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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5/08 01:22:38 |
Name |
Bar Sur |
Subject |
[글] 캥거루 공장 견학 (1) |
캥거루들의 공장에 도착한 것은 그들에게 견학의 허가를 구하는 편지를 쓰고 꼭 3일만의 일이었다. 그 전에 그들이 내게 1차적인 답장으로 보낸 편지에는 실로 '캥거루적'인 언어로 재해석된 전달 사항이 적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로부터 시작한 그 편지는 본론으로 들어서면서 내가 요청한 '견학 허가의 여부'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캥거루 공장의 어려운 사정을 장장 35줄이나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편지를 중간까지 읽고 하품을 두 번 연속으로 한 다음 나머지를 읽어나갔다. 그들은 3년 전부터 그들 자신의 웅혼한 열정을 발휘해 아주 아주 아주 넓은 의미에서 미래를 위한 캠페인을 실시해나가고 있다고 아주 또박또박한 필체로 적어놓았다('아주 아주 아주'에는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전략, 당신이 이 범(汎)캥거루적인 지금의 캠페인에 참여하는 건 당신 개인에게는 아주 작은 한 걸음이지만 모든 캥거루들과 인류에게도 거대한 일보가 될 것 입니다. 만일 당신의 조그마한 성의로서 15달러 정도를ㅡ물론 많을 수록 좋지만ㅡ우리에게 보내준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당신을 맞이할 겁니다. 이것은 결코 부당한 강요나 착취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로서는 정말 서운할 겁니다. 모두가 실의에 빠져 공장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서운할 겁니다. 부디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LA에서 만난 노(老)캥거루는 내게 15달러에다 5달러 정도는 더 얹어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고, 나는 의심없이 그대로 실행했다. 노캥거루는 그 추가된 5달러가 견학 중에 나를 굉장히 편하게 해줄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는데,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사실 얼마를 더 보내야 할까를 고민하던 중에 그의 조언은 좋은 도움이 되었다) 캥거루 공장의 편지는 솔직히 말해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조악하고 치졸해보였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도, 캥거루들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캥거루적'인 사고와 행동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우리네의 기준으로 함부로 제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돈을 보낸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바로 어제. 숙박중인 호텔의 침실에서 눈을 뜬 나는 내 머리맡에 놓여진 단 세 줄의 전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가로로 가늘게 잉크가 번지고 띄어씌기가 엉망이기는 했지만 내용을 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공 장 의문이 열렸다. 5월 17일 03:00.
모 든 캥거루가 당신 을환영 할 것 이다.
암호: 주 머니 를 함부로 열지않는 자 가 너 를 높은계단 으로 이 끌것 이다.]
나는 하룻동안 LA에서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이곳에 오기 이전에 청탁받아 놓았던 취재 원고를 후다닥 정리해서 E-mail로 보냈고, 오후 중에는 몇 가지 식료품을 미리 구입해놓고 수표 역시 미리 지폐로 바꿔 두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필요한 것은 먼 거리를 직접 이동해 갈 수 있는 차였다. 비포장길을 달리려면 사륜이 좋을 테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사실 구질구질한 고물 차를 렌트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예산으로는 빠듯한 일이었다. 결국 고민과 타협 끝에 선택한 차는 제조사 이름조차 지워져 확인할 수 없는 붉은 색의 트럭이었다. 접촉 사고를 수백차례는 저지른 듯한 그 차는 세차를 끝낸 것 같은 데도 정말이지 구질구질했다. 게다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나의 예상을 뒤짚은 것이 그 차에 존재했다.
"왜 이런 고물 트럭에 선루프가 있는 거요?"
"있으면 좋은 거죠 뭐. 혹시 알아요? 하느님이 거기로 쓸데없는 돈이라도 떨어뜨려 줄지."
차를 렌트한 곳의 우람한 체격의 매니저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뭐가 우스운지 킬킬 웃었다. '쓸데없는 돈'이라니, 대체 세상에 그런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선루프가 달린 붉은 색 고물 트럭. 뭐, 어쩌면 지금의 내게 딱 맞는 차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나마 시동이 제대로 걸리고 무리없이 움직여 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적지 않게 감동해버렸다. 엔진의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disturbed의 보컬 드라이먼의 창법과 닮아있다. 터무니 없이 거칠지만 그 근거없는 박력에 오히려 믿음이 간다.
호텔로 돌아가 예정되어 있었던 모레까지의 숙박일정을 오늘까지로 바꿀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프런트의 새침한 미녀가 웃으며 곧바로 그것을 처리해 주었다. 왠지 그 웃음을 보자 그녀가 나를 어리숙한 촌놈 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나는 제복의 여성에게 약하다. 어쩌면 많은 건장한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나, 내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강렬하다.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해보면, 만약 내게 터무니없는 죄의 누명이 씌워져 이국으로 탈출하려는 급박한 순간에도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성경찰의 '꼼짝 마.' 한 마디면 공손히 두 손을 수갑 쪽으로 내밀고 없는 죄목까지 술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나는 제복 입은 여성에게 약하다.
