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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5/22 05:35:36 |
Name |
Bar Sur |
Subject |
[편지] PgR21의 누군가에게(13) |
흠뻑 비에 젖어 돌아온 며칠 전부터 미열에 감기기운으로 실수연발하며 주변에 폐만 끼치는 나날들입니다. 주변을 향해 "죄송합니다."를 크게 소리치고 싶을 정도이지만, 그건 새로운 폐가 되겠죠. 술에 취했을 때와 아플 때는 나 자신이 술에 취했다, 지금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고 속편하게 자숙하는 게 주변에도 내게도 좋은 방식이라는 걸 다시금 느낍니다.
오늘은 김범수 씨의 새 앨범을 듣기도 하고 양방언 씨의 분위기에 젖어 들어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결국 쳇 베이커를 듣고 있습니다. 그가 부르는 Look for the Silver Lining의 매력에 중독되린 사람은 밤 늦게 이 노래를 듣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스스로가 음악에의 평가에 인색하다고 느끼면서도 좋은 음악에 이토록 도취되는 건 분명 그것 자체로 하나의 진실일지 모릅니다.
자, 이번 편지는 화끈하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인용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열다섯 살의 생일은 가출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시기처럼 생각되었다. 그보다 이르면 너무 빠르고, 그보다 늦으면 대부분의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해변의 카프카 中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문장을 읽고나서 한동안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그 문장 속에서 소설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가출을 해야만 하는 당위'를 제거하고나면, 나는 이 문장 자체의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은 물론 나 개인적인 관점에 의한 것이며, 소설 전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어디에선가 15살의 누군가는 가출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한, 현실이며 진실입니다. 하지만 15살이 가출에 안성맞춤인 시기인가 하면 대체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15살의 누군가는 자신이 가출을 해야만 하는 당위에까지 의식이 도달하기 힘든 나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상황ㅡ그를 가출로 몰아가는ㅡ은 일면 격정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치열하지 않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둠이 찾아왔다고 생각할 뿐, 언제나 빛과 어둠이 함께 물들어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맹점에서 요령없이 몸을 크게 비틀어보는 정도가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에게 들어와서 고스란히 그에게서 나가는 감정의 뭉뚱거림은 확실히 큰 흐름 속에서 묵직하게 그의 지면을 흔들어 놓을 테지만 "나를 지탱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해 버리는 건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 15세 소년이 가출의 당위를 확보해나가는 과정보다도 좀 더 우리 현실에 맞닿아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5살의 소년이 가출을 하고나서 현실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딜레마가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심지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거나 잠들 곳을 구하지 못해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건 당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에게 폐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미숙함을 댓가로 불확실한 교환을 요구하려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연하기까지한 미숙함이야 말로 외부를 향한 언행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함과 동시에 경계하기 힘든 부분임을 깨닫기란 힘든 일일 겁니다.
결국 가출이라는 건 자립적인 선택을 통해 그 선택지 자체를 넓히려는 행동이지만, 사실상 길 걷는 방향 어느 쪽으로도 자립적이지 못한 가출이란 그 선택의 기회까지 박탈하고 마는 겁니다.
가출을 해버리고 나서 "뭐, 돌아갈 집이 있는 걸."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빨리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러한 선택지를 남겨놓은 채로 자립적이지도 못하고 어느 샌가 미숙함마저 마모되어 버리면, 이제는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은 그다지 비극이 아닙니다. 비극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것에 세계의 또 하나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가정"이란 한 폭의 좋은 그림이지만 "15세의 가출소년'보다는 요원한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랄 정도로 '많은 누군가'가 그런 개념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조차 선악과 미추를 가릴 수 있는 그들 선택지의 다양화에 감탄을 할 정도입니다.
"가출청소년"이라는 말은 어느 샌가 뉴스나 신문에나 아주 가끔 등장하는 사어처럼 되어버렸지만 문득 그런 말이 언급될 때마다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불쑥 화를 치솟해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투에 드러나는 안타까움과는 무관하게 어디까지나 그것이 '남의 일'이라는 경계구분이 그들에게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5세의 누군가'는 '해변의 카푸카'나 '행복한 우리 집'보다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당신과 친밀한 개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출을 생각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어쩌다 '가출'이라고 하는 단어가 머리 속을 멤돌았던 경험이 있었지만 사실상 그 단어의 이미지는 그 시절 이성의 나신에 대한 환상만큼이나 지금도 유아기의 그대로 굳어져 성장하지 않습니다. 나와 '가출' 사이에는 모세조차 가를 수 없는 혼돈의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가볍게 그것을 넘어 일종의 현실을 긍정합니다. '15세의 가출'은 또한 어떤 의미로 누구나가 좋아하는 귀엽고 커다란 마스코트와도 같으며, 누구나의 근처에 있고 전방향에 걸쳐 개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가출을 생각하고 있는 15세의 누군가'라면 나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름의 진실을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긍정할 수 있을지언정, 당신에게 어떤 선택지를 내밀지는 못할 듯 합니다. 뭐랄까요, 일단 길게 호흡을 가져보십시오. 몇 초 정도나 들숨과 날숨이 차이를 두는지, 당신의 숨소리가 어느 정도가 거칠고, 어느 정도나 안정되어 있는지, 가슴을 얼마나 솟아올랐다 가라앉는지,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크게 침묵하고 눈을 감았다 떠봅시다. 만약 배가 고프다면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국물을 쭈욱 들이키는 것도 좋겠네요. 방향도 선택도 없는 온기를 받아들이고 나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긴 꿈을 꾸든지, 짧은 꿈을 꾸든지, 꿈을 꾸지 않든지, 당신이 일어날 때 쯤에는 당신이 두 손에 내 다음 편지를 잡고 읽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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