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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16 22:58:37 |
Name |
언뜻 유재석 |
Subject |
[잡담]봄이 왔으므로... |
어느새 우리 대화에 님 자가 빠져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라고 시작한 인사가 하이요로 바뀌고 ‘요‘ 자 까지 빼고도 ㅇㅇ/ 란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근데 한번도 본적은 없다. 무슨일로 인해서인지 몰라도 우리 길채가 상당히 유명해지자 여기저기서 뜨내기 손님들이 많아졌다. 프로게이머가 탄생해서 그런가...
공방 50% 가까스로 유지하면서 길드 최하수 딱지를 갖고 있던 나는 자연 길드에 대한 정이 떨어져 갔다. 타 길드와의 매치에서도, 심지어 길원끼리의 대결에서 조차 내가 옵할 공간은 남아 있지않았다. 내성적인 내 성격이 한 몫했다는걸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 채널 지킴이가 되갔고,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짜르지도 못하고 있던 동생들은 인사담당이라며 형도 이제 할 일 생겼다고 채널 관리나 하라고 한다. 군말없이 안녕하세요를 빈번하게 날리고 간단한 질문에 대답도 해주며 승환이 녀석은 이제 잘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 백번씩 되뇌이고 있다. 게임은 하루에 2~3게임 정도.. 물론 반타작이면 성공이다.
SaythatAgain... 그녀의 아이디. 무슨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각각 짤라 놓면 알겠는데 붙여놓으니 이건 영 쉽지가 않다. 또 한번 그렇게 말해 정도로 해석하면 되나.. 복잡하다. 복잡한건 미루고 ... 어느날부터 채널 출입이 매우 잦아졌다. 꼭 드라마가 끝나는 11시경 어김없이 들어와서 말 한마디 없이 안녕하세요 만 남기고 눈팅만하다 1시쯤되서 나간다. 게임도 안한다. 말도 안하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프로필을 보니 sex난에 F 라고 적은거 이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다. ‘여자인가..’ 우리는 여자가 용인된다. 남자애들이 승환이 이름만 보고 들어올려고 하면 우리 길드 각종 고수들의 테스트가 연이어진다. 난 매너 심사 담당이고. 그런애들이 여자라면 관대하다. 4명... 현재 우리길드의 여성회원수다. 그녀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아이디를 눈여겨 본 아이들이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질문공세....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켜만 보던 나도 몇번 말을 나눴고. 아이들보다 상당히 누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 보다도 나이가 많으니...스물 다섯이라..전적은 처참했다. 16승 67패 2디스.... 그냥 심심할 때 들어와 공방팀플 하는정도라고 한다. 종족은 프로토스.... 음... 나랑 같기는 하다. 승환이가 테란으로 마구 성공가도를 달리자 우리애들도 테란으로 많이들 전향 했다. 나랑 같이 프로토스를 하던 우리길드 막내도 저그좀 이겨보겠다고 테란으로 옮기고 우리길드에 프로토스라고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애들이 프로토스전 연습하고 싶어도 할 사람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해대도 난 할 말이 없었다. 신규 회원신청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테란인걸 보면 확실히 테란이 좋기는 하나보다. 아! 그녀... 프로토스란 말에 애들이 나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인철이형이 코치하면 되겠네..”
“팀플해요~~“ 여성우대 길드답게 팀플로 환영한다. 서로 그녀를 데리고 갈려고 난리다. 근데 어영부영 내 편이 되었다. 팀플은 부담없이 하는 성격이라 항상 Random을 고른다. 젠장...테란이 나와버리다니.. 작정하고 메카닉을 시도했다. 어차피 재미로 하는것이니까..같은편인 현규가 그녀를 잘 지켜 주나보다. ‘나 이제 곧 나간다 기다려’ 배럭을 들고... 벌쳐들이 냅다 달렸다. 그렇게 싫어하는 벌쳔데 뽑기도 많이 뽑았다. 한창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때 미니맵에 보이는 내 본진에 빨간 표시가 보인다.
