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저도 5.18 민주화운동에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퇴근준비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이렇게 불현듯 글을올려봅니다. 이 글은 5.18일 광주에 있었던 기자들의 자료로 만들어진 다음카페 <5.18 기자클럽>의 내용들을 각색 편집해서 재구성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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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 국면(5월 18일) - 학생시위, 항쟁의 발단
5월 18일의 학생시위는 5월 광주항쟁의 직접적 계기였다. 부마사태 등 전국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학생들의 시위가, 당시의
모든 시위들이 그러하듯 주로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었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시 교문 앞으로 집결한다는 결의를 16일에 한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들(미확인)이 먼저 온 6명의 학생을 팬티만 입힌
채 손을 들고 무릎을 꿇게 해 앉혀 놓았던 것이다. 이 장면에 분노한 학생들은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며 교문을 돌파하려다 공수부대의 진압용
곤봉과 대검(미확인)을 이용한 강렬한 저지로 밀려났다.
이후, 전남대에서 밀려난 학생들은 거리상 멀지 않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시위대의 가두 행렬은 점차 불어나 500여명 규모로 늘어났으나, 전경들의 완강한 저지에 부딪히자 외곽지대를 돌며 학생, 시민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금남로에 집결된 시위대의 규모가 대형화되자, 오후 4시 40분경 계엄군이 투입된다.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공수부대가 서로 충돌, 치열한 양상을 띄게 되면서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던 시위대는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쫓아가 무차별적으로 구타, 대검으로 난자하여 학살하였다.(미확인)
2) 제 2 국면(5. 19) - 민중항쟁으로 확대
이 시기는 전날의 학생시위가 일반 시민들의 합세로 민중항쟁으로 확대 발전해 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전날 학생 시위대를 진압하는 군인들의 지나친 강경일변도의 진압형태를 직접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참여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에는 시위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오후 2시부터 계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약한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는 형식의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시위대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시위열기도 뜨거워져, "계엄군을 쳐부수자" 고 외치며 가톨릭센타 쪽의 공수부대쪽으로
대형화분·보도블럭 등을 깨 투석전을 전개하고, 교통철책, 전화박스 등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기도 하면서 직접 계엄군을 상대로 한 공방전으로
격화되었다.
오후부터는 시위의 중심세력이 학생들로부터 청년(노동대중, 점원, 룸펜 등), 부녀자, 40대 장년층 등 일반시민으로 확대되었고, 싸움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시위의 차원을 넘어 투쟁 차원으로 격화되었고, 당연히 이 같은 투쟁을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광주시민의 문제로 절실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의 산발적, 게릴라식의 시위양상과 그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인 공격형태가 아닌 저항적이고 방어적이었던 공수부대의
대응방식이 점차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가자, 이 같은 사실이 기폭제가 되어 시민들의 근본적인 폭력성이 분출시키게 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시위군중들은 화공약품점, 제재소, 철근 등의 건자재상, 공사장 등에서 각목 철근, 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은 구체적 무장투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는 시위확산으로 계엄군은 간선도로, 주요지점, 고속도로만을 확보하면서 시위는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날 밤 정부당국은 강경일변도의 진압이 오히려 시민들의 투쟁열기를 고조시키는 것을 간파하고, 잔악한
7공수를 빼내고 대신에, 3공수, 11공수를 투입시키고 계엄군을 증원하였다.(미확인)
3) 제 3 국면(5월 20일∼ 21일 오전) - 전면적 민중항쟁으로 발전<br>
이 시기는 나이 어린 중고교생이나 빈민층 등 기층시민들이 차량, 총기류 등으로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투쟁양상이 민중혁명의 단계에 도달하게되는
시기이다.
㉠ 5월 20일
이 시기와 같은 무장투쟁화· 대중투쟁화는 혁명투쟁의 양상으로 또 한번의 질적 비약을 이루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운전사, 점원, 빈민, 룸펜
등의 기층민중이 투쟁의 표면에 나서면서부터이다.
