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65편
법이 건드릴 수 없는 범죄들이 틀림없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어느 정도 정당화시켜 준다는 게 내 의견이다.
-아서 코난 도일, '찰스 오거스트 밀버튼Charles Augustus Milverton' 중에서.
#1
2005년 10월 8일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중스파이야. 어때, 이래도 서로를 믿을 수 있겠어? 둘 중 하나는 협회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선수들을 지키기 위한 미션을 수행중이야. 그러니 결국엔 둘 중 한 사람은 상대방을 쏴죽이게 되어 있어.
알겠어? 이중스파이라고!"
그때 나는 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나부터 요환이형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부터 그렇게 인정하면 안 된다...... 요환형에게 이중스파이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한 건 바로 나였어. 그런 내가 무의식적으로 요환형을 의심하다니.
형은 끝까지 나와 함께 가야 한다. 형에게 내 목숨을 맡겼으니까. 그게 우리의 계획이다.
#2
"알아보니 대체 누구더랍니꺼?"
"요환이 말과 딱히 다른 게 없어. 이쯤 되면 정말 요환이를 안 믿을 수도 없게 됐다. 다만 그 둘의 관계가 요환이가 말한 대로인지는 대체 알 수가 없지. 요환이가 그놈을 위해 우리를 끌어들여서 아작을 내려는 건지, 아니면 우리를 위해 그놈을 잡아다 주려는 건지."
"냉정하게 말해서 단 한 순간도 잡아다 주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심니더. 그 반대면 몰라도."
정석이 팔짱을 끼더니 예전에 강민이 흉기를 묻어두었던 마당 한구석을 괜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민이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고. 그런데 걘 계속 요환이한테 말리고 있어."
정석의 표정만으로는 그가 정 감독의 말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마치 캐리어에 탄 지휘관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는 곧 이런 선택이라도 할 것만 같다- 교착상황에 놓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어차피 그 둘 중 하나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임요환과 강민 중 하나는.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복수에의 갈망. 동수의 집에서 멍하니 핏자국을 내려다본 그 순간부터 그 그림자가 정석의 인생에 드리웠다. 형들이 원하는 것처럼, 나도 한 사람이 댓가를 치루길 간절히 원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겠다.
"상관없심니더. 어쨌건 우리가 죽일 거 아니었습니꺼?"
"정말로 민이 말처럼 요환이가 나서서 함정을 파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진호햄 사고 날 뻔하고 나서 그 둘 다 시껍한거지예. 누가 또 다칠까봐 발을 못 떼고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입시더."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그냥 대충 우리가 알아낸 사실만이라도 경찰에 알리면 덜 답답할 텐데. 요환이를 감싸주기 위해 이렇게 경찰에 입을 다문다는 게 너무 찜찜해."
"우리가 죄 없다고 믿는 사람 남들 앞에 발가벗겨 세우는 짓은 못합니더. 한번 누굴 믿었으면 뒤돌아보지 않는 게 남자 아입니꺼."
#3
"마음껏 나불대라. 네가 나한테 지금까지 협조해 왔다는 걸 그놈이 다 알게 되면 넌 무사하지 못할 테니 너도 날 붙잡고 그놈을 죽여 달라고 할 날이 올 거다. 판단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어때, 그놈을 죽이는 게 좋을까 안 좋을까?"
민이를 놓고 날 위협하다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잘 조심해 오더니 갑자기 전화에다 대고 부주의한 얘기라도 한 거냐 강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납작 엎드려 지내기로 했지 않았나.
어쨌든 민이가 나에게서 이미 모두 다 들었다는 건 이놈들도 아직 모른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죽이지 말라고 넙죽 대답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일 것이다.
"대체 뭐가 부족해? 넌 지금 당장 날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에 집어넣을 수도 있잖아. 내 지문 남아있는 흉기 두고 나간 거 벌써 잊어버렸어?"
요환은 큰소리를 치며 상대를 한번 떠보았다. 딱히 대꾸가 없는 걸 보니 그것도 역시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열쇠집 하는 용호 친구에게 부탁해서 현장 문 따고 들어간 것도, 가스관 안에 숨겨놓았던 흉기를 빼돌린 것도. 그렇다면 아직 내가 당신들에게 매인 몸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테지.