‘빈집이구나!!’
달리던 벌쳐의 한 뭉텅이를 뚝 떼어내서 내 본진에 어택땅을 찍고 나머지는 이미 쑥대밭이 된 그녀의 본진을 구하러 갔다.
‘ 못된 녀석들 차라리 나한테 오지..’
근데 이상하다... 분명히 본진에 벌쳐를 보냈는데 소식이 없다. 계속 공격당한다는 메시지는 뜨는데 내 본진에 있는 벌쳐가 공격을 안하는 것 이 아닌가. 이미 게임은 많이 기울었다. 애처롭게 서플을 두들기는 저 2마리의 흰색 질럿... 그녀다... 바보.....
바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같은편 구분도 못하는건가...그녀의 두 마리 질럿이 아니더라도 이미 내 본진은 3색의 다양한 유닛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지만 내 눈에는 유독 그 2마리 흰 질럿 만이 보였다. 진짜 초보구나... 16승은 어떻게 한건지... 한숨이 나온다.
“수고요”
“수고 하셨습니다.”
“제 본진 공격하시면 어떻해요...ㅠ ㅠ ”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해서요..열심히는 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나이와 실력이 공개되자 아이들은 이미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여성우대라고 해도 어느정도 해야되지는 않겠느냐는 게 이놈들의 여론...
그 날 이후 그녀의 출입시간에 변화가 생겼다. 11시에 들어오는건 변함이 없는데 나가는 시간이 한시간 늦춰졌다는거. 2시라면 대부분 고등학생 중학생인 요놈들이 다 자러 가고 많아봐야 3~4명 남는 시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그녀의 프로필...직접쓴 친필이 아닌데도 무지하게 정성들여 쓴 것 같았다.
“프로토스 초보입니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초보인건 아는구나..’ 낮에 어딘가에서 하는지 몰라도 전적도 점점 늘어 갔다. 물론 승 하나 올리면 패 4~5개 올라가는 정도지만.
많이 친해졌다. 2시까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얘기도 많이 하게되고. 또 내가 프로토스를 하는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많이 알려달라고는 하는데 알려줄게 없다. 그냥 팀플의 기본적인 빌드만 알려줄뿐..
그렇게 세이님은 세이누나가 되었고 세이누나는 그냥 누나가 되었다. 친구추가하는 것도 알려주고, 귓말 보내는 법도 알려주고, 패스트 드라군 빌드도 알려주고 쓰리게이트도 알려줬다. 그녀의 첫 인사처럼 항상 열심히는 할려고 하는게 보였다.
돈 벌면 미용실 차릴거란다. 지금은 머리 감겨주는 스텝이지만 나중에 돈 많이많이 벌어 꼭 미용실을 차리는게 꿈이란다. 꿈.... 내꿈은 뭐지..삼수해서 대학 들어오기는 했지만 1학기 다니고 곧 휴학.. 이제 봄이 오면 입대. 그럼 제대후에는? 막막하다. 갑자기 기분이 팍 가라앉는다. “누나 술 사줘!”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그래..”
무슨 생각이었을까..나나 그녀나...
그녀는 바쁘다..아침10시에 나가 밤10시에 일이 끝난다고 한다. 왜 피곤한 몸으로 스타를 하냐고 했더니 그냥 재밌어 보여서라고 한다... “재미...” 잊고 지냈다.
나도 재밌어서 시작한 게임. 언제부터 승부에 이렇게 목숨을 걸었는지.. 괜히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쌍욕을 해대고 애꿎은 키보드는 왜 그렇게 “쾅쾅!!” 쳐댔는지...잊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가 알려준거 같다.
“1:1은 해봤어?”
“아니...1:1 할 정도는 아니잖아..”
“솔직히 팀플 할 정도도 아니야..;;”
“.....”