오후 3시 40분경 금남로위 시위대 규모는 수 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직접 노동을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노동자 및 부녀자
등이었다. 광주권 전역에 걸친 산발적이고 격렬한 충돌로 인해 생업이 계속될 수 없다는 상황 때문에 거의 모든 시민이 직·간접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들은 "계엄철폐",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계엄군을 죽이자" 등의 구호 등을
외치며 궐기대회를 갖다가 공수부대들이 공격해오면 일단 후퇴하는 형태로 시위를 펼치게된다.
시위대 앞줄에서는 드럼통, 대형화분 등을 굴리면서 군경저지선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었다.
한편, 광주역 앞에서는 택시 운전사들이 경찰들과 시비를 벌이게 된다.
도심 곳곳에서 시위도중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시체(미확인)를 병원으로 수송하려는 택시운전사들을
공수부대가 구타한 만행에 대해 택시운전사들이 경찰에 항의를 하고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택시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경찰에 대한 항의나 대책마련이 불가능함을 인식한 택시운전사들은 무등경기장으로 집결할 것을
서로 약속하고, 다른 차량에 전달하였다.
곧이어 무등경기장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고 투쟁결의를 마친 운전사들은 직접 대형트럭 4대, 시내버스 11대, 택시 200여 대를
몰고 선두에서 무서운 속도로 금남로의 군경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이러한 노동자시민의 전위적 투쟁으로 광주항쟁은 양적, 질적으로 결정적인 비약을 하게된다.
이제 시민들은 소방차나 버스 등을 몰고 거침없이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밤 9시경에는 시위군중에 의해 시청이 접수되었고,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파출소를 방화함으로써 군부의 하수인인 경찰(?)에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밤 10시부터는 시위군중들은 신역, 도청의 계엄군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들은 차량에 불을 붙여 저지선을 돌파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해 계엄군들은 시위군중에게 M16을 발포하는 방식으로 대응,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시위군중의 희생이 늘어나자 계엄군들은 신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같은 상황을 겪은 시위군중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총기무장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게 된다. 시위군중은 가장 먼저 도심에서
가까운 세무서를 습격, 방화하는 한편 예비군용 무기고에서 칼빈 총을 탈취해 냈다. 비로소 시위군중의 무장화가 시작되면서 시위는 무장투쟁의
형태로 치닫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이날 저녁 시위군중들은 차량을 통해 시외곽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동원해, 시위참가 인원은 25만을 넘고 있었다.
밤 11시경에는 MBC건물이 시위군중에 의해 불타올랐다. 시위군중들의 신문사, 방송국의 점거와 방화 등은 민중들의 진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오히려 민중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있는 언론에 대한 민중들의 응징이었다. 이날 밤 시위대중에 의해 불탄 관공서는 광주세무서, 도청차고,
16개의 파출소와 노동청, MBC, KBS가 공격당했다.
㉡ 5월 21일 오전
이제 부분적으로 무장을 갖춘 시위군중들은 도청, 전남대, 조선대, 교도소를 제외한 시내를 거의 장악하였다.
20일 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하자, 일부 시위군중들의 무장이 이루어졌고, 무장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청년들은 무장을 위한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시위군중들은 아세아 자동차 회사로 가서, 장갑차를 비롯한 차량 200여대를 인수받아 이를 몰고 금남로 쪽으로 밀고 들어 왔다. 이들은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때에 입수된 차량들은 시외곽 지역을 돌며 시민들의 참여를 축구하면서
이들을 도청 앞으로 수송하는 데 이용되었다.
