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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5/31 21:59:32 |
Name |
Bar Sur |
Subject |
[글] 토막 (5) |
- 선물
전날 조금 무리를 해서 4시간 밖에 자지 못했지만,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7시 정각에 일어나서 씻고, 먹고,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정확히 34분간 버스를 타고 학교를 도착해서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강의실에서 20여분간을 꾸벅꾸벅 졸고나서 첫번째 강의를 들었다.
아무런 위화감도 없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정도의 불운도 없었고, 예정된 강의가 휴강되는 행운은 당연히 없었다. 이후 다시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그러다 구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끝내고 오늘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D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촉각이 피부를 거슬러 올라와 귓가에서 청각으로 화한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문득 발끝으로 서걱서걱한 느낌이 나서 근처의 벤치에 앉은 뒤에 구두를 벗고 양말에 뭔가가 붙어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기묘하게도 양말에 짧은 털들과 보풀 같은 먼지들이 잔뜩 묻어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털과 뭉친 먼지는 물에 젖은 듯 습기가 남아있었고 양말에 있는 것을 다 뜯어낸 뒤에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강의실까지 일단 다시 걸어가보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소리도 감촉도 은근히 불쾌했다.
결국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나서, 다시 한 번 구두를 벗고 이번엔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시야의 끝트머리에 살짝 걸려있는 구두 끝 부분이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분명 희끗희끗 보이는 검은 색이 <그을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결국 손을 구두 안으로 집어 넣었고 구두 끝에 뭔가가 뭉쳐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긁어내어 꺼내보니 이번엔 아까보다 대량의 털과 먼지들이 덩어리처럼 엉겨붙어 떨어져 나왔다.
놀라운 일이지만 내가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비집고 들어가서 긁어낸 그 이물질은 상당한 양이었다. 둥글게 뭉치면 커다란 구슬 하나와 비견될 만한 크기다. 분명 이런 것이 처음 구두를 신을 때부터 있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는 것이다.
강의 시간이 가까워졌고 그런 것에 신경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한데 뭉친 그것들을 강의실 한쪽의 휴지통에 버리고 화장실로 바삐 달려가 손을 씼었다. 정신이 산란했지만 강의를 끝까지 듣고 하릴없이 집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구두 속 먼지와 보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언제와 평소처럼 움직인 것 뿐인데.
달리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구두 속 머리카락 같은 털들과 축축한 먼지가 늘어난 것 뿐이다.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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