“기본적으로 팀플이랑 같애 첨엔 질럿 뽑다가 유리하면 드라군 뽑으면 되고 더 유리하면 리버든 템플러든 뽑으면 되... ”
그녀랑 1:1 한번 해보려고 이 멘트를 얼마나 날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의 굳은 결심은 절대 1:1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3일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픈가’
4일째 되던날도 보이지 않던 그녀는 내가 막 자리를 펴고 누우려고 할때 들어와 귓말을 보내왔다.
“인철아 술 한잔 할래?”
난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다. 3년을 사귀었다한다. 3년...참 징하네..요즘세상에 3년이면 부부라고 해도 될터인데. 헤어졌단다. 군에간 남자친구를 제대할때까지 정성으로 기다리고 이러다 결혼 하는줄 알았단다. 이렇게 순진한 아가씨가 있을줄이야... 4년전 100일정도 만나다 헤어진 숙현이라는 친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 유일한 연애였을지라도 나도 그렇게 순진하진 않다. 과연 지금 우리나이에 만나서 결혼까지 갈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난 항상 그런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불 필요한 연애보다는 결혼할 사람과 뜨거운 사랑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이 여자 너무 서럽게 보인다. 스스로 소주 2잔이 치사량이라고 말하던 그녀가 이미 한병을 다 비워간다. 뭔가를 얘기 해주고 싶은데 지금 얘기해봤자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냅두자....’ 미용실도 그만두고 이제 뭐할려고 살려는지... 길가다 채이는게 남잔데 뭘 그리 슬퍼하는지, 엄마가 잔 소리 하듯 마구 뭐라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의식상태는 어떤것도 받아들일수 있을거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정신을 되살렸다. 집에는 데려다 줘야 할거 같아서...단어로만 말하는걸 알아듣고 그녀의 자취방을 찾아냈다. 그녀를 눕히고 양말과 겉옷을 벗기고 이불과 베게를 찾아내 덮어 주었다. 긴머리가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방 한구석에 컴퓨터가 보였다. ‘이걸로 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앉아 버렸다. 게임방 가면 늘 하는 마우스 체크부터 해봤다.
‘음.. 이런 마우스를 쓰니 실력이 늘지 않는게 당연하지. 때도 하나도 안 뺐네.’
스타를 열고 베틀넷에 접속하려니 그녀의 아이디가 보였다. 무심코 친 그녀의 전화번호 뒷자리가 비밀 번호일줄이야... 100패는 이미 넘은지 오래고 승은 30승을 겨우 넘긴 상태..닥치는대로 공방에 들어갔다. 난 아직 죽지 않았음을 7연승으로 증명해냈다.
아침 동틀 무렵 난 집에 오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울렁이는 마음이 느껴진다. 뭔가에 홀린 듯 다시 그녀의 방으로 갔다.
내가..... 내가..... 지켜주고 싶어진다. 그래야 할거 같다.
3월이 왔다.
잠이 오질 않아 노트를 꺼내 편지를 쓰고 있다.
첫사랑 숙현이에게...
잘 지내고 있겠지? 뭐 잊어먹었다 그러면 대 실망이야. 난 너랑 헤어지고 4년을 사랑을 믿지 않고 살았다. 니가 아직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서 였는진 몰라도...이제 널 대신한 여자를 만난 것 같다. 이 글 볼일도 없겠지만.. 허락을 받고 싶어 이렇게 글로 대신한다.
나 이제 사랑을 믿을거다.
“이거 마우스야.. 잘 해봐.. 나 100일 휴가 나올때까지 50% 달성할수 있겠어?”
“하하 애들이 도와준다고 했어 걱정마”
“일 열심히 하고 건강해 그리고....................”
“걱정마 임마~~ 누나가 누구냐~ 누나가 기다리는거 선수야 건강해.. 알았지?”
“네 이병 최!인!철! 몸 건강히 잘 다녀 오겠습니다.!!”
3월이 왔다.
내 가슴에도 너의 가슴에도...
세상의 모든 젊은이 3월이 왔으므로 봄이 왔으므로 사랑하라!
*뒷말: 필자 자신은 아직도 한 겨울...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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