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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31 00:49:10 |
Name |
Bar Sur |
Subject |
[편지] PgR21의 누군가에게(3) |
자, 이번에는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해 봅시다.
아니,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사실 무슨 주제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어중간한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생활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상상력에 무슨 차등이 있겠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약간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계 될 겁니다. 반대로 누구나가 상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은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는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칠판을 바라보던 시야가 흐려지면서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도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드는 경우 말입니다. 잠이 들지 않아도 모르던 사이에 종잡을 수 없는 생각에 빠져 넋을 잃고 있다가 선생님의 분필 공격을 자주 받아본 학생이라면 그런 경험에서 무언가 가슴 벅차는 감정을 어슴프레나마 알고 있지 않을까요?(결코 분필로 맞았기 때문에 가슴이 벅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음,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그러나 정작 상상력을 훈련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건 거북이에게 덤블링을 가르친다는 말만큼이나 막연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에는 지지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동기나 근거를 가진 상상력도 그 동기나 근거에 의해 지탱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가장 효과적으로 확실한 방법을 통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일상적인 생활에 긍정적인 상상력을 접목시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설정을 세워봅시다. 당신은 이따금씩 쇼핑을 나가거나 하면 집 주변에 신장개업한 가게나 지금껏 들러보지 못한 음식점을 직접 찾아, 확률상의 내기를 걸어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맛이 좋다면 내기는 성공이고, 그렇지 않다면 처참한 실패가 되겠죠. 하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미식가이자 일생 전체를 담은 음식점 기행문을 작성하는 낭만적인 사람인 나는 이런 식으로 세계의 유명도시나 숨겨진 오지까지, 나만의 순례를 해나가는 거야. 순례의 길은 쉽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과 실패가 등 뒤를 따라다니지만, 그런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돼. 순백의 성벽을 따라 바다내음에 잠긴 항구 도시에 들른 뒤에는, 영롱한 푸른 빛으로 우거진 수풀을 지나고 길가로 늘어선 산수유 나무들을 볼 수 있어. 그리고 그 너머에 닿으면 아주 훌륭한 맛을 감상하게 될 거야.'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당신은 평소에는 불필요한 물건들을 단순한 소유욕 때문에 사버리는 것에는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가지고 싶어했던 것들을 보게 되면 가슴이 들뜬 소녀처럼 며칠동안 끙끙거리며 망설이게 되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럴 때, 가끔씩 당신에게는 이런 상상력과 마음가짐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회색, 아니, 달빛의 프릴이 달릴 드레스. 왜 그게 그렇게 가지고 싶어지는 걸까? 나한테는 어울리지도 않고, 또 그렇게 비싼데. 하지만 이런 부분이 있을지 몰라.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동안의 '인색한' 나라는 연기를 해오면서 자신 내부에 지독하게 쌓여온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야. 나 자신을 완전히 바꾸거나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 게 아냐. 다만 어떤 부분은 칭찬하고, 어떤 부분은 용서하고 싶은 거야.'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내가 가진 취미는 여러가지가 있고 그 중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껄쩍지근한 것들도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좋아했던 것은 산보입니다. 나처럼 젊은 사람 입에서 '산보'나 '조깅' 같은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종종 나를 쳐다보곤 하지만, 그들을 힘들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산보는 '공유'가 필요없는 취미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충분히 즐겁운 취미입니다. 누군가가 걸음을 재촉하지도 않고, 어떤 목적지와 경로를 미리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보를 하다가 주변의 많은 사람과 사물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산보는 그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이 총집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곳에서 할일 없이 어슬렁 거리고 있는 수염난 20대 청년이 다름 아닌 '나'라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야.'라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사물 들의 틈에 끼어서, 평소에는 자각하기 힘들었던 나 자신의 유일무이함이나 자유로움. 단지 걸음을 옮기는 행위 속에서 나 자신의 주체가 나라는 걸 체감하게 되는 것. 물론 산보의 마지막은 언제나 심부름이나 군것질로 마무리지어지기 마련입니다.
으음, 마지막 모습은 왠지 아름답지 못해,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그런 면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다시 한 번 멋스러움을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약간의 상상력이면 가능합니다. 현실도피가 아닙니다.(그럴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의 여성 K씨가 '아버지 같은 취미군요.'라고 말해서 나를 상처입혔습니다. 뭐, 그런 걸로 상처입을 내가 아니지만 가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장발 미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남자는 없습니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파더콤일지도 모르는 겁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산보를 즐기는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르죠. 흑흑.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면,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어'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나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거기에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무언가를 하기위해서는 적절한 결단력과 즐길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상력만 있으면 인간은 침묵 속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 편지는 꽤나 긍정적인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과학 문제나 아닌 다음에야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다음 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까지 감기 조심하시고, 고민과 즐거움을 모두 즐기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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