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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4/30 01:39:18 |
Name |
Bar Sur |
Subject |
[편지] PgR21의 누군가에게(9) |
안녕하십니까. 이제는 완연한 봄입니다, 라지만 도저히 날씨를 종잡을 수 없군요.(한숨) 요 근래에는 아침엔 봄, 낮엔 여름, 밤엔 가을 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저처럼 양서류인양 온도에 민감한 피부 패널티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입니다요. 개굴개굴.
그렇지만 날씨와는 관계없이 요즘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하루하루입니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 <숏컷>을 읽다가 갑자기 끈기가 떨어져서(카버의 단편을 읽고나서는 아무래도 감상을 정리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듯 합니다.), 과거에 읽다가 말았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집을 다시 손에 잡았습니다. 아, 음악도 바뀌었군요. 어제까지는 크리스탈 케이와 Porno Graffitti, 밤 느즈막이 쳇 베이커를 들었지만, 오늘은 조 새트리아니와 호테이 토모야스를 듣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신보 역시 훌륭합니다. 특히 조 새트리아니의 신보 "Is There Love In Space?"의 완성도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에 대해 논할 여유가 없을 만큼 깊게 빠져드는 군요. 흐흠, 그루브, 그루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건 언제나 그렇듯이 러브 앤 피스.
자, 오늘은 수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죠. 아, 과거에 한 번 수염에 관한 잡담을 적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와는 제 상황도 다르고 하니 다시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비슷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주제가 없어서 비슷한 걸로 떼울려고 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받아면 제 가슴이 너무 괴롭겠죠? 아마 너무 괴로운 나머지 당신이 싫어하는 종류의 개구리가 되어 쫓아다닐지도 모릅니다. 개굴개굴) 되도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주시길. 러브 앤 피스ㅡㅡ.
저는 수염이 굵게 그리고 빽빽하게, 게다가 빨리 자라는 편입니다. 왠만하면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밀어주어야 안면성형에 가까운 변화를 잠재울 수 있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겁니다. 아침마다 남들 이상으로 소비하는 시간과 정력, 게다가 가끔은 아까운 피까지. 하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신 큰 형님. "형님, 이번엔 빨리 나오셨군요." "음, 이번엔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또 잘 부탁한다." 이런 아름답지 않은 대화까지 귓속을 멤돌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부의 마음, 씨지푸스 신화에까지 상념이 도달하고 마는 겁니다. 허무해, 허무합니다요. _| ̄|○;;
아, 말을 하다보니, 내가 수염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지실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수염을 적당히 기르고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지난 학기의 휴학 중에는 마음껏 기르고 다녔으니까 말이죠. 신경써서 잘 기른 수염은 평소 후즐근함에 몸에 베인 이 몸까지도 은근히 터프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겁니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무엇보다 마음가짐의 문제.(사실은 9할쯤이 마음가짐의 문제지만) 애정을 가지고 잘 손질한 수염에는 어느 샌가 사소한 마법처럼 <수염을 기른 나는 좀 더 결단력있고, 좀 더 자신감있게 행동한다.>라는 짧은 철학이 스며들어가 있는 겁니다.
1. 수염 깎기 힘들어.
2. 형님이 가끔씩 그립다.
3. 9할 이미지 트레이닝 + 1할 터프.
이런 이유로, 이번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조금 뒤인 3월 말부터는 다시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주변의 시선도 있고, 복학한 뒤로는 가끔씩 같은 학번이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서비스팩 같은 거죠. 가볍게 웃으며 넘길만한 일들입니다.
기르기 시작한 수염은 꽤 자주 가볍게 잔털들을 손질하고, 너무 길었다 싶을 때 전체적으로 조금 깊게 깎아냅니다. 잘라내야 겠다 싶은 '정도'를 눈대중으로 짐작하고 깎는 건 꽤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 역시 숙련되고 나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냥 수염을 깨끗하게 밀어버리는 것만큼 상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사소한 것들일수록 마음가짐의 문제이듯이)
하지만 말입니다. 때로는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것들도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길러오던 수염을 오늘 아침 어떤 결심에 의해 싸악 밀어버리듯이 말입니다. 물론 다시 기르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단지 그것 뿐, 막상 '깎아야 겠다.'라고 생각한 그 순간이 되면 다시 기르게 될지 어떨지는 나중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순간의 행동ㅡ, 그리고 '때로는' 입니다. 그 '때로는'에는 정말 깊은 모호함이 잠식해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인 거죠. 단어 자체를 하나의 우물이라고 했을 때, 두레박을 내리다보면 하루 종일 구멍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정도로 모호한 개념입니다.
소위 명품에 목숨을 걸듯 그것들을 모아오던 명품족 여성이 어느 날 그것들을 모두 처분해 버리는 경우도 있고, 천하의 바람둥이가 열렬히 단 한 명의 상대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말입니다.
물론 당신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때로는'이 때로는 당신 인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이건 상당한 각오를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때로는'은 악몽이나 가위에 눌리는 경험처럼 감각적으로 당신을 찾아 올지도 모르고, 거기에서 '정도'를 파악하는 건 순전히 당신 자신에게 달린 일입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또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되겠죠.
뭐, 운명과 우연이란 어차피 사건이 있는 뒤의 인간이 가지는 인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무언가 소중한 것을 한 차례 정리할 때가 오면, 당신의 결정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군요. 그 때 당신이 떠올리는 사람이 나라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겁니다.
다음 편지에서 다시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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