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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21 00:41:05 |
Name |
고스트스테이 |
Subject |
[펌]권위주의와 나 |
여기 올려두 될까요? 글 정말 잘쓰셔서 퍼온 것입니다.
이 글의 필자에 대한 잠깐 소개하자면
작년까지 메가스터디(온라인강의사이트)에 계신 이범 강사 입니다.
2월9일"무료강의"를 선언 하시면서 메가스터디와의 결별을 선언하셨죠.
(메가스터디와의 결별은 그 이전입니다만)
최근 EBS수능강의와 모기관의 강사로 활동예정중이시고
직접 출판사를 설립하셔서 자신이 직접쓴 책을 출판할 예정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글의 이해에 도움이 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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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와 나
트라우마(trauma) :【병리】 외상(外傷); 외상성 장애(traumatism); 【정신의학】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
나는 적성이 이과인지 문과인지 불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문과 이과로 나눠놓는 교육과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고등학교 때 진로를 구분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7차교육과정이 되면서 문과 이과 구분이 없어졌다고들 하지만 실질적인 구분은 오히려 더 심해진 셈이다.) 과학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할 때 나는 '여기 붙으면 자동으로 이과고, 떨어지면 일반 고등학교 진학해서 문과로 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험에 합격했고, 나는 경기과학고 3기로 입학하였다.
그때는 과학고 초기였기 때문에 서울에는 과학고가 없었고(서울과학고는 내가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 생겼다), 전국에 다 합쳐 과학고가 네 군데 밖에 없었다. 1~2기 선배들은 모두 경기도 출신이었지만 3기부터는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지역 전체에서 경기과학고로 진학하였고 합격자의 70%가 서울 출신이었다. 한 학년은 불과 60명, 1개 학급당 30명씩 두 학급으로 단촐하게 이뤄져 있었다.
중학교 때 줄곧 전교 1등을 해오던 나로서는 과학고에서의 경험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완전히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일단 학습량과 진도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진도 쫓아가기에 바빴고, 늘 앞서가는 진도를 보며 절망했다. 그런데 일부 머리좋은 친구들은 기타를 치면서 물리 참고서를 읽거나 벌러덩 누워서 수학 정석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땀 뻘뻘 흘리며 진도 쫓아가기 바빴던 나보다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대학 미적분학(Calculus) 책을 영어로 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종합영어의 장문 독해를 줄줄 외우는 놈도 있었다. 판소리와 국악만 듣는 놈에서부터 헤비메탈 광팬, 클래식 광팬, 피아노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는 놈까지 취향이나 특기도 다양했다.
열심히 학교 생활에 적응하며 진도를 따라가고 있던 1학년 중반에, 교장이 조회 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음 설립된 과기대(KAIST 학부과정)에 조기진학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더니 학부형들을 포섭하여 과기대로 조기진학하는 분위기로 몰고가기 시작하였다. 과기대로 단체 견학을 가고, 담임도 학생 하나하나를 면담하며 진로를 과기대로 할 것을 종용하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학 당시에 배포된 규정에는 (나는 그 서류를 아직도 가지고있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이공계 진학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과학고생이 이공계열로 지원하면 내신성적 산출시 특례가 적용되어 거의 전원이 내신 1등급이었다.) 나는 두 누나가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서울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과기대라니.
견학 가서 보게 된 개교직후 과기대의 썰렁한 모습은 나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나의 목표는 서울대다. 과기대는 절대로 안 간다... 그런데 몇 차례 면담을 거듭하던 담임이 놀랍게도 나에게 '전학'을 가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교장의 방침이라는 것이다. 전원 과기대로 진학하라는 교장의 입장은 나의 계획과 정면 충돌했다. 나는 입학시의 규정을 무시한 처사에 대해 항의했지만, 담임은 완벽한 통제력을 가진 교장의 권위에 맞서는 대신 나에게 전학 갈 것을 더욱 강하게 닥달해대는 길을 택했다.
