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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5/13 17:24:42 |
Name |
IntiFadA (Ch.I.Bu) |
Subject |
[허접꽁트] 자화상 |
"후우...리니지나 좀 하다 갈까..."
또 졌다. 오늘 상대는 신인 저그유저였는데, 기본기가 제법 충실한 녀석이었다.
첫판은 빠른 테크를 올리다가 3해처리 저글링 히드라에 순식간에 밀려 버렸다.
둘째판에서는 특유의 난전모르를 발동해서 간신히 게임을 잡아냈지만,
마지막 판에 초반에 저글링 난입을 허용하는 바람에 아주 허무하게 밀려버렸다.
"제기랄... 그놈의 대마왕. 또 한동안 연습만 죽어라 시키겠군."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팀은 국내의 20개 프로게임팀중에서도 제법 잘나가는
몇 개 팀 중 하나다. 모기업의 탄탄한 지원 아래에서 2군과 연습생을 포함하면
모두 60여명의 팀원이 있고, 스타리그와 MSL 등 A급 4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하는 선수들만도 20명쯤 된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아마추어 최고의 대회인
PGR대회 16대 우승자와, 프로게임계의 사관학교인 Dropship Academy 수석
졸업생까지 영입해서 선수층은 더 두터워졌다.
그러니 오늘 챌린지리그 예선마저 탈락, A급 메이저 대회는 물론
B급 대회마저도 모두 예선탈락한 내게 출전기회가 주어질리 없다.
PC방 안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이 프리미어리그 본선 1일차 경기가 있는
날이니 아마 대부분의 게임팬들은 신촌에 있는 Yellow Game Center에 갔을테지.
감독도 코치도 모두 그 곳에 가있는 것이 내가 홀로 예선경기를 위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PC를 켜고 담배를 피워문다. 리니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어느틈에 스타를 실행하고 배틀넷에 접속하고 있다. 역시 습관이란 무섭다니까.
나도 한 때는 꽤 잘나가는 신예였다. PGR 대회와 함께 양대 아마대회로 꼽히는
스겔 스타리그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우승하고, 지금의 팀으로 스카웃된 것이
3년전. 대뷔 초기에는 승승장구해서 루키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메이저
대회인 스타리그에 데뷔하여 8강에 올랐으나 8강에서 그 대회를 우승했던
'폭동저그'를 만나서 2:1로 패하고 말았다. 그 때는 좀 아쉬운 정도였는데,
그건 그 대회가 나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지...아직 은퇴하지 않았으니 그게 꼭 마지막은 아니지...'
그 대회에서 얻은 별명이 "난장토스"였다. 워낙에 난전을 즐기는 스타일이라
아마 때부터 "난전의 제왕"으로 불렸던 탓에 처음부터 친숙했던 그 별명.
소규모의 병력으로 여러곳에서 동시에 싸움을 붙이는 내 스타일은 프로토스의
노블한 유닛특성과 어울리면서 좋은 성적을 냈고, 경기 자체를 박진감 넘치게
만들어 인기도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스타일이 노출되면서 나를 상대하는 게이머들은 확장스타일 보다는 한
방류나 하이테크류로 경기를 운영하게 되었고, 난전 스타일이 먹히지 않으면서
나의 성적과 인기는 동반 하락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스타일을 바꾸려고 애를
써봤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 후 벌써 2년째 예선대회를 전전하는 그저그런
게이머로 살아가고 있다.
프로게이머란 직업은 꽤나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면서도 인기가 있는 직업인
지라, 나같은 '예선게이머'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웬만한 대기업의 대졸
사원보다 벌이가 좋고, 나이트 같은데서 여자들한테도 인기만점이니까.
그 놈의 대마왕 - 우리 팀 감독인데, 현역시절 별명이 대마왕이었단다. 정말 딱
어울리지.. - 의 잔소리만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하루하루 만족하면서 사는
편이다.
"자아, 양민학살이나 좀 해볼까...?"
언젠가부터 생긴 버릇인데, 예선에서 탈락하고 나면 꼭 공방에 들러 양민학살
을 몇 판 하게 된다. 이를테면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가서 눈 흘기는 격이지.
