입니다..."
"근데 좀 의아하네요? 지금 타이밍이면 본진에 서플라이를 짓고 배럭을 센터에 짓는 건가요?
아~ 본진에 지은 것도 배럭이군요. 그럼 9, 9배럭을 첫번째는 본진에, 그리고 두번째를 센터에 지은
거네요!"
"최도건 선수, 준비해온 카드가 있었어요. 최도건 선수도 더 이상 저그전 약하다는 소리 듣기 싫거든요!
더구나 연패기록은 더욱 갖고싶지 않을 거에요!"
"아...그런데 지금 정찰용 드론이 최도건 선수의 진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거 들어가서 보면 뭔가
이상한걸 느낄 수 있거든요?"
도건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9, 9배럭을 할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서플을 건너뛴채 배럭을 건설하게 되었고 정찰을 내보낼 SCV로 센터 배럭까지 짓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는 전략을 사용하면서도 마치 수십번 연습해본 것처럼 빌드가 맞아 떨어지고
자신감까지 생긴다는 것이다.
'지금쯤 상대의 정찰드론이 올 지도 몰라.'
평소같으면 생각지 못할 상대의 일꾼정찰 타이밍이 느껴졌고, 도건은 SCV 한 기를 입구로 보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SCV는 입구에서 상대의 드론과 마주쳤고 상대의 정찰을 저지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도건은 첫번째 배럭에서 두 번째 마린이 생산되길 기다렸다가 세 번째 마린을 찍은 후에야 마린
한기를 입구로 보내 그 때까지 입구에서 농성하고 있던 드론을 제거한다.
"최도건 선수 진짜 연습 많이 했나 봅니다. 상대의 드론이 정찰오는 타이밍과 마린이 상대 일꾼을 제거
하러 나가도 상대가 9, 9배럭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타이밍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도건은 센터에서 배럭을 건설한 SCV를 상대의 입구 언덕으로 보내 벙커 건설을 지시하고 본진에서 SCV
5기와 마린3기, 그리고 센터에서 생산한 마린 두 기를 보태서 상대 진영으로 어택을 찍었다.
"최도건 선수 나상호 선수의 입구 해처리 옆에 벙커를 건설하며 SCV와 마린을 상대 진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타이밍 진짜 좋은데요?"
"나상호 선수 드론 몽땅 나와야 되요. 벙커 건설되면 그냥 경기 끝날 수 있습니다!"
벙커가 절반쯤 건설되었을 때 상호의 드론이 튀어 나왔고, 비슷한 타이밍에 센터에서 출발한 마린 두 기가
상호의 입구에 도착했다. 도건은 SCV의 벙커건설을 일단 중단하고 SCV를 돌리며 마린으로 무브 -> 드론일
점사 --> 무브를 반복하며 드론이 벙커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다. 상호는 드론으로 벙커를 공격
하다가 다시 마린을 공격하려 했으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기막히게 드론일점사와 무브를 반복
하는 도건의 컨트롤에 드론만 잃을 뿐이다.
"최도건 선수 마치 마린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입니다. 기가막힌 컨트롤~~ 누가 이 선수가 바이오닉
컨트롤이 약하다고 했나요?"
상호의 저글링이 생산되어 입구에 도착한 즈음에는 이미 도건의 본진에서 출발한 병력까지 도착해 있었고
랠리를 찍어 놓은 배럭에서 생산된 머린들은 계속해서 상호의 입구로 달려오고 있었다. 상호의 본진에서
출발한 SCV들은 미끄러지듯 입구로 파고들어 저글링과 마린 사이를 가로막았고, 저글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벙커는 완성되고 만다.
"아~~ 벙커완성! 최도건 선수의 마린들이 벙커로 들어가고 드론과 저글링이 죽어 나갑니다. 크립콜로니마저
SCV와 마린에 의해 파괴됩니다."
"이건 막아도 막은게 아니죠. 드론 피해가 너무 커요."
"막지도 못할거 같죠? 아~ 이 경기는 최도건 선수가 가져가네요. 이 경기 역전되면 거의 기적이죠."
