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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24 01:41:02 |
Name |
아랑 |
Subject |
[소설] 그녀의 향기 |
또각, 또각, 또가닥 또가다닥.
또각, 또그닥, 또가닥 또각.
그녀가 걷고 있습니다.
밤길이라 위험한데, 엄청 높은 구두를 신고 경쾌하게 걷고 있습니다.
햇빛을 받으면서 걷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그렇지만 달빛을 받으며 걷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자들에겐 더욱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전. 위험하잖아요.
강도도 변태도 치한도 많고.. 어두우면 또 무섭기도 하고요.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래서 전 그녀를 따라갑니다. 지금도 그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비잉 둘러쳐진 담장을 따라서, 경쾌하게.
아래 깔린 보도블럭이 낡아 삐거덕거리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발랄하게.
높은 구두를 신었으면서도 무척이나 잘 걷고 있는 씩씩한 그녀이지만
역시 걱정이 되거든요.
씩씩한 남자로서, 전 그녀를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요. 헤헷.
...아, 몰래 따라가는 거 아니냐구요?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만. 스토킹이라던가, 미행이라던가 하는 건 정말 아니라구요.
그녀도 알고 있어요, 제가 따라오고 있을 거란 걸.
...그래도 이상하게 쳐다보나요, 날?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래요, 뭐.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그녀를 따라가고 있는 건 내 의지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의지이기도 하다구요.
그녀가 얼마나 건방진 여자인지 아세요? 아마, 모르실 거에요.
글쎄, 자기가 내 엄마랍니다.
내 이름을 부를 때도 꼭 혀를 쯧쯧 차면서, 아기 다루듯 해요. 아무리 내가 연하라지만 그녀는 무례합니다.
정말, 난 어린애가 아닌데 말이에요.
...그런 그녀지만,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그녀의 향기를 느끼며 따라가는 전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녀가 쓰는 비누 냄새, 샴푸 냄새, 옷에 밴 포근한 내음. 모든 것이 그녀의 향기입니다.
햇빛 안에서도, 달빛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향기. 그것은 곧 그녀의 존재입니다.
아직 그 향기를 아는 이가 저밖에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무척 향기롭습니다.
건강하고 밝고, 그래서 예쁜 그녀니까.. 당연히 향기로울 수밖에 없겠지만요.
......어라?
.........어, 어라, 어라라..?
어떡하죠, 난 몰라. 당신이 책임지십시오!
그녀의 향기를 놓쳐버렸습니다!!
밤에 그녀를 따라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그녀가 사는 곳은 도심의 한 아파트 단지, 주변 환경이 결코 깨끗하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곳이랍니다.
잠시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쌩, 하고 지나가는 자동차 바람에 그녀의 향기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요,
조금만 뒤처지면 훅, 하고 올라오는 역한 하수구 내음에 그녀의 향기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요.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그녀를 따라가는데,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느라 다 망쳐 버렸습니다! 책임지세요!
내가 그녀를 놓치면 누가 그녀를 지킨답니까?
...에, 설마 당신도 그녀를 쫓아가고 있나요?
어. 안되는데. 워이, 워이. 저리 가십시오.
그녀를 지키는 건 제 일이라구요!
"쫑이야!"
어! 그녀입니다!
"야! 쫑이! 너 이리 안 와?"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군요. 하긴, 지금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요.
어.. 우와앗, 그녀가 저에게 다가오더니.. 절 껴안아 주었습니다-.
"어이구, 쫑이. 우리 쫑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런 줄도 모르지, 요건."
아앗, 또 아기 취급이네. ...그래도 예쁘니까 봐줄까요?
"너 또 내가 반찬 사러 나올 때, 몰래 따라 나올거니? 응?"
후훗, 이럴 때면 꼬리라도 한 번 흔들어 줍시다. 그러면 그녀가 좋아하니까요. 화가 났었어도 금방 풀고 예쁘게 웃어 줄 겁니다, 아마도요.
"에구, 요거 봐. 애교 부리네. ...그래, 또 따라나오지 말어, 정말. 애완견이 보디가드라도 되려고 그러는 거야, 설마?"
히, 그래도 따라나올 거 알면서 이럽니다.
내가 따라나오면 좋아할 거면서.
"그럼 집에 갈까, 쫑이. 달리자~ 집에 가자~ 엄마랑 집에 가자~"
그래요, 뭐. 아기 취급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함께 달리는 건 정말 즐거우니까. 용서해 줄께요.
...잠시나마 향기를 놓쳐서 미안했어요.
내일은 안 놓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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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고무된 상태로 글을 올려봅니다.
바로 아래에 있는 lovehis님의 글을 읽고.. pgr에 쓰려고 준비해뒀던 글을 올리려 했지만
감기 때문에 먹은 약이 제 기운을 발휘하고 있어서인지..=_= 도저히 마무리를 못 하겠더군요.
지난번 Bar sur님의 소설을 읽으며 기분이 괜시리 좋아졌었습니다. 스타와는 관련 없는 글이었지만 충분히 읽는 재미가 있었고, 쓰신 분의 정성이 느껴지는 좋은 글이었거든요. 게다가 아래에 달린 다른 분들의 코멘트들이 이곳 pgr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새삼 느껴지게 했었고요.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어, 예전에 써 놓았던 글을 간단히 수정해 올립니다.
지난번 올라왔던 글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분위기이며 분량도 짧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동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르는(<-필자의 한계-_-;) 글입니다만, 새벽 웹서핑중 심심하신 분들이나 게임 중 디스 걸려 기분 꿀꿀하신 분들께(..비유가 너무 잔인할까요^^;;)는 읽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걸어 봅니다.
ps 0. 닉네임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저는 Lunnette이에요. 아이디 그대로인 닉네임이 웬지 싫어져서 ㅡㅜ
ps 1. 중간 정도까지 쓰다가 말았는데.. 다음에 올리려고 준비하는 글은 모 선수 응원글입니다. 마무리를 잘 해야 pgr에 올리기에 부끄럼이 줄 텐데..
ps 2. 여러분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ㅜ_ㅜ 봄 변덕이 심한 것 같네요.
ps 3. 강아지 이름이 낯이 익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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