오전 9시 30분경 계엄군과 대치했던 시위군중들이 스스로 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하기 위해 파견하였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11시 30분쯤 협상이 결렬되자 시민들은 다시 격렬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계엄군은 M16을 난사로 대응하였다. 이로서 시위군중의
총기류 무장화는 더욱 부채질되어지고 시위군중이 시민군으로 바뀌면서 광주항쟁은 민중혁명의 최고형태인 내전으로 질적 비약을 하게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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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 4국면(5월 21일 오후∼5월 22일 오전) - 무장투쟁과 시민군 승리쟁취 시기 <br>
이 시기는 시위군중들이 칼빈 소총으로 실무장을 함으로써 투쟁형태는 시가전으로 돌입하고, 광주항쟁이 전남권 일원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까지
항쟁에 참여하게 되는 시기이다.
공수부대의 M16의 실탄발사 대응은 시위군중을 칼빈 소총으로 무장하게 하여, 시민군이 탄생되고, 본격적인 시가전 양상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위 차량들은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시외로 진출한다.
화순방면으로 간 시위 차량은 광부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TNT를 지원받았고, 나주방면으로 간 차랑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M1 200정,
칼빈소총 500여정, 탄알 5만발을 획득하여 왔다.
이즈음 100∼150여명 규모로 추산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전투지도부(또는 투쟁지도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직업별로는 노동자, 종업원, 구두닦이, 근로대중이 대부분이었고,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과 예비군복 차림의 30·40대도
눈에 띄었다.
투쟁지도부는 무장된 시민대중(이후 시민군)을 수 백 명 단위로 조직하여, 광주시만의 고립된 항쟁상황을 극복하고 여타 전남권 전지역의 투쟁을
촉구하기 위해 각종 차량을 동원해서 목포, 영암, 장성, 나주 등 17개 지역으로 진격시켜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들 지역의 민중들은 시민군을 열렬히 환호하면서 자기 지역의 반파쇼 민주투쟁을 스스로의 자율적
역량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이로서 농민대중이 주체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미확인)
한편 이날 시민군은 정치범, 일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날 저녁 7시쯤 시민군의 총공세에 밀려 공수부대들은 전남도청과 전라남도경찰국을 버리고 도심에서 철수했다.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을 꽉 메운 채 만세를 부르며 울기도 하였다.
5) 제 5국면(5. 22 ∼ 5. 27) - 광주민중 해방의 시기 <br>
이 시기는 시민군에 의해 도청이 점유된 후로부터, 내부에서 노선 갈등을 일으키면서 최후로 투쟁파가 투쟁지도부를 장악하여 최후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을 결의한 후 계엄군에 의해 다시 재점령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 5월 22일
전날 밤 시외곽으로 빠진 계엄군의 기본 전략은
1) 시내에서 민중들과 총격전 계속하는 것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주는 것이며<br>
2) 운동의 확산방지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며
3) 조직력이 약한 농촌지역 진압에 중점을 두다가
4) 매스컴 이용하여 시민분열 시켜 투쟁의식 저하시켜 무력진압 한다는 것이었다.(미확인)
이날 낮 목사 신부 학생 변호사 관료 교사 등 광주시내의 지도급 인사 15인으로 '5.18 사태 수습대책위원회(혹은 시민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의 온건주의적 의견은 이미 선을 넘어선 시민군 주체세력들과 합의점으로 도출해 낼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시민군을 지휘하는 대학생 중심의 시민군 지도부는 도청 상황실을 점거하는 한편, 시민군을 통솔하기 위한 부서를 별도로 만들기
시작하는 등 조직적 체계를 마련하였다.
사태 수습위는 상무대에 있는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 아래의 7개항에 걸친 요구사항을 들고 협상을 벌였다.
1. 사태 수습 전에 군 투입 말라
2. 연행자 석방
3. 군의 과잉진압 인정
4. 사후 보복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 하겠음
협상 후 협상보고대회를 열었으나 시민들은 '유혈방지'와 '질서유지'는 적극 찬성하지만, 근본적 원인에 대한 책임추궁이 없이 단지 수습을
위한 협상이라고 판단, 대부분의 시민들이 반대의 의사를 밝혔다. 자연히 보고대회도 유야무야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수습위는 일단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할 것을 결정하고 무기회수 작업을 시작했다.