"GG~~~!!! 나상호 선수 GG를 선언합니다. SKT배 스타리그 16강 C조 3경기. 최도건 선수가 지긋지긋한 저그전
연패의 사슬을 끊고, 1승을 가져갑니다."
'이겼다!'
도건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그를 이겼다. 그것도 스타리그에서. 이제 플토만 잡으명 8강이다.
도건은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잡자기 왜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인 초반 벙커링을 시도했는지
평소 잘 안되면 마린, SCV 컨트롤이 오늘을 또 왜그리 기막히게 된 건지 도건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겼다.
"우와~~ 형! 언제 벙커링을 그렇게 연습한거야?"
조금은 얼떨떨한, 하지만 대체로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챙기고 있는 도건에게
같은 팀의 저그유저 영준이 달려와 말을 걸어왔다.
"진짜 최고던데? 그 타이밍하며, 컨트롤까지."
"정찰드론 저지하고 타이밍 좋게 마린 보내서 잡은게 압권이었어. 나라도 9, 9배럭인지 모르겠더라고."
같은 팀의 또 다른 저그유저 효명이 한 마디 거든다. 어느새 도건은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있었다.
늘 잔소리만 해대던 주감독도 오늘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운채 축하의 말을 건넨다.
"형, 언제 연습한거야? 진짜 타이밍 죽이던데? 나랑 연습할 때는 그 빌드 쓴적 없자나?"
영준이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묻는다. 하긴 도건과 가장 많은 연습경기를 한게 영준이니 궁금할만도 하다.
"짜샤~ 원래 필살기라는게 함부로 보여주는게 아냐~"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한 번도 연습해본 적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도건은 영준의 호기심에 그렇게
답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게임. 그 메피스토라는 녀석의 게임과 비슷했어...'
문득 찜찜했던 꿈을 떠올리던 영준은 피식 웃었다. 그건 꿈이었고, 오늘의 승리는 현실이다. 괜히 찜찜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악마 따위가 있을리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맥주라도 한 잔 마시자. 팀리그 연습해야 하니까 많이는 안되겠지만..."
아까 편의점에 들어가서 주감독이 사온게 캔맥주인 모양이다. 평소 선수들의 몸관리에 철저한 주감독이
나서서 맥주를 사온걸 보면, 도건이 늘 패하던 저그전을 승리한게 꽤나 기분 좋았다보다. 게이머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형처럼 따라온 감독을 오랜만에 기쁘게 했다는 것이 도건에게는 승리 자체보다도 더 기분좋았다.
'이제 다다음주에 플토만 잡으면 만사 OK로구나... 맵도 남자이야기2니까 이제 8강이 진짜 눈앞에 보이는걸.'
도건의 행복한 상념을 중단시킨건 주감독의 전화벨소리였다.
"어? 규동이 형이 웬일이지? 도건이 이긴거 축하해주려고 전화했나?"
주감독은 중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오늘 도건과 경기한 상호의 소속팀인 KO팀의 송규동 감독의 전화인가보다.
송감독이야 오늘 나상호의 패배로 속이 쓰리겠지만, 워낙 매너가 좋고 주감독과 친분이 두터운지라 축하전화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
"어이~ 규동이 형 웬일이우?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싶어서 전화하셨나?
네? 뭐라구요? 그게 정말이야? 지금 어디에요?"
갑자기 다급해진, 그리고 꽤나 놀란듯한 주감독의 목소리에 차안에 있던 팀원들의 눈길이 모두 모아졌다.
"네....알았어요, 형. 애들 데려다놓고 내 바로 갈께... 괜찮을거야 형, 그렇게 처져있지 마요. 네."
전화를 끊은 주감독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상호가 사고를 당했데. 아까 경기 마치고 메가스테이션에서 나가다가 트럭에 치었다는군. 중태인가봐.
너희들은 얼른 숙소로 들어가 있어라. 난 병원에 좀 가봐야겠다..."
놀랄만한 소식에 팀원들 모두가 침묵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게임하던 동료 게이머가 갑자기
중태라니... 특히 도건의 기분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맺은 메피스토와의 계약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터인지라 더욱 그러했다.
