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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4/17 00:54:03
Name pailan
Subject 목련이 지고 난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에 일년에 많아야 한 두 번 오는 처지인 제가 한 달전 오랜만에 한국의 '집'에 도착했을 때 기뻤던 건 아파트 좁은 마당에 하얀 꽃송이를 소담하게 달고 서 있던 목련나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뜻해지면서 하나하나 팝콘이 터져 오르듯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찬란하고 눈부셨습니다.
가지 가득 눈송이를 안고 있는 듯도 보이고, 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을 한아름 쥐고 노는 듯도 보였습니다.
집을 나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안녕!"하고 힘차게 목련에게 인사를 할 만큼 그 목련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많이 울어 부은 눈을 부모님께 감추려 열심히 문지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보다 2% 오버하며 평소 마다하던 아침밥도 열심히 입으로 퍼 넣고, 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의 저를 향해 씨-익 힘찬 미소도 지어보였습니다.
팡팡-, 두 손으로 뺨을 살짝 두드리고 기합을 넣고 요 며칠간 아르바이트를 위해 계속 출근한 강남으로 출발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련을 향해 "안녕!"이라 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목련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화사하게 자신의 흰 빛을 뽐내던 목련나무의 가지에는 꽃잎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저 제 발치로 까맣게 식어버린 목련꽃잎들만이 마찬가지로 까맣게 타버린 제 마음처럼 뒹굴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냐?"며 평소와 아주 조금 다른 딸의 모습을 묻는 엄마의 질문에도 꾸역꾸역 밥을 넘기며 "일은 무슨 일이에요."라고 요령좋게 넘겼던 저였지만, 시들어 떨어진 목련꽃잎 앞에서는 그만 눈물을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저 떨어진 목련꽃잎을 다 쓸어모아 가슴에 품고 펑펑 울고 싶을만큼 까맣게 타버리고 이미 누군가의 발에 한 번쯤 밟힌 듯한 목련꽃잎들이 제 마음같아 슬펐습니다.



그리고는 하루종일 일했습니다.
갑갑한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열심히 전화를 걸고 받고, 파일을 정리하고, 숫자를 맞춰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머리속을 비울 순 없었지만, 단순하게는 만들 수 있으니 이것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점심시간에 같이 아르바이트 하는 동생과 떡볶이를 나눠먹으며 서로의 쉽지 않은 사랑이야기를 털어놓고 "다 잘 될거야."를 되뇌면서 힘내자 다짐도 했습니다.
퇴근시간의 지옥철에서 대롱대롱 손잡이에 매달려 운반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 걸 제외하고는 그냥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습니다.
집 근처의 역에 도착해서 저를 위해 일부러 시간 맞춰 퇴근하신 아빠의 팔을 잡고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과 몇가지 먹을 걸 살 때, 일부러 한 톤 높여 웃는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던 아빠의 크고 따뜻한 손때문에 와락 눈물이 터질 뻔 한 걸 제외하고는 정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습니다.
멋있게 한 방에 주차에 성공한 아빠에게 크게 미소를 지어주고 차에서 쪼로록 내려 주위를 휘- 돌아보았습니다.
목련은 다 졌으니까, 이제 더 이상 인사할 곳이 없는데도 다시 한 번 목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목련이 지는 건 끝이 아니라는 걸.
하얗게 빛나던 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도 목련나무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꽃이 졌어도 나무에게 남는 것이 있듯, 제게 사랑이 떠났어도 그 사람이 남긴 것이 있다는 걸.
꽃이 지고난 그 뒤로 빼죽히 이제 겨우 얼굴만 내민 작은 잎들의 흔들림에서 전 비로소 오늘 하루 잃어버렸던 제 웃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안녕!"
목련나무에게 다시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뒤돌아 선 제 손을 아빠가 다시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어땠니? 아르바이트 힘들진 않았어?"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오늘은 진짜 좋은 하루였어요. 아빠."

정말로, 오늘은 진짜 좋은 하루였습니다.


p.s.1. 고맙다, 목련나무야.
p.s.2. 진정 pgr분들 중에 일요일 결승전과 윤열동 뒷풀이에 가시는 분이 안계신 겁니까? 저좀 구제해 주세요ㅠ.ㅠ
p.s.3. 제 핸드폰 번호 019-270-4844입니다. 제게 위로의 글 써주셨던 분, 언제든 전화하시죠. 바로 차 한잔 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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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urn Of The N.ex.T
04/04/17 01:05
수정 아이콘
....전 가고 싶어도 길을 몰라서 못가요..ㅠㅠ

차말고 남자는 술! 남여차별에 반대하니 술!
따라서 죄다 술!
-_-;
힘내세요..^^
My name is J
04/04/17 01:17
수정 아이콘
차도 좋고 술도 좋은데!
서울에 안사는 지방민입니다.^^;(더군다나 두번째 글에는 댓글도 안달았어요!ㅠ.ㅠ)
세상사 웃으면서 살아요~으하하하
04/04/17 01:24
수정 아이콘
좋은하루... ^^*
임마라고하지
04/04/17 03:42
수정 아이콘
참 좋은 글... 이네요. ^^
잘 보고 갑니다.
임마라고하지
04/04/17 03:44
수정 아이콘
윤열동 뒷풀이가면서 구제해드리면 차 한잔 사주시나요? ^ ^
김대선
04/04/17 11:10
수정 아이콘
저도 목련을 좋아합니다. 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목련은 목련이 절반이상 땅에 떨어져 갈색으로 물들어갈때죠.
꽃은 지면서 가장 강한 향기를 남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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