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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4/02 15:20:33
Name 작고슬픈나무
Subject [소설 프로토스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supply 5/10)
이번엔 실수 없이 사이언 검을 소환한 성춘의 눈에 비친 것은, 징그러운 저그 족이 아닌 한 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다크 템플러였다. 아마 3층에서 떨어진 모양으로 오른 팔이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둘은 얼른 달려가 다크 템플러를 부축했다. 문서 보관대 옆으로 끌어가려고 힘껏 당기려던 성춘은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가벼웠다. 그래도 성인인데 이처럼 가벼울 수가. 다시 부축하려던 성춘은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다크 템플러는 여자였던 것이다. 조심스레 끌어서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옮기면서 성춘은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 고마워. 성춘."
"아니, 괜찮스.. 응? 어떻게 내 이름을 알죠?"
"인투 더 레인 성춘. 승려 학교 창설 이래 최고 성적 기록 소유자. 다크 템플러 가문 중에서도 손꼽히는 레인 가문의 수재이자 유래 없는 사고 뭉치. 별명은 크레이지 성춘, 혹은 추니."
"그, 그런 것까지!"
"후훗. 5년 만에 최고 성적을 경신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기록을 빼앗기게 되면, 누구라도 자기의 명예를 빼앗아간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 윽.."
"이봐요. 말 많이 하지 말아요."
"형. 이 분 몰라? 퓨리님이잖아. 맞죠?"

성제가 성춘에게 어이 없다는 시선을 던지고는 단숨에 내뱉은 한 마디에 다크 템플러는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성춘도 퓨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왜 몰랐는지 자신이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한 학년 선배인 퓨리는 재학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 현자의 탑에 들어간 동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승려 학교 시절, 까다로운 선생들에게도 퓨리는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아냈다. 절럿 선생마저도 퓨리의 재능은 인정할 정도였다. 사이언 검 수련 시간을 가장한 절럿 선생의 단체 기합 시간에도 퓨리만은 항상 예외였다. 사이언 검 칼등으로 강화 장갑 베기, 수련장 대리석 바닥에 사이언 검으로 네모 반듯한 체스판 그리기, 체스판 검은 색 칸은 다 파내고 흰 색 칸은 건드리지 말기 등 어떻게 생각해 냈을지가 궁금한 온갖 조건을 퓨리는 다 해냈다.

동기들이 수련장 바닥을 땀으로 씻어낼 때 퓨리는 유유히 사이언 검으로 한 칼에 개미 더듬이 1/3 지점 반만 도려내기 놀이를 했다는 얘기는 승려 학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몇몇 퓨리의 동기들이 퓨리를 질투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이가 왜 얼굴마저 그렇게 이쁜 거냐라는 거였음은 성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개 얼굴이 예쁜 여자아이들은 승려 학교보다는 시민 학교에 많았다. 시민 학교는 교과목이 별로 없어서 자유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을 여자 아이들은 치장하는 데 쏟아부어서 미팅이나 소개팅은 항상 시민 학교 학생들이 인기였다. 그러나 퓨리의 선천적인 아름다움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붉은 기가 도는 검은 머리칼은 대충 손수건으로 질끈 묶고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다녔지만, 아무리 붐비는 곳에 있어도 그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시민 학교 녀석들도, 파일럿 학교 녀석들도 퓨리를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으니까.

용맹무식한 질럿 학교 녀석들이 가끔 하교 길 교문에서 퓨리에게 접근했었지만, 언젠가 그 학교 3학년에서 짱이라는 녀석이 얼굴에 '내가 아직도 짱으로 보이니?'라고 곱게 쓰여진 (물론 퓨리 솜씨였다) 칼자국을 가지고 돌아간 뒤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자기 얼굴에 쓰여진 글씨가 너무 고와서 병원은커녕 소독약도 안 바르고 있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형. 또 회상이야? 그만 좀 해. 지금 우린 전투중이잖아!"

