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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06 14:57:09 |
Name |
intothestars |
Subject |
[잡담] 박찬호가 부활하길 바라며.. |
드디어 메이저리그도 시범경기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때보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재기를 꿈꾸는 코리언특급 박찬호, 드림선발의 5번째주자가 된 김병현, 팀내 왼손거포로 각광받는 최희섭, 이미 선발로 자리를 확고히 한 서재응, 선발진입을 노리는 봉중근,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는 김선우, 송승준 등이 리그개막을 기다리며 우리가 안보인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 박찬호 선수의 팬으로서 올해는 반드시 재기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의 스포츠사이트에서 찬호선수 관련기사를 봤습니다. 어느해보다 훈련량이 많고 현재 스프링캠프에서 보여주는 구위도 괜찮다고 평가가 나오면서 올해 초 5선발로 평가되던 그는 이제 2-3선발, 경우에 따라서는 케니 로저스를 제치고 1선발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물론 미국 언론쪽에서 나오는 얘기로 한국스포츠신문에서 나온얘기가 아니기에 그나마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됨) 하지만 그 밑에 네티즌 코멘트란을 보니 가슴아픈 얘기가 많더군요. 대략 이제 한국망신 그만시키고 귀국해라, 넌 해도 안된다, 먹튀야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머 요약하면 이정도입니다. 물론 격려하는 사람도 많지만 비난(비판이 아닌 비난입니다)하는 사람이 훨씬 많더군요.
물론 찬호선수, 장기계약후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건 사실입니다. 아마 다저스에서의 혹사이후 부상 휴유증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 이유로 우리 경제가 어려울때 서양 거구들을 삼진으로 쓰러트리며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찬호선수를 잊은겁니까?
찬호선수는 한양대 92학번입니다. 아시다시피 92학번에 유명한 야구 선수들이 많죠. 당시 투수 3인방이라 불리던 조성민,임선동,손경수가 있고 정민철, 박재홍도 같은 또래의 선수들입니다. 박찬호는 3인방에 비해 평가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때 이미 150km의 직구를 던졌으나 컨트롤이 좋지못했죠. 재밌는건 당시 빙그레(한화의 전신)이 고졸 지명으로 박찬호를 지명했습니다. 그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2천만원, 당시 고졸 최고는 이대진이 받은 3천만원이었지만 동기생인 3인방의 계약금으로 몇억이 나오는 시점에서 2천만원은 자존심이 상했던겁니다. 찬호측에서는 3천을 주면 계약한다고 했고 빙그레는 결국 계약포기합니다. 후에 연간 150억을 받는 선수를 단 1천만원때문에 놓친거죠^^
그냥 평범한 투수로 평가받던 찬호가 메이저리그 구단 눈에 뛴건 93년 버팔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때였습니다. 당시 그는 거기서 156짜리 직구를 던져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깜작 놀라게 했죠. 컨트롤은 부족하지만 그 정도 속도의 직구를 던지는건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하지 않으니까요. 가장 먼저 손을 뻗은쪽은 애틀란타입니다. 애틀란타는 계약금 20만불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93년에 한국에서 최고계약금은 이상훈이 받은 1억8천만원인데 그와 맞먹는 금액이었죠. 하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저스쪽에서 접촉을 시도합니다. LA에 연고를 둔 다저스 입장에선 많은 한인들을 끌어들일수 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찬호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애틀란타 이상의 계약금을 제시합니다. 결국 모두 다 아시다시피 1994년에 120만불에 메이저리그 직행이라는 보너스까지 받으며 다저스와 계약하게되면서 한국을 놀라게 합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정말 환상속의 무대였으니까요.
메이저리그 직행이었지만 바로 메이저리그에서 찬호선수가 적응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을것입니다. 결국 2경기정도 출전한 찬호는 바로 마이너리그 더블A로 내려가서 철저히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한 준비를 다시합니다. 컨트롤을 다듬고 투구폼을 교정하고 슬라이더 대신 커브를 익히게 됩니다.
1995년 노모가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일명 토네이도 열풍이 입니다.(이윤열의 토네이도가 아니라..ㅡ.ㅡ 노모의 폼이 토네이도 같다고 해서요..^^) 데뷔시즌에 올스타선발까지 한 노모는 결국 13승6패에 2점대 중반(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ㅡ.ㅡ)의 방어율, 그리고 탈삼진왕에 오르며 신인왕에 오릅니다. 당연히 같은 동양인 출신으로서 찬호선수가 비교되었고 많은 한국인들은 찬호선수도 노모만큼 해주길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노모가 누굽니까? 일본리그를 평정하고 이제 일본엔 볼일 없다면서 부와 명예를 다 던져버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투수 아닙니까?(노모의 미국 진출과정은 과거 선동열 선수의 일본진출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힘들게 건너온거죠) 그런 노모와 대학야구 경험이 전부인 찬호와 비교는 무리였죠.(나중에 결국 찬호가 노모를 넘어서긴합니다만..)