그 날 밤, 호텔의 바에서 다시 한 번 노캥거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내일이면 캥거루 공장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건 참 잘 된 일이군.'하고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난 공장에서 은퇴한지 벌써 18년이나 되었지.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한 14년 간 휴일을 제외하곤 하루도 쉰 적이 없었어. 정말 열심히 일했단 말일세. 내가 맡은 일은 책의 표지를 접착하는 일이었지. 자네도 알지? 그 볼품없이 후줄근한 표지 말일세. 그걸 주머니 속에 한 가득 넣어뒀다가 1, 2차 공정을 마친 책들이 나오면 척척 크기에 맞게 붙여넣는 일이야. 하긴 가장 보람이 없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것도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꽤 재미있었던 것 같아. 결국 난 18년 동안 단 한 번도 돌아가 본 적이 없어. LA에서 몇 년 간 일하면서 전국 이곳저곳에서 체류하기도 하고 세계 여행까지 몇 차례했지만 정작 그 공장에는 돌아갈 수 없었던 거야.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정말 궁금하군."
"그럼 이참에 저와 같이 가시죠."
"내가 보기에, 자네의 그 고물 트럭으로는 2명(1명과 1마리)가 같이 타고 긴 거리를 이동하는 건 무리야. 게다가 자넨 사람 한 명 분의 돈을 내고 허가를 받은 것 뿐이잖나. 돈을 내지도 않고 내가 돌아간다고 해봤자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노캥거루의 목소리에 애수가 서려있다. 그것은 폭우가 깨끗하게 모든 것을 휩쓸고 간 고속도로 표면과 같은, 맑고 견고한 애수였다.
노캥거루와 헤어진 뒤, 밤 12시 쯤에 잠자리에 들었고, 3차례나 서로 다른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은 배를 타고 어느 섬을 목적지로 나아가는 꿈이었지만 닻을 내리고 상륙하는 순간부터는 기억할 수가 없다. 섬은 무인도였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살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두 번째 꿈은 평소에도 자주 꾸곤 하는 악몽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면 진홍색 건물의 옥상 위에 서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도 쫓아오지 않지만 하나의 강박관념처럼 나는 공포에 쫓겨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하지만 도달한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은 다시 옥상이고, 나는 또다시 뛰어내릴 수 밖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행위'와 '결과'가 모호해진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꿈속의 자아는 조용히 소멸하고, 나는 명확히 무엇 하나 기억할 수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세 번째 꿈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는 기계를 이용해 도로를 보수공사하는 현장을 지나고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현장 직원들을 피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그들은 엄청난 소음을 내는 그 기계를 통해 땅을 부수고 그 안으로 다시 부드러운 흙을 채워넣고 있었다. 누군가가 허밍으로 노래를 부른다. 에릭 크립톤의 '레이라'? 글쎄, 소음이 심해 정확히는 들을 수 없다. 그들은 도로를 부수고, 흙을 채우고, 레이라를 노래한다.
공사 현장을 비껴 지나며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인도 위에 움직이지 않고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그것. 유난히 내 눈길을 끈다. 나는 천천히 근처로 걸어가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비둘기가 아닌 비둘기였다. 이런 말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즉 그것은 이미 죽은 비둘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죽은 비둘기인 것만도 아니다. 그 사체는 어딘지 '비둘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혼이 빠져나가 버린 그 '덩어리'는 나무 위에서 떨어져 으깨진 벌집처럼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가 떨어뜨린 쵸콜릿 케이크처럼 보이기도 했다. 발로 밟으면 '푸석'하는 소리를 내며 바스라질 것처럼 생동감이 없는 모습이다. 그것은 어느 샌가 '죽은 비둘기'가 아닌 '비둘기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죽으면 모두가 이렇게 되는 걸까?"
꿈 속에서 주머니를 단단히 틀어막은 한 마리의 캥거루 씨가 그렇게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소리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꿈과 현실을 구분짓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어제 사두었던 감자칩을 먹고 콜라를 마셨다. 바삭바삭, 꿀꺽꿀꺽,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것들을 위 속으로 몰아넣었다. 끄윽, 하고 거친 트름을 내뱉고 옷에 뭍은 많은 이물질들을 털어낸 뒤ㅡ, 나는 호텔 방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캥거루들의 공장으로 출발했다. 그 호텔 방에는 나의 숨소리조차, 부서진 꿈의 한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ps. 이 글은 연재하던 'PgR21의 누군가에게'의 연장선상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다음 편 글에서 끝을 맺을 생각입니다. 'PgR21의 누군가에게'의 10, 11번째 편지를 이것으로 대체합니다. 언제나 그리 재밌지도 않은 글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림과 함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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