이내 게임을 시작했고, 11판인가 12판인가를 연승했다. 어느새 내 뒤에는 손님
들이 모여 나의 손놀림을 구경하고 있었고 - 사실 내 손놀림이 토스 게이머중엔
좀 빠른 편이다. 흐흐흐 - , 해는 뉘엇뉘엇 져가고 있었다.
프리미어 본선도 끝나갈 시간이니 이제 슬슬 숙소로 돌아가야겠지.
"저기...괜찮으시면 저랑 한게임 하시겠어요?"
뒤를 돌아보니 웬 곱상하게 생긴 놈이 안경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음...
아까부터 내 경기를 구경하며 옆에 있던 여자에게 설명해주던 그 놈인 듯하다.
설명이 꽤 정확해서 게임을 좀 아는 놈이구나...싶었는데 도전하시겠다?
보아하니 여자친구한테 잘난척 좀 하고싶은 모양인데, 넌 오늘 죽었다. 분노의
솔로부대 러쉬를 한 번 당해보라지..케케케
"그러시죠."
내가 방을 만들고 녀석이 조인했다. 녀석의 ID는 'ZergBoy', 저그유저군.
맵은 "백두대간", 앞마당에 가스가 있는 로템형 맵으로 저그대 토스는 저그에게 조금 좋은 편이다.
뭐 상관없다. 난 프로니까.
ZergBoy : huk!
scufflingToss : why?
ZergBoy : I know ur ID. U pro?
scufflingToss : ^^;;...gogogo~~~
이런, 내 ID를 알아봤군. 다른 ID로 로그인할걸 그랬다.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질 수는 없지.
scufflingToss : GG // GL
ZergBoy : GG
ZergBoy : SalSal yo ^^;;
게임이 시작되었다. 내 위치는 2시. 백두대간의 명당자리다. 이렇게 되면 질 리가 없지.
습관적으로 일꾼을 가르고 프로브 생산. 그리고 일단은 하드코어 체제,
어설픈 아마 따위는 순식간에 잡아준다.
정찰 일꾼이 발견한 상대의 위치는 12시. 12드론 입구해처리로군.
이런 상황이라면 하드코어 하기엔 딱 좋다.
첫번째 질럿이 도착하고, 녀석의 입구에서 교전이 시작된다.
두번째, 세번째 질럿이 추가되고 녀석의 저글링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녀석의 크립콜로니가 막 성큰으로 변태하려 하는 타이밍에 질럿들을 빼려는 찰나,
어설픈 아마추어의 실수가 나온다.
'어라? 크립콜로니의 변태를 취소했잖아? 옆의 드론 찍어둔 것을 취소하려다 잘못 누른 모양이군.
넌 이제 끝났어!'
막 빠져나가려던 나의 질럿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다.
성큰의 존재를 믿고 저글링 생산을 중단했던 녀석은 이를 막을 길이 없다.
'가라! 나의 질럿들아. 커플부대 놈들에게 사시미의 위력을 보여줘!'
녀석의 입구 해처리가 깨졌다. 이제 승패는 사실상 갈린 샘이다.
열심히 저글링을 뽑아 방어하는 녀석을 희롱하듯 나는 질럿을 뺐다.
이제 테크를 올리며 농락모드로 접어드는 일만 남은 샘이다.
'어? 내 본진에 붉은 색이? 오버로드인가?'
저글링이었다. 어느틈엔가 녀석이 저글링 몇기를 빼돌려 본진에서 프로브를 사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젠장, 아무리 소리를 죽여놨기로서니 미니맵으로 저 따위를 못보다니'
질럿을 되돌려 본진의 저글링을 제거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수의 프로브를 잃은 뒤였다. 이렇게 되면
게임은 다시 팽팽해진 샘이다.
한동안 우리는 탐색전 형태의 교전만을 가지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3해처리 저글링 히드라로
나왔고, 나는 앞마당을 먹으며 템테크를 올린다. 센터에서 대규모 교전에서 우리는 서로의 병력을
모두 잃었고, 녀석은 러커로 나의 앞마당 입구를 막으며 막멀티를 시작한다.
'녀석, 니가 유리하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넌 이제 나의 난장모드에 걸린거야.'
