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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18 23:55:06 |
Name |
iamdongsoo |
Subject |
지독히 공부 안했던 혹은 못했던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
국민학교 1학년 때
생업(이걸 밝히면, 최근 논쟁이 일었던 것처럼 상관없는 딴지가 들어올 가망성이 있어서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감)에 바쁘신 부모님 때문에 한글을 다 못 깨우치고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유치원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했습니다. '상'이라는 글자가 가운데 박힌 꽃도장 딱지 100개를 반에서 8번째로 완성해내는 기적을 연출해냈답니다. 그러니까 대충... 한글도 모르던 학생이 8등을 한 것이지요.
그 당시, 구멍가게 주인에게 늘 “외상할께요”라는 말을 하시는 어머니를 봐왔기에, “외상”이라고 말하면 뭐든지 그냥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툭하면 “외상”이라고 말을 하고는 먹고 싶은 과자를 들고 나왔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한테 무진장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았지요. “외상”이라는 것도 많이 하면 안 되는구나....
국민학교 2학년 때
1학기 첫 번째 월정고사를 마치고 서울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역시 변두리에서 변두리 산동네로의 이사였지요. 부모님과 함께 담임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담임선생님이 제가 이번 월정고사에서 12등을 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저 등수에도 무척 뿌듯해하셨습니다.
새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무서운 남자선생님이셨습니다. 게다가 교실이 반지하(지상 4층, 반지하 1층)에 있어서, 대낮에도 형광등 켜놓고 수업해야할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장대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어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칠흑같이 어두웠던 어느 날, 두 녀석이 각각 날카로운 책받침(칼 대용)과 예리한 연필(창 대용)을 들고 싸우다가, 담임선생님한테 들켜서 정말 신나게 얻어터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엄청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인정사정없는 구타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 두 녀석은 정말 저렇게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답니다. 만약 선생님이 발견 안했다면, 두 녀석 중 한 녀석은 불구가 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성적? 기억 안 납니다. 역시, 전학 징크스/콤플렉스를 그대로 겪었습니다. 아마 하위권이었을 겁니다. 수우미양가 중에서 '미'가 절대 다수를 차지했었으니까요.
국민학교 3학년 때
생업에 바쁘신 부모님을 뒤로하고, 집 앞 골목길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정말 신나게 놀아 제꼈습니다. 공부와 숙제란 것을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성적은 당연히 바닥이었겠지요. 하루는 맨 뒷자리에 앉아 수업시간 내내 “다음부터는 숙제를 꼭 해오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장을 300번 정도 썼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때 친구들하고 전쟁놀이를 많이 했는데, 거기에 끼기 위해선 플라스틱 장난감 칼이 있어야 했습니다. 한 동안은 칼이 없어서 저희 형제(4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음)는 거기에 끼어서 놀지 못했었지요. 어머니한테 울고불고 졸라서 장난감 칼(일명 이순신 플라스틱 칼: 빨간 칼집, 하얀 검 날, 연두색 손잡이) 하나를 겨우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 명인데 칼은 하나였지요. 할 수 없이 제가 칼을, 동생이 칼집을 들고 싸웠습니다. 동생은 지금도 종종 말합니다. 그때 칼을 든 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냐고..
그 때 우리 학년은 총 25반까지 있었습니다. 한 반의 학생 수는 대략 80명 정도였답니다. 한마디로 콩나물교실이었던 게지요. 교실 수가 부족하여 지하실에까지 교실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실 수가 부족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교체되는 오전/오후반 수업을 진행했었지요. 오후반이었을 때, 조금 일찍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다가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었지만, 그것 보다는 골목에서 빈둥빈둥 거리고 놀다가 오후반 수업 시간에 맞춰서 부리나케 뛰어간 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학교에 거의 도착해서야 어머니가 부엌에서 신고 다니시는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왔다는 걸 알았지요. 참 난감했었습니다. 당돌, 그 날 왕놀림감이 되었지요.
부모님이 생업 현장으로 나가신 이후, 혼자 집에 있다가 등교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빠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월정고사라는 이름으로 매달 시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험 범위만 신나게 적고, 공부는 전혀 안했지요. 부모님은 제가 그렇게까지 시험을 많이 보는 줄 모르셨습니다. 부모님께도 말 안하고 신나게 놀았던 것이지요. 아쉽게도 시험 전날은 놀 친구가 없어서 4살 어린 동생하고만 놀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월정고사 정보를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입수하시는 중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시험 언제 보냐고 물어오셨지만, 부모님께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저는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지요. 시험 본다고 하면 당연히 부모님은 공부를 강제로 시킬 것이기에 그게 두려워서(?) 말 안하는 거지요. 여하튼 그날, 거짓말한 죄로 정말 신나게 맞았습니다. 또 그러면, 앞으로 50대씩 맞기로 하고 아버지께선 용서를 해주셨지요. 그 약속으로 벽에 큼지막하게 “50”이라는 숫자를 적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두 번 정도 50대씩 맞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진 항상 플라스틱 빗자루로, 아무 말씀 없이, 있는 힘껏, 쉬지 않고, 50대씩 내 엉덩이를 타작하셨습니다. 중간에 너무 아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싹싹 빌었지만 소용없었지요. 내 엉덩이가 내 엉덩이가 아니었습니다.
