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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11/28 23:21:19
Name elecviva
Subject 내 할머니 이야기
1.

할머니는 허리가 굽으셨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그러시더라.

"정말 한 순간에 확 굽으셨다.'

정말로 굽고 굽어서
똑바로 펴시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그 허리로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셨으며
나와 형과 동생, 아버지와 어머니의 공간을 책임지셨다.

집이 넓어지고
세상이 좋아지고
시간이 흐르더라도

항상 우리 가족을 돌보셨다.

2.

할머니는 매일 손주들의 밥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우리 형은 자주 반찬투정을 부렸다.
밥을 먹다가도 "에이, 정말!"이라며
마주 앉은 할머니 얼굴을 외면한 채로 밥상을 떠나던 날이 많았다.

할머니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그런 형이 얄미워 내가 다 먹곤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가 복스럽게 먹는다고 참 좋아하셨다.
형을 보다가도 나를 바라보며 칭찬을 하셨다.

그 탓에 나는 살이 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유년시절에 형은 나를 자주 때렸다.
맞다보면 눈물이 났고 화가 났지만 대들지는 못했다.
대들면 또 맞을테니까,
대든다고 무엇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다 보면 또 배가 고팠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형한테 한 대만 맞아도 배가 고파졌다.
'스트레스성 폭식'이었지만 그런 명칭은 커녕 내가 왜 많이 먹는지조차 아무도 몰랐다.
먹고 또 먹고 나는 살이 쪘다.
많이 먹는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건 사춘기를 넘어서였다.
그 전까지 내가 뚱뚱한 것은 원래 뚱뚱한 탓이지, 많이 먹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날 키우셨다.
당신이 살아온 삶이 어려웠기 때문에 손자가 많이 먹을때면 행복해하셨다.

3.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건어물 가게에서 참치를 팔았는데 거기서 참치캔을 싸갖고 오셨다.
뚱뚱해지는 둘째가 걱정되셨는지 참치 좀 그만 먹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참 열심히도 몰래 갖고 오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굽은 허리로 몰래 참치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시면서도 별 말씀 못하셨을 거다.

정작, 자식에게 밥을 해 먹이는 건 할머니셨으니까.

나는 그 참치를 고추장과 김을 비벼 먹으면 그렇게도 좋아했다.
가끔은 내 몸을 이루는 단백질의 반은 참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4.

내 나이 5살 때는 분명히 비가 새는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살았고,
8살 때는 가까스로 12평 주공아파트에 여섯 식구가 살았고,
11살 때는 넓은 43평 아파트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고,
14살 때는 이층 집에서 유학을 떠난 형을 제외하고 다섯 식구가 살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역할은 같았다.
게다가 가족의 갈등은 자식들이 커감에 따라 더욱 첨예했다.


새로운 기능의 세탁기와 냉장고, TV.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세탁방법.
조금씩 달라야만 하는 반찬.
한글 쓰기보다 어려운 자식들의 요구.

환갑이 지난 할머니의 힘으로는 다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요구했다.
파출부 아주머니를 불렀지만 결국에는 할머니가 했으니까.

애써 힘들게 일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고,
무엇도 하지 말라고 화를 내도 할머니는 무시하셨다.

자신에게는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은 자식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해가 질때면 전화기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항상 애처로웠다.
여섯시 삼심분도 일곱시라고 우기시던 할머니의 말끝은 만약을 걱정하는 기우였다.

알아서 들어간다고,
알아서 한다고 말해도
평생을 고집스럽게 확인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싸웠다.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4.

머리가 커져서 서울로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자취를 하면서 가끔씩 고향집에 내려갔다.

그 사이에

칠순을 훌쩍 넘은 할머니는
염색을 혼자 하기에도,
몸이 작아져서 이젠 마실을 다니기도 어려워졌다.
기억력이 나빠지더니,
결국에는 치매가 나타났다.

마땅한 친구도 없으셨고
할머니에게 남은건 가족이었지만
할머니를 혼자 두기에는 위험해졌다.
그래서 부모님과 친척들은
할머니를 보호 시설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떠나보냈다.
가족이지만 함께 살지 않으니 떠나보낸 셈이다.

전적으로 할머니를 위한 일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5.

최근에 할머니의 고향인 안동에 있는 보호시설에서
우리 집이 있는 청주에서 가까운 내수에 거취를 옮기셨다.

그 사이에

건강도 많이 나아지셨고,
치매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그만큼 또 늙으셨다.