"오늘따라 잔말이 많은 걸 보니 빨리 죽고 싶나 보군."
"왜 꼭 매번 네가 나서야 되냐? 넌 동료도 없냐?"
그걸 물어보는 재치라니, 요환은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이거야. 민이와 내가 예상해둔 카드 중 하나가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에 모른척 떠볼 수가 있었다-
'A와 B끼리 모른다면, B로 하여금 A를 죽이게 만들 수가 있단 말야. 우리는 동수형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거지!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이.'
"'협회'도 바보는 아니다. 자기들이 일을 주는 업자들 간에 서로 절대 모르게 하는 게 원칙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더군. 안그러면 골치아파지거든...... 난 너랑 긴말 할 이유 없다. 날짜와 장소를 알려줄 테니 그놈 데리고 와."
너는 그를 모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도박은 시작되었다.
#4
선기자의 집에서 강민과 함께 신고전화를 했던 그 위험한 짓 때문에 또다른 감시자의 주목을 끌게 된 지 오래. 이 스산한 목소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는 기분나쁜 사실을 이렇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한강변에 있는 우리 아버지 별장 있잖아. 당신들이 나 감시하러 쫓아왔던 적도 있으니 어딘지 알겠지. 내가 강민을 태워서 거기로 데려갈 거야. 사방에 개미새 끼 한마리 없는 곳이라 적당할 거다."
"그냥 우리가 강민을 잡아오는 게 확실하고 좋을 걸."
우리? 저놈은 또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 건가? 누굴까?
"강민이 갑자기 실종되면 난리가 날 텐데 어떻게 할 셈이냐? 나랑 만나서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그림이 좋지."
"알았다. 그러면 지하실 같은 데 얌전히 묶어 놔."
얼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요환은 오히려 웃었다. 이 스산한 목소리는 물론 선욱이 아니다. 너는 그를 모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시끄러워, 남의 집안에 피 튀길 생각 마라. 마당에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쏘는 거야. 그 다음에 어디다 묻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날짜와 시간은?"
"당장 블리즈컨은 물론이고 당분간 일정이 너무 빡빡해. 11월 12일로 하자."
인규가 방에 막 들어온 모양이었다. 통화내용의 마지막 부분 정도는 그애가 들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 정도는 괜찮다 인규야, 내가 민이한테 약점 잡힌 거 아니냐며 주먹을 부르쥔 태민이한테만 입 다물어 주면 돼.
#5
"요환행님이 지금 그XX한테 전화해서 날 잡는다 안했나? 언젠지 문자 왔나?"
"상욱이 번호로 왔어, 역시 철저해. 블리즈컨 끝나고 11월 12일로 잡았다는데."
멀리 서 있는 정석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용호가 외쳤다. 착잡한 표정으로 강물을 내려다보던 정석이 용호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라믄 내 얼굴 보이나?"
"자알 보여. 요환형이 마당에 조명등 있단 말 안해서 몰랐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네. 집에 아무도 없는데 이걸 무슨 방법으로 끄지? 전기 배선에 손대면 되나?"
"치아라. 뽀사뿌자."
용호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정석은 큼직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내가 허리는 이래도 어깨는 손미나이 행님 못지않다!"
정확히 그리는 포물선까지는 볼 수 있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전구까지 깨져나가니 정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용호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보름달이 떠도 이 정도라면 코앞에 들이대도 누군지 모를 거야. 차 안에 들어가서 헤드라이트 켜볼께 기다려."
그리고 뒤돌아 뛰었다.
구석에서 들어갔다 빠졌다 하고 있는 정감독의 차가 눈에 띄었다. 정감독은 나름대로 현장답사 온 김에 차를 숨길 최적의 주차위치를 찾을 욕심이었겠지만, 30분째 그러고 있는 꼴은 영락없는 개그였다.
헤드라이트가 켜지자 빛을 정통으로 받은 정석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내 용호가 차문을 열고 나와 그를 불렀다.
"이렇게 라이트 켜면 범인과 민이형을 구별 못할 수가 있나. 형들은 얼굴을 완전히 가려서 속게 만들자는데 답답할 노릇이야. 쏜 다음에 벗기면 바로 들통날걸."