'뭐야...그런게 상호가 당한 사고와 관계가 있을 턱이 없잖아.'
도건은 자신이 미신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계속 찜찜한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이상한 생각 할 필요없어. 상호의 일은 안됐지만, 일단 나는 게이머로서 2주 후에 있을 게임에 집중해야 해.
어떻게 잡은 2라운드 진출 기회인데. 그래도 상호의 병실에 한 번은 가봐야겠지만...자꾸만 엉뚱한 상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될 것이 없어...'
아무 근거없이 상호의 사고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억누르면 도건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사고가 있고 7일째가 되던 날, 계속해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상호는 결국 숨이 끊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SKT배 스타리그에 참가중이던 모든 선수들이 장례에 참석했고,
프로게이머 협회에서는 앞으로 49일간 모든 공식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추모의 리본을 달 것을 권유
했다.
상호가 죽고 다시 7일 후, 도건은 spirit팀의 프로토스 손병훈과의 16강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원팩 더블을 예상하고 빠르게 테크를 올린 손병훈에게 투팩에서 나오는 벌쳐,
탱크를 활용 초반부터 강력한 조이기를 전개한 끝에 17분 만에 GG를 받아내고 역시 메카닉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으며 가볍게 승리했다. 그러나 8강 대진은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도건은 저그유저인 장학철,
변태준과 같은 조가 되었다. 프로토스 유저인 전동춘까지 1테란 1토스 2저그의 종족분포였다.
대부분의 스타 팬들과 전문가들은 도건의 탈락을 예상했다. 비록 16강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벙커링
으로 승리를 거머쥐고 8강에 올랐지만 그의 저그전 약세를 상쇄하기엔 한 게임의 영향은 미미했고, 그
경기역시 상대가 벙커링을 예측하지 못하고 12드론 2번째 해처리를 가져갔기에 손쉽게 잡아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형, 오늘도 벙커링 쓸거야?"
장학철과의 8강 첫경기를 위해 메가 스테이션으로 가는 길에 영준이 도건에게 물었다.
"글쎄...상대가 예상하고 있을텐데..."
"응, 내 생각에두 안 쓰는게 나을 것같아. 연습때 승률도 안좋았잖아?"
사실이었다. 도건은 연습중에도 몇 차례 벙커링을 시도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상호와의 경기때 같은 감각이
나오지 않았다. 팀 동료들은 그 때는 상대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도건은 분명 그것만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 때에는 도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함이 있는 벙커링을 할 수가 있었
는데, 그 때 이후로 그런 느낌이 통 나지를 않는다.
'이제 그 때의 그 느낌을 기억할 사람을 나뿐이로군. 상호가 살아있었다면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었을까?'
게이머는 유닛으로 대화한다. 도건은 종종 게임중에 그런 느낌을 받곤했다. 꼭 도건만이 아니라도 치열한
게임을 해나가다보면 게임의 상대와 무언가 교감이 느껴기는 일은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를테면 테란의 한 방을 막지못한 저그가 마지막 병력으로 어택을 찍을 때 테란인 그도 가끔은 상대의
지고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종종 역전도 나오곤 한다.
'그날, 내 벙커링에서 내가 느꼈던 뭔지 알 수 없는 소름끼칠 정도의 강력함을, 상호는 느꼈을 지도 몰라.
이젠 대답해줄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상호의 죽음이 안타까와지는 도건이었다.
"스타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SKT배 스타리그 8강 1주차, 오늘의 첫 경기는 메카닉의 제왕 최도건 선수와
악마저그 장학철 선수의 백두대간에서의 일전입니다."
언제나처럼 우렁찬 전상민 캐스터의 말을 엄창준 해설이 받는다.
"네, 우선 맵을 보시면 테란대 저그는 16대 12로 저그가 다소 앞서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앞마당
가스의 존재가 저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부분이구요, 하지만 곧곧에 언덕이 있다는 점이 테란에게도
할만한 여지를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두 선수의 상대종족 승률을 보면...."
해설이 이어지는 동안 도건은 이미 게임에 조인하여 학철과 채팅을 하고 있었다.