수습위의 보고대회가 끝난 직후 학생들은 시민들이 주축이 된 수습위원회와 생각이 다른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종합대학인
전남대와 조선대 대표 각 5명씩과 나머지 전문대 대표 5명으로 「15인의 학생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미 만들어진 기존 '수습위'는 군측과의 협상과 시민을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두고, '학생 수습위'는 치안유지 등 대민 업무에 중점을 두기로
각각 역할을 분담하는 쪽으로 잠정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학생 수습위는 [총기회수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 등의 부서를 만드는 한편, 상황실을 점거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시민군들과 연대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도청 앞 광장에서는 주최측이 없는 자발적 시민 궐기대회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서 자시의 의견을
제시하고 또 함께 토론을 벌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한편, 이날 미국은 미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미국은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군부에게 군사용을 허가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광주시민들은 투쟁의 대상을 미국으로 삼기 시작했다. 민중들은 미군전용택시를 잡아 방화하면서 '미 제국주의를 추방하자',
"양키들은 군대이동 승인을 철회하라" 등을 외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5) 제 5 국면(5. 22 ∼ 5. 27) - 광주민중 해방의 시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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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3일
광주 도심은 점차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새벽부터 남녀고교생들은 도심청소에 나섰고, 일반인들도 이에 호응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었다.
일반 수습위와 학생수습위는 여전히 의견의 차이를 보였는데, "무기 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는 주장과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 부르는 현정권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엇갈리는
상태가 계속된다.
오전 11시경 도청 앞 광장은 시내 각 방면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거의 메워지다시피 했는데,
여러 자료에 따르면 10만 명 규모로 알려진다.
이들이 모인 것은 이날 오후 3시에 개최될 【제 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찍부터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린 데다, 수습위원들의 의견차이로 열리지 못하고 있던 중, 운동권 학생들이 시민궐기대회를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11시 30분 경부터 시작된다.
한편, 일반 수습위는 당초 15명에서 5명이 사퇴하고, 10명만 남았는데 여기에 학생수습위를 통합하면서 조선대 10명, 전남대 10명이
참여하는 총 30명 규모의 「확대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들 중 몇 몇 수습위원들은 총기 200여정을 들고 계엄분소를 찾아가 반납한 후 연행되었던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오자, 수습위는 또다시
「무조건 무기반납」과 「조건부 무기반납」의견으로 나뉘어 갈등이 표면화된다.
한 편, 이날부터 계엄군은 시외곽 지역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백운동의 시민군은 헬기를 쏘아 격추시켰다.(미확인)
이에 따라 투쟁양식을 두고 '투항파'와 '끝까지 투쟁파'간의 갈등이 점점 표면화 되어갔다.
강경파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민중들은 다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도 현상적 문제해결에 급급하였을 뿐 진정한 투쟁파는 25일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참가한 후에야 나타났다.
5월 18일부터 뿌려지던 투사회보가 이날도 나와 관제언론을 대신하여 광주의 진실을 이야기했다.
5) 제 5국면(5. 22 ∼ 5. 27) - 광주민중 해방의 시기(3)
㉢ 5월 24일
계엄군은 무기반납시 책임을 면제하겠다고 하면서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날 【제2차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대회전에 투항주의적인
수습위는 규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여전히 수습위에서는 강건·온건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계속하다가 온건파가 이탈하여 이에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하는 학생 수습위의
기구가 개편되었다.
㉣ 5월 25일
이날은 도청 안에서 【가짜 독침사건】이 발생한 날로 유명하다. 시민들은 이를 의도적이 조작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도청내 상당수
시위대는 불안해하면서 도청을 벗어났던 것이다.
