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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5/16 17:44:51 |
Name |
두번죽다 |
Subject |
아버지의 등 |
꼬마아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빠!"라고 대답할 겁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와 동생에게 아버지는 누구보다 크고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과 함께 작은 아버지 댁에서 결혼 앨범을 뒤적이다가 사진 속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구보다 큰 우리 아버지보다 큰 사람이 여럿있었습니다. 동생과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흔히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기대에 제가 많이 모자랐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들이 조금더 큰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를 바라셨는데, 그저 놀기 좋아하던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가 예사였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빗자루로 맞기도 많이 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저는 아버지의 매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왔을 때, 아버지께서 친구들을 앉혀놓고 저에게 하시던 그 말씀을 설교처럼 하실 때 저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께서는 살갑게 아들을 그리고 그 친구들을 맞아 주시지 못할까하는 생각에 아버지께 섭섭한 점이 많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매를 더이상 맞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꾸중과 잔소리는 그치지 않았지만, 한 번 하실 때마다 쎄게 하시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뿐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저는 참 문제가 많은 아들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친구들과 술도 많이 마셨고,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양주를 친구들과 함께 아작을 내기도 여러 번, 친구 집에서 외박을 하기는 예사였습니다.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참 어렸나 봅니다. 첫사랑의 아픔, 성적에 대한 고민, 많은 고민들을 친구들과 나누었기에 집은 저에게 잠을 자는 곳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처럼 부모님과 대화가 없던 시기가 또 있었나 싶습니다.
대학교를 오면서, 저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몸살 감기에 몹시 아팠던 어느 날, 우리 집이 그렇게 멀리 있다는 사실에 왠지 서러워 울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했던 집이 처음으로 그리워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친 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나눠 주던 날, 다른 훈련병과 마찬가지로 저도 어머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훈련소 규정상 편지를 받은 1주일 후에 태워버렸기에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편지지에 얼룩진 제 눈물 자국이 떠오릅니다. 몇 번을 다시 보았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된 훈련병에게 어떤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편지였습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이제는 군대로, 학교로 가서 조금은 쓸쓸한 집에서 혼자 빨래를 하시는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왠지 모른 웃음이 입가를 맴돌며 어머니께서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 전해졌습니다. 겨울철 휴가를 나왔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담그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속으로 무쟈게 웃었습니다. 여전히 아들들을 앉혀놓고 예의 그 항상 하시는 꿈을 크게 가져라는 설교를 하시는 아버지지만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아버지를 뵙는 순간, 제가 아버지께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교통 사고로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1달 정도 들었습니다. 제대하고 딱히 할 일이 없던 저가 그 동안 포항과 대구를 오가면서 힘들게 할어버지를 지켜주시던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들 대신해서 할어버지의 병상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큰 손자가 군대 제대하면 가족 모두가 경주로 여행을 다녀오자는 할아버지셨는데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손자가 군대 제대하기만을 기다리셨는지, 제 정성이 부족했는지 할아버지는 저와 1달 여를 병원에서 보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사촌 동생과 둘이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직접 맞이하면서 엄청 울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뒤늦게 찾아오신 아버지께서 눈물 젖은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괜찮다,"라고 말씀해주시던 그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여러 가지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겪으면서 아버지는 저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다가왔습니다. 목욕탕에서 조금은 꾸부중한 아버지의 등을 밀어주면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질때 눈 앞이 흐릿해지는 경험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저보다 작은, 누구보다 컸던 아버지를 볼 때, 왠지 모르게 죄송합니다. 그 후로 저와 부모님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바쁠 때는 이틀에 한 번은 꼭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전해드립니다. 요즘은 기나긴 짝사랑을 끝낸 동생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어머님과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고향에 내려가면 여전히 아버지께서는 이제는 외울 수 있는 말씀을 또 하시지만,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아버지, 제가 집을 나서기 전에는 항상 저를 꼭 안아주시고 "아들, 화이팅!"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아버지도 참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지금까지 컸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아들이 집에 갈 때마다 피곤하시다며 옆드려서 어깨와 종아리를 맡기시는 아버지께서는 별로 시원치 않을텐데 항상 "아이쿠, 시원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위해 집에 내려가지 전에는 항상 안마하는 법을 연구하는 아들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저와 동생이 고향으로 가는 날이 이제는 우리집 대청소하는 날입니다. 아직도 바쁘게 직장을 다니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아들들이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이게 다인가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눈물이 많습니다. 팔순이 가까우신 할머니께 치매 증상이 있어서 요즘 큰아버지 댁이나 작은 아버지 댁 할 것없이 온 집 안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아버지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어머니께 전화드리면서 아버지께서 혼자 방에서 우실 때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나서 저도 눈시울이 뻘게집니다. 할머니께 정성으로 효도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저 역시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취업 준비하는 아들에게 면접 전 날마다 전화를 하셔서 밥은 먹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물어보시지만, 정작 면접 얘기는 하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자식이 보고 싶어서, 걱정되어서 전화를 하셔도 하시고 싶은 말씀은 못하고 전화를 끊으시는 아버지입니다. 부모님 생각에 되서 전화를 자주 드리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말씀 한 번도 못 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아버지 아들인가 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P.S. 저녁 먹고 부모님께 전화 드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모님께 전화 한 통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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