[clissic]..Faus : GG
Kiss_Moomyung : GG/GL
Kiss_Moomyung : bunkering mu su war
Kiss_Moomyung : don't do it to me^^
늘 익살맞은 학철인지라 엄살도 심하다. 학철은 벙커링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쩌면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워낙 초반 저글링 활용이 좋아 벙커링 같은 초반전략이 잘 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게이머가 바로
학철이기 때문이다.
[clissic]..Faus : if u don make zergling~~
Kiss_Moomyung : OK. me no zergling, u no bunker
실없는 소리들. 가끔 해설자들은 선수들의 이런 대화를 심리전이라고도 말하지만, 사실 막상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그런 의도가 없다. 다들 비슷한 또래고 친하고 하다보니 이런 식으로 엄살도 부리고 농담도
하는 것일 뿐.
잠시 후 FD가 경기시작을 알려온다.
5, 4, 3, 2, 1...너무나 익숙한 경기시작 사운드와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도건의 위치는 5시. 일반적
으로 게이머들이 가장 싫어하는 위치다. 도건은 이를 악물었다. 위치도 좋지않다. 상대는 저그, 그것도
대테란전 경기운영이 탄탄하기로 이름높은 장학철이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벙커링...벙커링밖에 없다.'
분명 경기시작 전까지 벙커링은 생각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장학철은 앞마당보다 스포닝을 먼저 짓는 운영
을 많이 하는 편이라 더더욱 벙커링은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건은 경기가 시작되자
벙커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확신에 가깝게.
"지금 최도건 선수 8배럭을 하고 있는건가요? 최도건 선수 본진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아...8배럭 맞네요. 최도건 선수 지난번 경기에 이어 또 한번 초반 승부를 보겠다는 거죠."
"그렇지만 장학철 선수는 스포닝을 먼저 올리고 앞마당을 가져가는 타입의 경기운영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오히려 8배럭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선택일 수도 있어요. 아...장학철 선수 이미 스포닝 올라가기 시작했죠.
최도건 선수 8배럭은 좋지 않은 선택이에요."
김성원 해설이 특유의 조금은 냉소적인 느낌의 말투로 현재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했고, 엄창준 해설이
말을 받는다.
"네, 네. 저그유저들이 벙커링을 무서워하는건 저글링이 아직 나오기 전이나 저글링이 막 나오는 찰라에
벙커가 완성되는 거거든요? 근데 지금 경우는 벙커를 건설하기 시작할 때 쯤이면 이미 저글링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차라리 마린을 모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아카데미를 올려서 마린-메딕-파벳 조합이
갖춰지는 한 타이밍을 노리는게 낫죠. 어차피 저그도 앞마당을 먼저 가져간게 아니기 때문에 테란이
8배럭으로 출발한게 아주 치명적이지는 않거든요."
"아...말씀드리는 순간 이미 최도건 선수의 병력들이 출발합니다. 4마린 8SCV!! 꽤 강력한데요?"
도건은 정찰 SCV로 상대가 2시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본진에서 생산된 마린과 SCV를 대규모 동원하여 러시
를 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곧 저글링이 나온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찰 SCV는 상대 진영을 돌아다닐
뿐 아직 벙커를 짓지는 않고 있다.
도건의 병력이 도착했을 때 학철은 6기의 저글링과 4개의 드론을 앞마당으로 보내는 찰나였다. 일꾼과 일꾼이
맞추닥치고 마린의 가우스건이 불을 뿜었다. 그러나 6기의 저글링이 어느틈에 뒤로 돌아와 마린을 공격한다.
"저글링이 마린을 감싸고 있습니다. 마린 1기 잡히구요, 다시 두 기째 잡힙니다!"
"최도건 선수 드론을 일점사해 주느라 마린을 제때 빼지 못했어요~ 아.. 이건 절망적이네요!"
김성원 해설의 말대로 분명 테란에게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컨트롤이 나온다. 도건의 SCV 5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1기 남은 마린을 감싸고, 마린에 강제 어택을
찍어둔 저글링이 무력하게 죽어가게 된다.
"아~ SCV!! SCV 다섯 기가 엄청난 멧집을 보여주며 상황을 역전시킵니다. 근데 왜 SCV가 다섯 기밖에 안남았죠?"