내가 명성을 얻은 것은 일반적으로 토스가 불리해보이는 이런 상황에서 난전을 통해 승리를 얻어내는
능력 때문이었다. 예전에 누구는 이런 상황에서 다수 질럿+템플러+아칸 조합의
한방으로 승리를 얻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셔틀을 이용해 병력을 빼돌려 질럿 3~4기와 아칸 1~2기를 짝지은
병력을 동시에 3~4군데로 나누어서 보내 난전을 벌인다.
멀티 테스킹에 자신이 있고, 손이 빠르기 때문에 나온 나만의 스타일, 바로 난장토스가 이거다!
그러나 녀석의 실력도 만만치가 않다. 어느샌가 아드레날린 업이 된 저글링과 히드라를 짝지워서 나의
소수 병력에 소수 대 소수로 맞서며 좀처럼 밀리지를 않는다. 어느새 전장은 사방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전투로 인해 피로 물들기 시작했고, 우리 두 사람의 APM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우와아아아~~~!!!!"
우리 둘의 개인화면을 보고 있던 게임방 손님들이 탄성을 지를 무렵, 녀석의 진영에서 울트라가 등장한다.
사방에서 전투가 승부를 내지 못하는 사이 녀석의 멀티는 활발하게 돌아갔고, 마침내 울링체제가
갖춰진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이길 수가 없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도저히 G자로 손이가지 않는다. 패한 게임인걸 알면서도 마지막 한 기의 질럿까지 컨트롤 해본다.
마지막 질럿이 연기가 되는 순간,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scufflingToss : GG
ZergBoy : GG
숙소로 돌아가며 난 버스안에서 내내 그 게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때 질럿을 빼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니맵만 좀 잘봤어도 충분히 이기는 게임이었어.'
'그 녀석, 내 난전 스타일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던데, 차라리 허를 찔러서 한 방 스타일로 갔으면...'
버스는 어느새 Dropship Academy를 지나고 있었다.
'녀석도 프로가 되려 할까?'
내가 프로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도 우연히 온라인에서 만난 프로게이머를 이기고 나서였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게이머이자 36세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은퇴, 지금은 Dropship Academy의
학장이 된 Boxer. 그를 온라인에서 이기고 프로가 되기를 결심했었다.
'녀석도 프로를 이겼으니, 프로가 되려고 할 지도 모르겠군.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패한 게임에 대해 이렇게 오래 생각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프로가 되었을 땐 정말 매 게임을 모두 이기고 싶어했었고, 한 게임이라도 패하면 밤새
리플레이를 보며 연구하곤 했었는데...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과 대충 연습만해도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취해
어느새 그 때의 열정은 어느새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 땐... 그러고 보니 그 땐 정말 즐거웠었어. 도전할 무엇인가가 있었을 때. 꿈꾸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때. 그 땐 늘 확신에 차 있었고, 늘 즐거웠었는데...'
멍하니 창에 비친 Dropship Academy의 교정을 바라보며 난 상념에 잠겨들었다.
"도전하지 않는 순간 게임은 끝입니다. 그래서 전 다음에도 또 도전할 것입니다. 당장 다음
대회의 우승에 도전해야죠..."
36살에 그랜드슬램을 이룬 Boxer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 때는 키보드에 써놨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잊고 있었나보다.
'그래, 다시 도전하는거야. 처음의 그 마음으로...'
숙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울속에 비친 미소띤 내 얼굴이 3년전 어느날의 나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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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글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직장에 들어와 2년째 일하며, 문득 제가 하루하루 일상에 찌들어 사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저도 제법 패기있고 도전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불과 2년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하루하루 적당히 벌어먹고 사는 월급버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프로게이머에 빗대어 긁적여 봤습니다. 제목이 '자화상'인 이유는 그것입니다.
'처음처럼'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처음의 열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늘 도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생은 그만큼 재미없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도전적인 모습이기 때문일 겁니다.
허접한 글에 멋대로 출연시킨 분들 - 대마왕, 옐로우, 박서 - 께 사과드립니다.
P.S : 사실 전 박서도 좋아하지만 옐로우를 더 좋아합니다. 글 속의 Yellow Game Center는
홍진호 선수가 그레이트 그랜드슬램을 이루고 이를 기념하여 지은 경기장이랍니다.^^;;
P.S 2 : 게임 묘사가 아무리 봐도 너무 허접합니다. 그건 제 스타실력이 하수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P.S 3 : 위의 P.S 2는.................................PlzyStation2가 아닙니다.(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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