1996년 드디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됩니다. 2년간의 눈물젖은 햄버거는 이제 먹을일이 없어진거죠. 그리고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서 드디어 한국인 메이저리그 첫승을 올립니다. 선발 라몬 마르티네즈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2회에 마운드에 오른 그는 4이닝을 3안타 7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냈죠. 그리고 라몬을 대신해 임시 선발투수가 되어서 다음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 5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첫 선발승을 따내게 됩니다.
5승5패 3.64 118탈삼진, 이것이 풀타임 첫해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찬호가 이룬 수치입니다. 가능성을 보인 그는 97년 스프링캠프에서 결국 톰 캔티오티를 따돌리고 다저스의 5선발로서 시즌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찬호의 최고 무기는 역시 직구! 최고 160km까지 측정된 그의 묵직한 직구는 리그 최상급이였으며 그는 당시 최고의 프레임 쓰로어(flame thrower)였습니다. 거기에 낙차큰 커브까지 갖추며 그는 메이저리그 거구들과 맞섭니다.
전반기 실적은 5승5패 3점대 초반의 방어율, 방어율에 비해 승이 낮았던건 당시 고질적이던 허약한 다저스 타선때문이었죠. 실제로 전반기 내내 찬호는 선발로 나와 4점이상을 실점한 적이 없었고 5이닝 이하로 던진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찬호의 꾸준함은 시작된거죠. 그리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후기리그 개막전 선발을 맞습니다.
후기리그 개막전, 상대는 배리본즈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그는 거기서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오늘의 선수로 꼽힙니다. 그때부터 무서운 상승세를 보입니다. 슬로우 스타터로서 스타트가 시작된것입니다. 후반기에는 9승을 쌓으면서 14승 8패에 3.38 166탈삼진으로 선발투수로서의 첫해를 마칩니다. 특히 피안타율은 .213으로 페드로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합니다. 노모와 더불어 팀내 최다승이었으나 4점대 초반방어율의 노모에 비할대는 아니었습니다.
1998년, 다저스스타디움 개막전 선발을 맡은 그는 그 경기에서 승리하나 그후 수년간 그를 괴롭힌 허리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곤 작년엔 볼수 없었던 들쑥날쑥한 피칭을 하게 됩니다. 2년생 징크스인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보란듯이 일어섰고, 다른 선발들이 부상 부진으로 신음할때 홀로 끝까지 로테이션을 지키며 선발진을 이끌었습니다. 15승 9패 3.71 191탈삼진. 처음으로 15승을 넘으면서 미래의 다저스 에이스로 각광받습니다.
1998년 겨울 그는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합니다. 개막전과 결승전 선발을 맡은 그는 결국 조국에 금메달을 안기고 자신은 병역문제를 해결합니다. 그에게 날개가 달린것이죠. 그리고 1999년을 준비합니다. 당시 최대화두는 체인지업. 직구와 커브만으로 15승을 올린 그에게 체인지업만 장착된다면 20승에 사이영상까지 가능하다는 분석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많은 기대속에 맞은 1999년, 하지만 지난 겨울 아시안게임 출전에 따른 휴유증인지, 허리부상때문인지, 뜻모를 부진에 빠집니다. 158을 넘나들던 직구구속도 줄어들고 위력도 약해지면서 그는 한이닝에 한명의 타자에게 만루홈런을 두번허용하기도 하고 애너하임 선수에게 날아차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슬로스타터 답게 후반기에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 그는 결국 부진했음에도 13승을 올리며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13승11패 5.23가 최후 스코어
사이영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가 추락한 1999년. 찬호 역시 많은 생각을 했을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을 맞습니다. 지난해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약간의 불안한 모습도 보입니다. 전반기를 9승7패 4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마무리. 승은 많았으나 방어율이 높았죠. 그리고 후반기, 이제 무적의 찬호시대가 시작됩니다. 그의 직구는 1997년에 비할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90마일 중반에 묵직한 맛이 살아있었고, 그의 최고 무기가 된 커브가 완성되면서 그는 후기리그를 휩씁니다.(역시 슬로 스타터) 9승3패 2.23의 방어율은 당시 후기리그1위였습니다. 시즌 최종 스코어는 18승10패 3.27 217탈삼진 .214의 피안타율. 다승 5위, 방어율10위, 탈삼진 피안타율은 2위였습니다.(참고로 볼넷도 124개로 2위였죠.ㅡ.ㅡ) 동양인 최다승을 올렸고 사이영상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더구나 내후년이면 자유계약선수가 되기에 그의 성적은 더 돋보였습니다. 당시 찬호와 자주 비교되었던 마이크햄튼이 콜로라도와 8년간 1억3천만불에 계약하면서 찬호가 이것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미국언론에 보도되었고 일부에서는 투수최초 2000만불을 받을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2001년은 자유계약선수가 되기전의 마지막 시즌이기에 어느해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부상당한 몸으로 시즌끝까지 뛰었고 결국 장기계약을 이끌어내나 부상으로 계약후 2년간 부진하게 됩니다. 여튼 2001년 시즌 초반은 2000년 후반의 연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직구 구속이 조금씩 줄어들었으나 커브의 위력은 여전했고 그는 매게임을 6이닝 3실점 이하로 처리했습니다. 전반기 성적은 8승5패 2.80, 다승을 제외한 방어율, 피안타율, 탈삼진이 모두 리그 5위안에 들었고 선발로 뛴 19게임중 16게임을 퀄러티 스타드(그중 15게임 연속, 이건 내셔럴리그 타이기록)을 기록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슬로스타터였기에 이런 뛰어난 전반기 성적에 후반기 성적이 더해진다면 작년을 넘어서는 최고 시즌이 될거라고 모두 예상하게 됩니다.
