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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4/19 18:18:28
Name 네로울프
Subject 바다에......





오후 부터 태풍이 우리 마을로 오를 거라는 텔레비전 뉴스를 들은 건 전날 저녁이었다. 어쩐 일인지 아침 나절 부터 텅 비어 버린 집을 혼자 지키고 있게 되었을 때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태풍이 잦은 동네라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예닐곱번쯤은 태풍이 지나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여름이면 의례 오는 태풍 중의 하나였을 뿐이기도 했다. 게다가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도 벌써 세번째 태풍이었다.
아홉살 어린 애가 혼자 집을 지키면서 재미를 느낄 만한 일은 별달리 가지가 많지 않았다. 마당 한켠 눅눅한 우리에 늘어지게 드러누운 돼지 두마리를 나무 꼬챙이로 을러대는 짓도 혼자선 오래 재미를 느낄 일이 아니었다. 제법 넓은 마당에 길게 뻗은 채마밭의 잡초들이나 틈나면 뽑아 두라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 이랑에 쪼그리고 앉아 부적대보지만 초등학교 2학년 짜리의 인내심이란 게 그리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집안을 쑤셔대며 서성거리다 결국 자리를 잡은 곳은 커다란 낡은 흑백 텔레비전의 다리 아래 였다. 꼬마의 몸 하나가 제법 넉넉하게 들어가는 그 곳은 나름대로 자신의 배타적 영역이었다. 툭하면 텔레비전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에 가족들은 이상하다기 보단 재밌어 하는 편이었다. 그 곳에 모로 누워 있으면 내다 보이는 모두가 자신과 멀어 보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노닥거리다 밤이면 한 이불 속에서 껴안다 시피 서로에게 팔,다리를 걸치고 자는 두살 터울의 남동생도 그 속에서는 마치 전혀 다른 곳의 모르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마치 텔레비전 속 사람이 내다보는 네모난 상자 밖 세상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을 구경을 나온 지나가는 여행자가 내다보는 풍경이었다.
창호지로 힘겹게 젖어 들어오던 빛이 갑자기 여려지며 방 안이 어둑해졌다. 그 탓에 내다보이던 방 속의 사물들이 희끄무레해졌다. 왠지 모를 무섬증에 그 곳에서 기어나와 대청 마루로 나섰다. 결이 굵게 우둘두둘한 판자를 이은 대청 마루에 누워 올려다보니 하늘이 어느 샌가 나즈막하고 부옇게 떠 있었다. 태풍이 오려나보다.

바닷가 방파제로 나서 보기로 한 건 반나절의 심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큰바람이 불면 늘 바닷가에 나가는 것을 단속하던 어른들도 집을 비운 틈이라 막연한 호기심에 이끌린 점도 있었다. 어설피 듣기 시작한 빗방울이 나즈막한 댓돌에 튀어 벗은 종아리에 사박사박 올라붙어서이기도 했다.
살대가 두어개 꺽어진 낡은 우산을 들고 마을 앞 방파제에 나섰을 즈음엔 외려 살짝 듣던 빗방울도 멈춰있었다. 바다가 자고 있었다. 잔 물결 조차 일렁이지 않는 그렇게 조용한 바다를 본 기억이 없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바다는 갓 고은 우무묵 같이 매끄럽게 굳혀져 있었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그리고 사위가 고요해져 바람 한 점 흩날리지 않고 아득한 땅 울림도 그쳤다. 한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정적은 멋모르는 어린 아이에게도 영원의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차갑고 묵직하게 굳어져 있던 바다 밑바닥에서 하얀 거품들이 가득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비의 물이 끓듯이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눈이 닿는 언저리의 바다가 전부 거품으로 가득차올랐을 때 쨍! 하고 정적이, 영원이 깨어졌다. 몸을 휘청일 만한 세찬 바람이 마치 바로 옆에 있었던 듯 휘몰아 치고 굵은 빗방울이 때리듯, 휘감듯 쏟아져 왔다. 낡고 여린 우산을 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굉음을 내며 바다가 방파제에 부딪쳐 왔다. 부셔버릴 듯이 화를 내며 짓쳐와서 되려 부서지며 내 머리 위로 흠뻑 뿌려졌다. 바다와 바람과 땅이 온통 뒤엉켜 으르렁 댔다. 겁에 질린 나는 펴보지도 못한 우산을 놓칠새라 품에 안고 긴 방파제를 따라 줄담음쳐 도망하고 또 도망하고 있었다.
            