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뵈러 찾아갈 때면 나에게 꼬박꼬박 전화를 거신다.
그리고는 "우리 성택(실제 이름은 '승택'임)이는 장군감이라 장군절에 기도 드리러 가야한데이."하고 말씀하신다.
할머니와 가족들이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 찌푸릴 일이 사라졌다.
서로의 역할이 아니라 관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간다.

6.

2주 전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고운 얼굴, 평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시며
곧 군대로 떠날 손자가 걱정스러워 펑펑 우셨다.

아아, 그랬다.

외할머니는 나를 볼 때 마다 우시며,
"내가 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젠 할머니가 나를 보며 우신다.

항상 사랑하고 싶었지만
가끔은 그럴 수 없었고,

다른 가족들과 싸우실 때면
할머니가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나 역시 할머니와 싸워야 했고,

뒤늦게 철이 들어가면서
할머니만 행복하시면 된다고
꼭 건강하셔야 또 만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이제 할머니는
그 말을 똑똑히 새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7.

올 여름에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시게끔 해드렸다.
사이가 안 좋은 두 분일지라도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날이 왔기 때문이다.
친척들이 많은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두 분은 침묵을 지키셨다.

건강에 나쁜 짓은 다 하셨던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빨리 늙으셨고
어느 날 쓰러지셔서 입원도 하셨으며 이제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신다.
게다가 보청기를 끼시고도 말 한마디 알아듣는게 어렵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부모가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떨어져 지내는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떠나기 전, 홀 몸도 가누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안아드리며 아버지는 펑펑 우셨다.
결국 할아버지조차 눈물을 흘리셨다.

할아버지를 태운 작은 아버지의 차가 떠났고,
배웅이 끝나고 집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8.

1월이면 입대를 한다.
내 나이는 어느덧 25살이 된다.
세상에 나올 무렵이면 27살이 된다.

오직 걱정하는 것은
할머니께서 건강히 살아계시길 바랄 뿐이다.

몸이 점점 작아지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이젠 내가 운다.
갚지도 못할 은혜만 받고서 떠나시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주위에 가족들과 싸우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족의 품을 떠나보라고 충고한다.

서로의 역할이 아닌 관계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올 수 있는 힘이었음을 알게 될테니까.

사랑도, 미움도,
다 널 살게 했을거라고.

나처럼.

+
존칭표현은 일부러 엉망스럽게 뒤죽박죽으로 했습니다.
원래 잘하지도 못하지만요. 오해 말아주세요.

++
아, 가장 중요한 말을 잊었네요.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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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아포
06/11/28 23:35
수정 아이콘
추게로.
새벽오빠
06/11/28 23:36
수정 아이콘
가슴이 뭉클하네요
저도 어릴적부터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정말 효도해야합니다!
영화보며 우는일 없던 제가 '집으로'를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생각이 나서 상영시간내내 울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
06/11/28 23:36
수정 아이콘
감동. -_ㅜ

그나저나 늦은나이에 군대가시는데 추울때 가시네요.
아무쪼록 몸 건강히 제대하는것이 효도하는길 입니다.
06/11/29 00:10
수정 아이콘
저도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만... 너무나 당연한 것 처럼 할머니는 매일 저녁 혼자 밥을먹도 된다고 생각했고, 70이 넘은 나이에도 집안일을 혼자 도맞아 해도 된다고 생각한 제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글입네요... 할매 미안 ㅠㅠ
HI_TaMaMa
06/11/29 00:21
수정 아이콘
생각 없이 문득 글을 클릭 했다가 이 밤에 울고 말았습니다.
저희 할머니도 지금은 허리가 참 많이 굽으셨어요. 걸음도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짚고 쉬다가 걷다가 그렇게 다니세요. 손도 쉴 새 없이 떨려서 수저도 제대로 잡지 못하시는데 그 떨리는 손으로 이제 다 큰 손녀한테 꼬깃꼬깃 접힌 만원짜리 몇 장 용돈 쓰라 쥐어주시곤 해요.
어릴 적에 시골가면 잠자리도 잡아주시고, 감도 따주시고, 어쩌다 귀한 과일이라도 생기면 제일 먼저 챙겨주시곤 했는데요. 어릴 때부터 배앓이가 심해서 끙끙 앓고 있노라면 옆에 누워 밤새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나네요.
elecviva
06/11/29 00:26
수정 아이콘
저는 HI_TaMaMa님의 댓글을 보면서 울고 말았네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입니다.
정말 세상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건강하게만, 내 몸뚱아리 하나만 있어도 아껴주실 분입니다.

내가 화를 내도 나에게 먹으라 하시고,
손자나 자식들 앞에서는 자존심도 없는 분입니다.

내가 그런 분께 소리치고, 못난 짓을 했으니 가슴이 아파서 힘듭니다.