난들 회상하고 싶어서 하냐. 성춘은 오늘 이상하게 회상을 자주 하게 되는 자신을 아마 누군가 조종하고 있을 거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없었다. 질럿도 드래군도 없었다. 다만 저그들만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입구로는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드라군들이 더 이상 희생을 감내하지는 않겠다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었다. 스카우트와 커세어, 그리고 성춘도 한 번 밖에는 본 적이 없는 초대형 전투 항공모함 캐리어 등이 셋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쪽에 수직 이동구가 있어. 어서 저 쪽으로."
"퓨리님. 당신은 이 곳에서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당하고 나 혼자 쉬고 있을 수는 없어. 더구나 지금 혼자 있는 건 죽여달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지. 자 빨리 올라가자."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당연한 거 아냐. 옥상이지. 녀석들이 당하는 꼴을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어."
"웅. 그리고 거기 있어야 우리가 구출될 가능성도 더 큰 거잖아. 그치 형?"

퓨리를 들쳐 업고 달려가는 성춘은 성제 녀석의 예상 외로 정확한 판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했다. 어차피 입구는 완전히 장악당했고, 옥상에 있다가 스카우트나 캐리어의 눈에 띄는 것이 훨씬 확률 높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당황하기만 했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성춘에게 성제 녀석의 어리게만 보이는 눈이 유난히 맑아보였다. 마주보는 성제의 의아한 눈망울을 피해 투명한 수직 이동구 창 밖으로 눈을 돌린 성춘은 퓨리를 업은 채로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옆 수직 이동구로 히드라와 저글링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녀석들은 이미 이 쪽을 발견했는지 수직 이동구 창을 부수고 있었다. 얼마나 살육을 저질렀는지 입과 발톱, 독뼈가 튀어나오는 등 쪽이 온통 핏물로 퍼렇게 번질대는 녀석들이었다.

"이. 멍청이!"
"네.. 네?"
"그렇게 주저앉으니 엉덩이가 아프잖아. 그깟 녀석들에게 그렇게 당황해서야 그 동안 네가 깨버린 내 기록들이 부끄러워지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해!"
"뭐, 뭘요? 아참, 그렇지. 사이언 검을 소환해야지."
"이런. 성춘 너 졸업이 얼마 안 남았으면 공간 왜곡 쯤 다 익혀놓은 거 아냐?"
"조, 조금 밖에 못 하는데요."
"조금 얼마나? 설마 팔은 감출 수 있겠지?"
"네. 팔하고 머리하고."
"쳇, 됐어. 그 정도면 일단 충분하니까. 그리고 너 성제라고 했니? 환상 계열 마법을 어디까지 수련했지?"
"하급인 뮤턴트(Mutant)는 다 익혔고 중급인 디멘션 크로스 (Dimension Cross)는 약간 불안하지만 할 수 있어요."
"어휴. 요즘 수준이 왜 이렇게 낮아졌지. 내 동기들은 졸업하기 전에 상급인 일루젼(Illusion)은 물론이고 몇 녀석들은 최상급인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까지 할 수 있었는데."
"죄, 죄송해요."

금새 풀 죽은 성제를 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퓨리 옆에서 성춘은 공간 왜곡을 통해 팔과 머리를 감췄다. 다크 템플러는 승려 학교 졸업 후 현자의 탑에서 1개월 간의 특훈을 통해 공간 왜곡을 마스터하게 되어 있었다. 사이언 에너지를 모든 말초 신경에 집중시켜 스스로 위치해 있는 공간을 비틀어서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일단 성공하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우등생들과 마찬가지로 성춘도 미리 그 능력을 익히고 있었다. 그래서 전신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적으로 하여금 공격 방향을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사이언검을 휘두를 팔과, 시선을 통해 공격 방향을 예측당하는 걸 막기 위해 머리를 감추는 정도는 익힐 수가 있었다.