명절 제사가 끝나면 일광산 아래의 이름도 없는 야산 머리턱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다니곤 했다. 작은 가슴을 바드락 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아래를 내려다 보면 작은 우리 마을을 또아리 틀듯 감싸고 있는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멀지만 오히려 금방 손에 잡힐 듯이 바다가 가까웠다. 그리고 십수년 후 산 윗길로 고속도로가 나며 할머니의 산소는 없어졌다. 이장을 하지 않고 화장해 재를 뿌렸다 한다. 이제 할머니 산소에서 내려다보던 바다는 없어져버렸다.






동네 뒤를 흘러 마을 앞 바다와 만나는 자그마한 강의 하구는 여름에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 좋았다. 높은 해에 데워진 강물과 조금은 찬 바닷물이 만나 미지근한 온도는 어른들에겐 싱거웠겠지만 고만고만한 초등학생 녀석들에겐 딱 적당했다. 덤프트럭의 바람통을 빼낸 커다란 우끼를 일곱살 막내 여동생에게 쥐어주고 모래장난에 바쁜데 여동생이 낯선 내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오빠야! 이거 우끼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면 안되제?"
여동생의 눈은 내가 대신 거절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잠시만 같이 타고 놀면 안되니?"
사근한 도회지 여자아이의 말이 하얗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국희야 그냥 좀 같이 타고 놀아라."
여동생은 조금 울상이 되었으며 하얀 도회지 여자아이는 거봐라는 듯이 웃었고 노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여동생을 배신했다.
그리고 물놀이를 하는 틈틈이 이 것 저 것 예쁜 조개 껍질을 두손 가득 모았다. 해가 늬엿 기울어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떠날 때 쯤 모아두었던 조개껍질을 여동생을 통해 도회지 여자아이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모른 체 하며 집에 갈 채비를 하던 나는 그 아이가 받아든 조개껍질을 조금 있다 바닥에 버려버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틀 쯤 여동생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부산으로 전학을 간 이후론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도 바다로 잘 물놀이를 가지 않게 되었다. 새로 사귄 도시 친구들과 놀기 위해 부산으로 자주 나갔고 돌아와서도 왠지 바다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삼촌과 사촌형과 함께 낚시겸 간만의 물놀이를 나갔다. 해가 뜨거웠던 그날 어느새 살이 하얘진 나는 살이 잔뜩 데어버렸고 며칠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해몸살을 앓았다. 삼촌과 사촌형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동아리 선배들과 동기들과 주말을 틈타 부산으로 놀러갔다. 이것 저것 바닷가에서 할수 있는 것들을 즐기다 저녁무렵 바다가 내다 보이는 높은 까페에 앉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험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한 여자친구에게 엽서를 몇장 썼다. 약간의 놀림이 있었고 파도 소리가 아스라히 들렸다. 그날 난 버스로 1시간여의 집에 들르지 않고 그냥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정동진 해맞이 열차 따위는 애초에 알지도 못했다. 다만 손가락이 가늘고 긴 여자 매표원의 친절한 설명에 한 시간 쯤 뒤에 출발한다는 그 표를 끊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여자친구는 떠났고, 직장도 그만둬 버렸으며 머리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밤 11시 55분 기차였다. 다만 바다가 보고 싶었다.






