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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3/22 14:04:00
Name TheEnd
Subject [잡담] 안 그러면 안 되니까...
저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인생의 좌우명은 '현재를 살자'라는 것이지만,
그에 맞추어 살고 있지 못하지요.

오히려 현재에서 늘, 지난 과거의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하고는 합니다.
왜 그랬을까, 왜 좀 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멀쩡히 대학을 다니다가 작년, 1년을 휴학하고 편입을 준비했습니다.
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완전히 전공을 바꾸어 국문학과 편입을 준비했죠.

소위 네임 밸류를 따지자면 원래 다니고 있던 학교가 더 높았습니다.
취직이나 진학을 하기에도 더 나았구요.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막무가내로 학교를 휴학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편입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주위에서는 오히려 기뻐하더군요.
저도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올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죠.


오히려 힘이 든 건, 학교로 돌아온 후였습니다.
새로 만난 룸메이트는 제일 먼저 전공이 뭐냐고 묻더군요.
공대 다닌다는 녀석의 책장에 한국문학사, 문학이론입문, 소설책과 시집... 이런 것들만 꽂혀 있으니까요.

전공수업에 들어가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강의실을 이동하고 시간이 남으면 소설을 꺼내 읽곤 하지요.
비는 시간 틈틈이 문학관련 서적들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며 다시 대학원에 도전해볼까 합니다.


두려움은 있습니다.

공대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이고,
운이 좋아 국문학쪽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더라도,
어이없게 공대에서 껴들어 온 이방인이 되겠죠.



어제 OSL 결승의 여운이 남아있는 오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MSL 패자 4강, 강민과 이윤열의 유보트에서의 2차전을 보았습니다.

경기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강민 선수의 본진이 이윤열 선수의 탱크/벌쳐 드랍으로 밀리는 순간
이 경기를 어떻게 잡았지, 하며 의아해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GG를 생각할 그 순간에
강민 선수는 이윤열 선수의 본진에 드라군을 드랍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위험하고 불안하게 할까요.
11시 멀티에는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윤열 선수에게는 드랍쉽이 있고.
그 순간에 이윤열 선수가 강민 선수의 본진을 밀던 탱크를 싣고 11시 멀티로 갈까
조마조마하더군요.

그러나 이윤열 선수는 드랍쉽을 자신의 본진/앞마당으로 돌렸고
결국 거기서 경기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강민 선수,
50분의 사투 끝에 이윤열 선수의 GG를 받아냈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지난 1년이 그저 나의 조금은 값비싼 취미를 지키기 위해 그저 흘려버렸던 시간이 아닐까.
모두가 자신의 길을 착실히 닦아나가던 그 시간에,
나만 홀로 떨어져서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새 길을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MSL에서 벌어졌던 강민 선수와 김현진 선수의 경기.
역시 본진이 밀리는 상황에서 회심의 다크드랍으로 GG를 받아냈던 그 경기 후,
i_random님이 올려주신 그림 후기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
선수들이 정말 멋있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할 때 입니다.

" 왜 그렇게 위험하게 했니? "

물을 때

" 안 그러면 못이기니까요 "

김현진 선수와의 엔터더드래곤의 대결에서 역시 강민 선수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




  
왜 그랬었냐고, 왜 남들이 가는 대로 가지 못했냐고, 여전히 왜 편안한 길을 버리고 위험한 길을 가고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 내 자신에게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하게 하니?"
"안 그러면 안 되니까."


기억이라는 건 지난 시간의 아픔을 가볍게 만들어버리고 그저 흘려버린 순간으로 퇴색시켜 버리지만
한 때는 그 순간이 나의 현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현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안 그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이 길을 가니까.

열심히 현재를 살아내고 나면,
언젠가는 GG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렵니다.