그시점에서 미국언론에선 올해 FA 랭킹1위로 박찬호를 꼽습니다(당시 주요FA로는 배리본즈, 재이슨 지암비, 후안 곤잘레스, 존 스몰츠등이 있었고 메이저리그는 투수보다 타자 연봉이 많다는점에 기인하면 찬호의 랭킹1위는 대단한건죠) 그도 그럴것이 2000년 후반기와 2001년 전반기를 한 시즌으로 묶으면 찬호의 성적은 다승, 방어율, 탈삼진, 피안타율 등 모든 부분이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5위안에 들었으니까요. 거기다가 아직 20대의 나이이니 투수최고연봉은 당연한듯이 여겨졌고 과연 2000만불을 받느냐에 초점이 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허리부상악화와 전반기의 무리한 출장(그는 전반기 이닝수와 투구수가 리그3위권이었습니다..ㅡ.ㅡ)으로 인한 휴유증인지 무기력한 모습을 몇번 연출하고 다저스 코칭스테프와 의견충돌도 일으키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져갑니다. 무엇보다 당시 다저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시권에 있었으나 후반기 결국 애리조나에 덜미를 잡히게 되는데 이게 찬호부진때문이라고 LA언론이 난리치면서 그의 몸값은 떨어지고 결국 다저스와 결별하게 됩니다. 물론 찬호가 후반기에 부진했지만 그는 아픈몸을 이끌고 끝까지 로테이션을 지켰습니다. 부상으로 나가 떨어진 케빈 브라운, 대런 드라이포트, 앤디 애쉬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결국 싫은 소리는 다 듣게 되고.. 참으로 프로세계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15승11패 3.50 218 탈삼진, 역시 탈삼진과 피안타율은 3위권이었으나 후반기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 여기저기서 안좋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홈에서만 강하다, 부상이 있다, 에이스감이 아니다... 거기다 FA시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2000만불은 고사하고 투수최고연봉도 안된다는 평가가 나왔고 결국 우여곡절끝에 텍사스와 5년간 6500만불에 계약하게 됩니다(당시 이 계약도 언론에선 평가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부상으로 인해 2년간 부진에 빠지고 지금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경기외적으로 찬호선수는 순수합니다. 그는 미국으로 간 후 스켄들 한번 없이 오직 야구를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생각합니다. 그는 매년 불우이웃돕기 및 수재민 성금으로 몇억씩 기탁했습니다. 찬호 이름의 장학재단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노력파입니다. 마이너리그에서 눈물젖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올라왔습니다. 메이저리그 입성 그리고 정상급 선수가 된 이래로 찬호가 훈련게을리한다는 얘기는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스타가 된 후에도 훈련 전 운동장 20바퀴를 돌고 훈련을 시작했답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노력하는 선수가 왜 욕을 먹어야만 하는 겁니까... 더구나 올해는 재기를 위해 철지부심하고 있는 선수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너 안된다 이딴 소리나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영웅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지난 98월드컵때 차범근 선수가 그랬고 지금 박찬호 선수도 비슷한 처지입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것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고질적인 냄비 근성 때문인가요? 아님 스포츠신문에 놀아나서 그런건가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박찬호는 올해 다시 마운드에서 포효할것이라는겁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찬호선수의 재기를 믿어주세요
P.S : 카를로스 페레즈라는 선수를 아십니까? 2000년당시 다저스와 2년간 1500만불에 계약한 좌완 투수입니다. 즉 1년에 750만불인데 그가 2년간 거둔 승수는 11승(22패). 찬호가 97년부터 2000년까지 거둔 승수가 60승인데 그 4년간 그가 받은 연봉의 총 합이 682만불입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물론 찬호가 다저스에 있으면서 많은걸 배웠으나 그는 배운만큼 싼맛에 다저스에게 해준게 많다는거죠
P.S 2 : 제 기억에 의지해서 썼는데 틀린거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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