정동진엔 덩그라니 떠오는 해와 밟힐 듯이 많은 사람들의 웃음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곧 없어진다는 비둘기호를 타고 내린 망상역은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었다. 계절이 지나버린 해수욕장엔 모래알에 섞인 돌맹이 만큼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고 계절이 남긴 피곤한 백사장과 지친 바다가 있었다. 배낭을 베고 모래밭에 누워 가져온 "필립 말로우의 우수"을 읽었다. 책장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고 파도소리만 젖어오듯이 아득했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는지 눈을 뜨니 밤이었고 하늘엔 별이 한가득했다. 한참을 별빛을 보고 바다소리를 듣다가 일어나 민박집을 찾아나섰다.






내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는 바다 게이지가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다. 왼쪽 심장 아래 쯤에 있다고 몸을 짚어보이면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보인다. "이 바다 게이지는 말이야. 한 석달쯤 가는데 땅 한가운데 있으면 조금씩 줄어들어. 그 게이지가 바닥이 드러나면 나는 막 피폐해져서 해를 피해서 그늘만 밟고 다니게 돼. 우울해지고 사람들이 어지럽게 느껴져서 상처입은 짐승의 심정이 된다니깐." 그녀는 살짝 웃고 뭔가 다른 이야기 거리를 찾으려는 듯 메뉴판을 뒤적이지만 나는 모른 채 한마디를 보탠다. "그런데 바다로 가서 그 앞에 딱 닿으면 순식간에 바다 게이지는 가득 채워져."






바닷가에서 태어나서 바닷가에 살다가 사방이 막힌 땅 한가운데로 온 사람들은 한가지의 병을 앓게 된다.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며, 내 경우엔 몇달을 바다를 보지 못하면 어지럼증과 무력감, 신경질증이 생긴다. 그 병은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 한 치료되지 않는다. 난 그 것을 땅멀미라고 한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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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모자라.
04/04/19 18:58
수정 아이콘
아, 너무 부드러운 느낌이라 댓글이 참...어렵네요. 세번 읽고 올립니다.^^
자주가서 비린내도 맡고, 짠맛도 보시고 하셔야 겠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4/04/19 19:21
수정 아이콘
꼬맹이적의 일화는... 예전 문학책이던가, 국어책이던가 에서 읽었던 [요람기]라는 글을 생각나게 합니다. 땅멀미라... 공감가는 멋진 표현이네요, 네로울프님. ...좋은 글, 읽는내내 흐뭇한 웃음이 가시지않습니다. 감사합니다...
My name is J
04/04/20 00:14
수정 아이콘
제가 무어라 댓글을 달기가 부끄러워지지만..
좋은 글을 읽고 입 싹 닦고 가기에는 미안해서요.^^;
잘 읽었습니다.
상관없는 이야기지만...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제꿈은..제가 가질수 있는 한뼘의 땅을 가지는 것입니다.
즐비한 아파트 말고...집말고...땅말입니다. 부드럽고 촉촉한 땅이요.
학창시절에는 어머님께 조금만 사는 방법은 없냐고 물어보기도 했었지요.
사람은 살면서 뿌리가 필요합니다. 제게 그 뿌리는 제가 꿈꾸는 그 땅이 될것이고...네로 울프 님께는 바다가 될것 같군요.
나중에..제가 정말 제 손으로 제 땅을 갖게 되면...꼭 네로울프님께 자랑하고 싶어지는데요.^_^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게 너무 아쉽군요.^^;)

땅에서 물러서서..작은 공간이 되었던 제꿈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셔서...너무 감사합니다.
세이시로
04/04/20 00:26
수정 아이콘
바다가 보인다...라는 게 문득 생각나네요.
좋은 글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
땅멀미...그것은 향수의 또다른 이름.
04/04/20 07:12
수정 아이콘
저 역시... 바다에 가고 싶군요.
총알이 모자라.
04/04/20 18:35
수정 아이콘
확실히 너무 좋은 글에는 댓글이 적군요.(제글은 빼고^^)
다시봐도 즐거운(조개 전해주던 사연빼고) 이야기네요.
가끔 맥빠질 때마다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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