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
2004/05/27 17:35:07 |
Name |
Bar Sur |
Subject |
[글] 토막 (1) |
ㅡ 첫 토막
11살의 나는 그 날 오후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몹시 피곤해보였지만 반드시 깨워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였만큼 많은 것들을 몰랐던 그 시절의 나는 다음 순간 배게로 얼굴 옆면을 후려맞아 그대로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버지에게 맞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 맞는 것보다 아프지만, 당시의 나는 그 이상으로 다급했다.
"왜 깨우는 거야?"
평소의 인자한 아버지가 화를 삭히고 나서 나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요?"
내가 묻자마자 아버지는 벌써부터 귀찮아 죽겠다는 듯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 태세다.
"엄마한테 물어보거라. 나가 봐."
"엄마는 어제부터 캥거루가 되어버렸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렇다. 어머니는 어제 밤 캥거루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두번 다시 원래의 어머니로 돌아올 수 없다. 한 번 캥거루로 변해버린 사람은 남편도 자식도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주머니 속에는 테디베어를 집어 넣고 방 안을 콩콩 뛰어다닐 뿐이다. 아버지도 그런 것 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대답에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누운 채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너도 캥거루가 되면 되잖아?"
"전 캥거루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난 캥거루가 되고 싶지 않다. 캥거루가 되고 싶어서 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결국 아버지는 후우...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 난 모르겠다.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인데?"
"30월 04일이요."
"뭐야? 진작 말해었어야지.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이리저리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싶더니 방을 나서려고 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어딜가긴. 양들을 잡으러 가야지. 캥거루도 잡고."
'검은 늑대'이자 아버지는 그 번들거리는 어금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역시 캥거루가 안 되길 잘했어."
내가 중얼거리는 사이 '검은 늑대'는 이미 방을 떠나고 없었다.
나는 아버지였던 그가 잠들었던 그 이불 위로 가서 큰 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잠을 자고 꿈을 꾸었다. '노골적으로' 엉터리 같은 꿈이었다. 아참, '노골적으로'는 아버지였던 그의 말버릇이었다. 모든 험한 말도 그 앞에서는 희극처럼 정제되어 의미를 잃어버린다. '노골적으로' 우스운 일이다.
늦은 밤에 나는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다만 거실 한 가운데에는 '검은 재'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검은 늑대'이면서 아버지였던 존재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검은 재'가 되었다.
현관에는 아버지의 신발은 있지만 어머니의 신발은 없다. 내 신발은 한짝만 있다고 나머지 한짝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캥거루가 된 어머니는 이미 집을 떠나버린 것 같았다. 잘 됐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캥거루 무리를 찾아가든지, 아니면 동물원에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가끔은 편지를 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텐데, 어머니가 우리 집 주소를 잊어버렸다면 큰일이다. 어머니는 가끔 건망증이 있어서 집 주소를 곧잘 잊어버리시곤 한다.
조용하고, 어딘가 온기가 감도는 하루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자연과 인간' 수업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고있다. 가끔씩 눈에 힘을 주고는 있지만 1.3초 이내로 힘이 풀리고 고개가 내려간다. 교수님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인자하신 교수님. 쿨쿨.
꿈속에서 교수님은 내게 문학가들의 표현이란 겉만 보고 실체를 꿰뚫지 못하는, 이를테면 조루증이 있는 종마 같은 존재들이라고 힘껏 비꼬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아세요?"
내가 물었다. 쿨쿨.
"네 아버지께 물어보거라."
교수님이 대답했다. 쿨쿨.
아버지는 검은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고 전 캥거루가 되어버린 어머니를 찾고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쿨쿨.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