"으, 으악. 형, 벌써 한 거야?"
"야, 그만 좀 놀라라. 너 이런 모습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잖아."
"으악! 형, 제발 말하지 마. 목도 없는 몸에서 말소리가 울려나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전에 얘기했잖아. 볼 때마다 무섭단 말야."
"얼씨구. 이 녀석 정말 겁쟁이구나. 얘, 그만 수다 떨고 성춘에게 디멘션 이레이즈를 걸어줘."
"그, 그건 불안한데."
"너 아직도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니? 지금 죽느냐 사느냐야. 불안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라구!"
"아, 알았어요. 음. 디멘션 크로스!"

성춘의 주위 공간이 점점 성춘의 몸 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환상 계열의 중급 마법인 디멘션 크로스는 대상자가 있는 차원을 교차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적은 상대방이 땅 속에 허리까지 묻은 채 걸어오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상대방의 팔 다리가 서로 떼어진 채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목표를 찾지 못 하는 적의 공격이라면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성춘은 바닥이 자기 몸 위로 차오르자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전에 학교에서 생일을 맞은 제우스 녀석이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일루젼을 몸에 걸고 온 적이 있었다.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웃는 세 명의 제우스는 하루 종일 학교를 뒤집어 놓았었다. 제우스 녀석은 평소에 좋아하던 여자 아이를 세 명의 자신으로 포위한 다음 세 송이의 장미를 내밀었었다. 황당함과 기쁨이 반쯤 뒤섞인 표정의 천사 (제우스의 표현을 빌자면) 가 장미를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억센 손이 뒤에서 나타나 장미를 쥐었다.

누군지 궁금할 것도 없이 절럿 선생이었다. 절럿 선생은 어느 녀석이 제우스인 줄 모르겠다며, 따라서 나도 어쩔 수 없다며 그 엄청난 손으로 (틀림없이 스캐럽하고 부딪쳐도 안 부서질 거라고 제우스가 평소에 주장하던) 세 명의 제우스에게 고르게 한 방씩 어퍼컷을 먹여주었다. 일루젼은 금새 깨져버리고 진짜 제우스는 아침에 먹은 케익을 치장하던 크림 색이 뭐였는지 확인해야 했다.

'녀석. 그 뒤에도 다음엔 할루시네이션으로 세 명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면 절대 안 잡힐 거라고 그랬었지. 응? 이런 또 회상이군. 대체 왜 이렇게 오늘은 회상이 많지. 아무래도 누군가 조종을.. 헉!' 또 성춘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쪽 승강구의 유리창마저 깨지고 히드라와 저글링들이 뛰어들어왔다. "이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일 앞 저글링 머리에 일검!" 무의식 중에 성춘은 퓨리의 외침대로 선두의 저글링 머리에 사이언 검을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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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모자라.
04/04/02 15:27
수정 아이콘
"형. 또 회상이야? 그만 좀 해. 지금 우린 전투중이잖아!"
장면전환의 노련함이...
잘보고 있습니다.^^
04/04/02 16:49
수정 아이콘
이런글에 이렇게 코멘트가 없다니..방금 모두 읽고왔습니다..
작가는 추천과 코멘을 먹고산다고 -_-;;;;하시던데 글에비해 너무 적은 코멘이 안타깝습니다.
오랜만에 피지알에서 기대되는 글 입니다.
시리즈가 끝나는데로 추게의 한 페이지가 장식됐으면 합니다!!
민아`열심이
04/04/02 19:23
수정 아이콘
정말 ^ ^ 저도 호릭 ? 하릭 ? 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
정말 재밌습니다 .... ^ ^
휴식처가 되는군요 ~
어버_재밥
04/04/02 23:21
수정 아이콘
홀릭 아닌가요?
저도 이 글에 왜 이렇게 코멘트가 없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으허허;
정말 오랜만에 명작 하나 나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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