용돈이 몇푼이라도 생기시면, 이젠 머리가 커서 돈도 넉넉한데도 만원짜리를 꼭 제 호주머니에 억지로 넣으십니다.

괜시리 눈물만 납니다. 오늘은..
estrolls
06/11/29 00:31
수정 아이콘
친할아버님께서 중풍으로 몇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더랬습니다.
그게 벌써 10여년전 일이네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님 수발을 다했었더랬죠..
입대전날...제손을 잡고 아무 말씀도 못하셨지만 저를 바라보던
할아버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결국 입대후 몇달이 지나고..돌아가셨죠..참..슬펐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청주분이셨군요..반갑습니다.^^
박정우
06/11/29 00:52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저도 여든이 넘은 외할머니가 계신지라...
저랑 많이 비슷한것 같기도 하구요
군대 잘 다녀오시구요
저도 내일은 집에 전화라도..^^
06/11/29 01:07
수정 아이콘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엄마보다 할머니가 좋다고..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다고..
그렇게 되뇌이고 생각하며 당신의 품에서 자랐건만..
정작 커버려서는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고..
애기 태어나고.. 몇일 후에.. 증손녀 보시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랑하시던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올해 산소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내년에는 증손녀/손자 데리고 찾아뵈어야겠습니다..
elecviva 님.. 할머님께 효도하시구요..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난이겨낼수있
06/11/29 01:09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나네요...저는 아버지께서 수술을 받으시고 꼭 글쓴분 할머님처럼 행동하십니다..가슴이 아프네요....
군대 몸 건강히 다녀오셔서 건강하신 할머님 뵙고 인사하셨으면 합니다..
가족...어렵고도 쉽고 행복하고도 아픈...그런 관계같습니다..
아직도 사랑한단 말한마디 못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그래서 더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네요..
06/11/29 01:54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로그인하네요.

추게로~
찬양자
06/11/29 02:02
수정 아이콘
나는 너무 못난 손자입니다..ㅠ.ㅠ
정티쳐
06/11/29 09:14
수정 아이콘
내가 이럴줄 알고 안 읽을려구 했는데....아~쪽팔리게 애들보는데서 울었다..ㅠ.ㅠ
매트릭스
06/11/29 09:36
수정 아이콘
군대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돌아오실 때 더욱 건강해진 모습을 보면 할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여자예비역
06/11/29 10:07
수정 아이콘
추게로..
저희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살아계실때 제가 어찌나 모질고 못되게 굴었는지..
지금도 후회가 앞을 가립니다.. 살아계실때 미소한번이라도 더 보여주세요..ㅜ.ㅡ
06/11/29 10:34
수정 아이콘
체구는 작으셨지만 항상 목소리는 크셨던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네요. 저를 가장 예뻐라 해주시는데... 몇 년 전에 골다공증 판정을 받으시고는 이제 거동을 잘 못하시거든요. 염색도 하시고, 롯데리아 데리버거를 좋아하시던 할머니께서 이젠 염색도 못하시고 이가 없어서 햄버거는 드시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체구는 더 작아지셨네요. 명절 때 뵐 때마다 가슴이 아픈데 이 글 보면서 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번도 뵌 적 없는 외할아버지 제삿날이군요... 저는 못 가지만 엄마가 또 오늘 슬프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eternity..
06/11/29 11:22
수정 아이콘
추게로..
계산사
06/11/29 12:45
수정 아이콘
휴 글을 읽다가 혹시 마지막에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오는줄 알고 조마조마했네요...

저도 초등학교 6학년때 1년동안 외가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이 살은 적이 있어서 님과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군대 간 사이 할머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상병 휴가 나온 다음날 돌아가셨지요 장례식때 참 많이 울었던것 같아요

저희 외할머니도 한글을 잘 못쓰셨는데 꼬불꼬불한 글씨로 군대가서 몸건강히 다녀오라고 메모지에 써주신걸 아직도 지갑에 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언제 못보게 될지 모르는 분이니 항상 잘해드리시리라 믿네요

스물 다섯이면 군대를 늦게 가시네요 저는 01년에 23살때 입대했는데 전입가서 보니 내무반에 고참들이 한명만 동갑이고 다 저보다 어리더라구요 근데 제가 상병때 72년생 후임이 한명 들어왔어요 -_- 으하하

늦게 입대하면 힘든점이 많을텐데 군생활 잘하시길 빕니다
김우진
06/11/29 18:43
수정 아이콘
아놔 , ..........
정용욱
06/11/29 21:31
수정 아이콘
격정적인 마음으로 담담하게 글을 스신 elecviva님의 간결한 필력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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