더하기 하나. 경기 상황이 정확히 맞는지... 요즘 기억력이... -_-;;

더하기 둘.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강민 선수의 팬입니다.
늘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그, 그리고 모든 프로게이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더하기 셋. 주절주절 제 이야기를 늘어놓고 보니, 민망하기도 하고.
국문학과를 지망한다고 글을 잘 쓰는 건 아닙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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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s elbow
04/03/22 14:19
수정 아이콘
단지 제 생각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관심분야가 취미생활일 경우(가령 theend님 같은 경우는 국문학이겠죠) 참 즐겁습니다만, 그것이 직업이 되고 전문분야가 되면 어렵고 힘든 일도 많이 생길 것이라 봅니다. 님이 공대라고 해서 문학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지칠 때 또 일이 꼬일 때 문학책도 읽고 글도 써봄으로 더 즐거운 생활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요.
04/03/22 14:33
수정 아이콘
People's elbow // 님의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고 거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구요, 단순히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국문학의 분야를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기억의 습작...
04/03/22 14:41
수정 아이콘
글...잘 읽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때 이과를 선택했다가 문과로 전향하여 경영을 전공했지만,
요즈음 다시금 회의를 느낍니다..이 글을 읽으니 저도 용기가 나는군요..
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려 합니다..수능이라는 놈과의 결투에 건투를~^^;
GunSeal[cn]
04/03/22 14:57
수정 아이콘
글 잘읽었습니다.
아쉬움과 불확실성에 대해 걱정이 많으신 듯 하네요...(아니라면 죄송)
전 공대 기계공학 전공에 지금 대학원 석사 1년차인데요.
저 역시 흥미없던 공대학문에 이정도까지 (저 나름대로는 몇년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진로라 -_-;;;)
발을 담그게 될줄 몰랐지만 해보고 또 해볼수록 매력도 있답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공대를 전공으로 하되 국문학과 접목을 시켜볼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면 꿈과 현실 양쪽의 토끼를 다 잡아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감수하구요...^^;
선택에 대한 후회없는 노력과 맺음 있길 바랍니다.
아방가르드
04/03/22 15:17
수정 아이콘
딴소리 같긴 하지만 공학도 정말 매력적인 학문인데 안타깝네요.
후회없는 선택과 좋은 결말이 기다리길 바랍니다.
Jeff_Hardy
04/03/22 16:24
수정 아이콘
전 고등학교때 문과를 다녔지만 대학은 이공계열로 왔습니다. 아직 새내기라서 그런진 몰라도 죽을 맛입니다. 수학, 물리가 싫어서 문과를 지망했었는데 대학와서 하는게 그넘의 수학, 물리 (and 화학)..... 특히 수학은 수2를 안배웠다보니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그냥 넘어가구요... 아.. 후회가 자주 되는 3월한달입니다.
GunSeal[cn]
04/03/22 17:05
수정 아이콘
Jeff_Hardy님/ 공대수업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건 사실입니다.
그건 고등학교때 이과였든 문과였든 구분없이 상당히 피곤하고 머리아프죠...^^
새내기라면요...조급히 생각지 마시고 마음껏 노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공학도를 걸으실거라면 군대갔다와서 혹은 2학년부터는 정말 열심히 해야하고
아마 웬만하면 의지가 생길겁니다...그리고 해볼만 하지요.
전 군대갔다와서 복학할때 sin,cos함수가 뭔지도 까먹어서 해멨지만...
하나하나씩 알아가고 공학 역시 암기가 아닌 상식 수준의 이해입니다.
자신이 공대라는 것은 2학년때부터 생각하셔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1학년때는 대학문화(?)를 적응하고 마음껏 만끽하는게 최곱니다.
즐거운 새내기생활 하세요 ㅠ.ㅠ * 100
프리지아
04/03/23 01:00
수정 아이콘
갑자기 고스트 바둑왕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길을 멀리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공대생활 열심히 하시고 대학원에서는 원하는 국문 공부를 마음껏 하시길 바랍니다....저두 지금 교대를 다니지만^^ 사회학이나 심리학 쪽을 더 좋아해서 대학원에서는 그 쪽을 전공할 생각입니다.....모두 힘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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