광주시는 며칠 째의 평온을 바탕으로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br>
시장과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열었고, 시외곽지역으로부터 경운기 등을 통해 야채가 시내로 반입되고 있었으며, 고아원 및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식량공급도 시청직원들에 의해 비교적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많아지면서 혈액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병원에는 헌혈자가 줄을 서서, 피가 남아 돌아가고 있었으며, 은행 등 금융기관에도
단 한 건의 도난사고도 보고되지 않았다.
계엄군은 광주, 목포를 제외한 전 농촌지역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습위 활동은 계속 투항론과 투쟁론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강경파는 이런 허점을 극복하고 대중투쟁의식의 고양을 위해 【제3차 범시민 민주수호 궐기대회】를 개회하고 계엄철페, 김대중 석방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7시경 윤상원·정상용 등 학생 운동권 인사들이 적극 참여를 시작하면서 민주인사들도 일반 수습위와 합류, 총 25명의 『확대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김성룡 신부가 제안한 「1) 최대통령이 정부의 과오 시인할 것 2) 사과하고 용서할 것 3) 보복 없을 것 4) 국가가 보상
책임질 것」의 4개항의 수습제안을 하였는데, 이는 민중항쟁의지를 묵살하고 사태의 원상복구와 회복의 측면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5) 제 5 국면(5. 22 ∼ 5. 27) - 광주민중 해방의 시기(4)
㉤ 5월 26일
새벽부터 계엄군의 무력진압 제보가 도청 지도부에 입수되어, 모두 경계를 강화하고 기동타격대를 적 대치지역으로 급파하였다.
오전 10시경 10만 여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에 모였고 자연발생적으로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계엄군의 협정위반을 규탄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한편 수습위는 투항파와 투쟁파가 논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청년 200여명이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YWCA에서 농성했는데, 이들
중 주류는 무직자, 단순 노동자, 가게 종업원, 구두닦이, 고아, 빈민층이었다.
대학생 70여명이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자는 계엄군의 끄나풀로 생각하겠다"고 외치며 도청 진입하자 투항파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뇌관제거로 인하여 "TNT로 자폭하겠다" 라는 최후의 방어수단이 무력화되었다.
㉥ 5월 27일
새벽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외곽 진입로를 봉쇄하고 M16, 화염방사기, 수류탄, 탱크를 앞세우고 무력 진압을 개시하였다.
경계 근무 중이던 시민군이 전남대 병원입구, 안일은행 앞에서 계엄군을 발견하고 도청으로 올라와 도청사수를 결의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곧이어 계엄군은 5개 방면에서 도청을 포위하고 압축해 들어왔다.
한편, YWCA에서 농성 중이던 청년들은 무장을 한 후 전일빌딩 옥상, YWCA, 계림국교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박영순(송원전문 2)이
가두방송으로 시민들을 동원하여 시민들이 도청으로 집결하는 중, 계엄군이 시민 100여명을 '도청방화' 혐의로 체포하고 또 다른 10여명을
무차별 사살하였다.
새벽 4시 10분 경, 도청을 포위한 계엄군 중 도청 후문 쪽의 공수부대가 가장 먼저 도청에 진입하여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을 사살하면서
시작된 군에 의한 도청탈환작전은 4시 55분 도청 내에 남은 몇 몇 시민군의 투항으로 막을 내렸다.
또, 전일빌딩을 사수하던 시민군 20여명도 끝까지 싸우다 27일 오후 2시경 모두 사살되었다.
이로써 10여 일간에 걸친 광주항쟁은 무력진압에 의해 끝이 났다.
p.s - 우리가 이토록 고맙게 누리고있는 자유는 어제 죽어간 이의 의지와 땀 그리고 목숨입니다. 어제 죽은이가 그토록 바란던 오늘이라면, 그네들이 그토록 원했기에 있는 우리의 오늘이라 생각합니다.
p.s 1 - 대한민국의 자유라는 이름을위해 의지를 세우셨던 모든 분들께 깊숙히 고개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