모두 의문에 빠지는 순간, 옵저버가 학철의 진영을 비춘다. 3기의 SCV가 학철의 진영에 들어가 한 기는
미네랄 필드 뒤쪽의 공간에 벙커를 건설하고 있었고, 두 기는 이를 저지하려는 학철의 저글링을 저지하고
있었다.
"아! 왜 추가 저글링이 안나오나 했더니 본진 안에서 또 한 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군요."
"네, 네. 아까 두 기의 마린이 무력하게 잡힌건 이걸 컨트롤 해주느라 그런 거에요!!"
무려 네 기의 저글링이 본진 내부 벙커 건설을 저지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건의 SCV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저글링 어택 -> 무브 -> 벙커 건설중인 SCV 수리 -> 맞고 있는 SCV 수리 -> 벙커 건설 SCV
교체의 동작을 반복하며 4기의 저글링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컨트롤~~~~~ 컨트롤~~~~~~ 엄청난 컨트롤입니다. 3기의 SCV가 4기의 저글링과 다수 드론을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
"와하하하하하하...진짜...진짜 엄청나네요. 진짜...."
도건의 본진에서 추가된 마린들이 앞마당에 있던 5기의 SCV와 합류해서 학철의 진영으로 올라왔다. 미네랄
필드 뒤편에는 벙커가 완성되었고 마린이 채워졌다. 학철은 드론을 모두 앞마당으로 이동시킨다.
"아...장학철 선수 피해가 큰데요...드론 모두 앞마당으로 대피합니다. 어? 아! 앞마당에도 벙커가 건설되어
있네요? 저건 또 언제 만들었죠?"
"최도건 선수 진짜 벙커링 제대로 준비해 왔네요. 이제 드론이 갈 데가 없죠! 악마의 벙커링이에요, 악마의
벙커링!"
Kiss_Moomyung : T.T
Kiss_Moomyung : bunker monster
[clissic]..Faus : -_-;;;
Kiss_Moomyung : GG
[clissic]..Faus : GG
"아, 장학철 선수 GG를 선언합니다~~~!! 최도건 선수 믿어지지 않는 강력한 벙커링으로 2연승을 거둡니다."
"벙커괴물이네요, 벙커괴물! 오늘 진짜 악마스러운 벙커링을 봤습니다!"
도건은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10분도 채 안되는 게임이었지만 마치 1시간이 넘는 장기전을 했을 때만큼 피곤한 느낌
이었다.
눈을 뜨자 어느새 달려나온 동료들이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2연승! 저그전 2연승이다. 언제 저그전을
공식전 2연승한 적이 있었던가? 없기야 했을까만은 좀체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건은 일어나 마우스와
키보드를 정리하고 있는 학철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나오다가 다시 한번 반대편으로
나가고 있는 학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
도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만 드는 엉뚱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밖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한 것은 어느새 11시가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금요일이라 꽤 늦은 시간에도
차가 밀린 탓이다. 주감독은 오늘 스타리그 직후 감독들간의 회의가 있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도건과
팀동료들은 주로 오늘 게임을 주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주장인 운제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감독님 왜 안오세요? 네?"
소리가 잘 안들리는 것일까...? 운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도건은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알 수 없이 불길한 느낌. 요즘들어 지우려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불길한 느낌이 갑작스레 살아난다.
"예....예, 알겠습니다..."
도건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고, 모두의 시선이 도건에게로 집중되었다.
"형, 무슨 일이야?"
"감독님 오늘 늦으신다고...먼저들 자라고 하시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운제는 영준의 그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운제의 하얀 얼굴이 어쩐지 더욱
창백해 보인다. 운제는 천천히 도건을 바라본다. 그리고 짧은 침묵.
도건은 미칠 지경이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부터 느껴졌던 불안감이 이젠 절정으로 치달아 더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제의 시선은 수심에 차 있었고, 도건에겐 그 수심이 마치 자신에 대한 비난
처럼 느껴질 즈음에 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학철이가.... 죽었데. 숙소 앞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공사판의 벽돌이 무너진데 깔려서..."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