저희 반에는 정OO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도 부자고, 잘생기고, 공부도 잘했지요. 한마디로 저와는 계급 자체가 다른 아이였지요. 어느 날, 월정고사 1교시 시험을 보고 있는데, 그 애가 음식물을 토하고는 조퇴를 해버렸습니다. 친구가 토하면서 쓰러졌는데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그날 담임선생님한테 굉장히 혼났지요. 저희는 혼나면서도 왜 혼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시험 시간에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납니까? 여하튼 저는 그냥 실실거리며 혼자 웃고 있었습니다. “아~ 그 녀석이 이번에는 나보다 공부를 못하게 됐구나! 시험 못 봤으니 그 녀석은 꼴등이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녀석은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특별히 혼자 재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우등상을 타버렸지요.
그 다음 번 월정고사. 역시나 시험 본다고 부모님한테 말씀을 안 드렸지요. 물론, 시험공부도 안했습니다. 시험 보러 학교를 가는데, 이건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거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제가 미쳤나 봅니다. 갑자기 학교 앞 문방구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곤 학생들이 시험 끝나고 나올 때까지 문방구 앞에서 혼자 놀았지요. 문방구 아저씨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대충 오후반 학생이려니하고 짐작하신 것 같았습니다. 여하튼 내 일생 일대 최고의 범죄를 저지른 날이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범한 죄인으로서, 그 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아주~ 아주~ 조금 공부라는 것을 했답니다. 정OO처럼 저도 그 다음 날 재시험을 치룰 것이라는 예상으로 말이지요. 제가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어머니께선 굉장히 대견해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쪽지시험 본다고 해서 하는 거라고 둘러댔지요.
그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몇몇 친구들이 왜 학교 안 왔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냥 대충 대충 둘러댔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임선생님은 끝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내가 시험 안 본 줄 모르셨나 봅니다. 한 가지 더, 저는 4학년 때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제가 개근한 걸로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4학년 내내 묻혀진 존재였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우리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이야기 할 때 항상 기가 죽어계셨습니다. 다들... 우리 아들/딸은 반장이네, 전교 부회장이네, 1등 했네, 2등 했네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랑하실 게 없으셨던 것이지요. 특히 우리 부모님의 생업(?)상 굉장히 난감하셨을 겁니다.
그 때 저희는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부모님은 제가 눈이 좋지 않은 게, 어릴 때 지하에서 생활해서 그런 거라고 믿고 계십니다.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국민학교 1학년인 동생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동생과 동갑인 집주인 아들이 자기 집이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대문을 안 열어줬던 것이지요. 1학년짜리 집주인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저희에겐 피눈물 나도록 서러운 사건이었습니다.
2학기 중간고사 때, 드디어 기적이 한 번 일어났습니다. 전 과목에서 제가 단 7개만 틀린 것이지요. 공부를 조금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서 개수를 세어보니, 선생님께서 하나를 잘못 계산하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번에 시험 잘 본 것을 선생님한테 다시 한번 각인 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당당히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사실을 말씀드리고 정정을 받았지요. 역시 제 예상대로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번에 시험을 아주 잘 봤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결국 8개 틀린 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았지요. 그렇지만 그 때 시험 문제가 유난히 쉬웠나 봅니다. 점수 인플레이션이 심해도 너무 심했어요. 하위권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중위권이었던 같습니다. 주위 친한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저보다 많이 틀린 친구는 단 2명뿐이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이제는 드디어 머리가 컸나봅니다. 드디어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지요. 물론 시험 볼 때 만 얼렁뚱땅으로 말입니다. 성적은 조금 나아진 듯 했어요. “미”는 거의 사라지고 “우”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중위권이었을 거예요.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시험 끝나면 항상 학생들 등수를 말씀해주셨습니다. 80명 중에서 10등까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명단이 매번 비슷했습니다. 한 번은 시험 끝나고 선생님이 정답 불러주는 것에 따라 가채점을 하고 보니까, 앞자리에 앉아있는 친구 녀석보다 제 점수가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저는 흥분했지요. 그 녀석은 10등 정도를 넘어서서 매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거든요. 그래서 무척 기대했답니다. 와아~ 드디어 내 이름도 불려지겠군!
일주일 뒤에 역시나 담임선생님은 학생들 석차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1등이고, 누가 2등이고, 그 다음은 누구고... 이렇게 쭉 10등까지 말씀해주시는데... 그 친구 이름은 역시나 들어있는데,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1981년은 사라져갔습니다.
그로부터 23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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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나이에, 한국에서 한 것도 부족해 먼 타국까지 날아와서 죽어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안한 공부를 보충이라도 하듯이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의 마수에서 언제쯤이나 헤어날 수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답니다. 지금 하는 꼴을 보니... 아마 평생 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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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치열하면서도 열악했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기를 보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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