학교 안에서 나는 '反과기대 세력의 구심점'으로 찍히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학부모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날이 갈수록 이상해졌다. 일각에서는 교장이 전원 과기대 조기진학을 업적으로 삼아 차기 총선에서 여당의 공천을 받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타협이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SOS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당시 결혼생활에 위기를 겪고 있었던 우리 부모님은 자기 앞가림에 바빠 나의 구조신호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동아일보사에 보낼 투서를 써놓고 늘 품안에 가지고 다녔다. 나는 절대 고독의 공간에 놓여있었고,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줄기차게 소설책을 읽어댔다. 성적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60명 중에서 8등을 하기도 했던 성적이 점점 떨어지더니 58등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한 친구가 Dire Straits의 음악을 권했고, 나는 Mark Knopfler의 목소리로 "Why Worry"를 들으며 멍든 마음속을 달랬다. 아마 수천번은 들었을 것이다.
기숙사 앞 등나무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나는 수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내 일생에 이정도 최악의 상황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나 자신에게 굳센 의지로 이겨낼 것을 주문한 것이었지만, 이 경험은 내 마음에 영원한 트라우마를 남기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끝났다. 이 상태가 만 1년 정도 지속된 2학년때인 1986년 8월 8일, 교장이 교장실로 날 불렀다. 그러더니 거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너는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는 한심한 놈이니 그냥 너 하고싶은대로 해라' 라고 말했다. 교장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나는 씩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 * *
권위적 권력관계가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너무도 철저하게 경험한 나는, 결국 지금 가장 카리스마 없는 강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가장 카리스마적인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가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는 맨몸으로라도 대항하라고 스스로에게 부추긴다. 대학신문사에서는 결국 선배에게 뺨맞고서 사표를 던졌고, 대학원 다닐 때에는 아버지 후배이던 서울대 연구처장과 맞서기도 했고, 메가스터디에서는 회의 시간에 손선생과 고성을 지르며 여러차례 싸워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공교육을 긍정하지 못한다. 나는 사교육이 공교육을 절대 대신할 수 없고 또 대신하려 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공교육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왕따현상과 교실붕괴를 자초해왔고 권위적 권력관계를 해체할 준비를 하지 못하는 공교육계가 '스스로' 바뀔 것이라고는 도저히 기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하기 위해 나름대로 중요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 초점을 '교육비 절감과 기회 균등'에 둘 뿐이고 '공교육 살리기'에 두지 못한다. (어차피 공교육계의 외부에 있는 나로서는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제한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또하나 위 경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얍삽한 현실적응능력'이다. 나는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 이외의 기간에는 최대한 부드럽고 얍삽하게 현실에 적응한다. 불리한 상황에서의 대결이 어떠한 상처를 주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학원계에서 나의 처신은 흔히 '외유내강'이라고 평가되었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외유내강이 아니라, '일상적인 얍삽함과 임계점에서의 돌변'인 것이다.
혹시 나에게 영웅적 면모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제발 그 기대를 접어주기 바란다. 나는 일상적으로 얍삽하게 사는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어릴적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고, 앞으로도 이 교훈에 충실하게 살 것이다. 최근 극적인 '돌변'의 상황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이 나를 영웅 취급하고 있으나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내가 학원계에서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꽤 많은 돈을 벌어놓았기 때문이고, 용감히 맞선 것은 내가 지지 않을만한 여러가지 자원을 확보해놓았다는 계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나름의 '선의'적 의도를 가지고 돌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가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기반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으며, 내가 그 기반을 확보하는 과정은 얍삽함 그 자체였다.
2004년 2월 11일
이 범
www.LeeBum.net
※ P.S. 위 글에서 고등학교 때 나에게 Dire Straits의 음악을 들려주며 위로한 이는 KAIST 물리학과 교수 김영재이다. 그는 2002년 12월 포항공대에 세미나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는 조진만선생과 함께 내가 '친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단 두명의 인물 중 하나였다. 조진만 선생은 2001년 9월 사망하였다. 나는 지지리도 친구복이 없는 놈이다. 이 자리를 빌어 두 친구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조진만은 제발 꿈에 나타나서 나에게 코치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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