"벗겨 볼 사이도 없이 내빼게 만들면 될 거 아이가?"
정석은 운전대를 잡더니 후진해서 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차를 뺐다. 그것만으로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경적을 울리면서 큰 커브를 돌아 들어오자 마당 가운데 서 있던 용호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6
숙소 현관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리는 상욱을 요환이 얼른 낚아챘다.
왜 불렀냐고 굳이 묻지 않는 아이였다. 바람이 좋다는 둥 저녁은 맛있게 먹었냐는 둥 별 필요없는 말만 계속하는 요환의 얼굴을 대신 바라보았다.
"헉!"
그가 상욱의 얼굴에 갑자기 봉투를 덮어씌웠다.
상욱이 봉투를 손가락으로 간단히 밀쳐올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요환이 머리를 긁적였다.
"밑을 재빨리 묶을 수 있어야겠는데."
"이건 뭐 게임도 아니고."
"형이 꼭, 꼭 연습해야만 하는 게 있거든. 도와줘."
그 말을 하면서 요환이 기습적으로 또 덮어씌웠다. 이번엔 어설프진 않았지만 뭔가 한참 멀어 보였다. 상욱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재미 업ㅂ어."
"그, 그러면 너도 나한테 한번 씌워봐."
검은 봉투를 받아든 상욱은 그 안을 들여다봤다가 요환을 쳐다보기를 번갈아 하더니 결국 투덜거렸다.
"이거 너무 작어."
#7
최대한 돌리고 찔러 봐도 예상대로였다. 요환이 또다른 감시자를 대기시켜 놓고 '내가 데리고 오는 누군가를 쏘면 된다'고 얘기해 두었다는 사실을 선욱은 절대 모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지 어느 새 방에 들어온 인규가 통화내용을 듣는 것 따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난 집에 없어. 숙소에도 없어. 그러니까 어디서 만나냐면...... 케텝 숙소로 하자. KTF 밴이 항상 주차해 있는 자리, 알잖아, 골목 따라서 걸어 들어오면 거기 말야. 내가 차 몰고 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와. 별장까지 직접 데리고 가줄께. 민이는 따로 온다고 했어."
케텝 숙소 근처여야만 했다.
자신이 일단 그와 동승하고 나면, 별장에서 숨죽이고 기다릴 정감독과 강민에게는 연락을 취할 수 없다. 대신 정석과 용호가 뒤쫓아오면서 동태를 연락해주기로 해 놓았다.
그러려면 자신이 떠나는 것을 그들이 바로 캐치할 수 있는 장소에서 출발해야 했던 것이다.
"민이형 어디 가?"
"요환이형네 별장."
굳이 물어보는 용호나 대답하는 민이나, 도청장치에 잘 들리라는 듯이 크게 소리치고 있다. 아무튼 요환이 데리고 갈 사람이 강민이라는 확신을 깨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연기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정석으로부터 '숙소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지 않나 살펴보라'는 알쏭달쏭한 지시를 받은 민규와 재억이 밖에서 열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역시 지형지물을 이용해야 되는 건 게임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자.'
연습하는 척 사실 머릿속엔 딴 생각뿐이던 정석이 다리 건너 포진한 길섭의 탱크들을 보고 뇌까렸다.
요환이 약속한 장소는 주변에 가리는 것이 많아서 차에 강민이 타는지 누가 타는지 멀리선 지켜보기가 힘들 곳이었다. 사실 누가 굳이 지켜볼 것 같지도 않았지만 정석은 신중을 기하고 싶어했다.
용호는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연습실 자기 자리에 앉았다. 요환이 보낼 최후의 문자는 일단 정석에게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버로우도 안한 러커가 죽어나가는 동안 그는 정석 쪽만 곁눈질했다. 그때 분위기 파악 못하는 세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외출했던 진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민이형 방금 요환이형 전화받고 나가셨는데요? 현관에서 못 만나셨어요?"
세현의 대답을 듣자마자 진호가 총알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석과 용호가 거의 동시에 헤드셋을 벗더니 세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사실대로 얘기한 것 뿐인데 왜 맞았는지 영문을 모르는 세현을 뒤로 한 채 그들은 진호를 쫓아 나간다. 마침 그때 정석의 폰이 딩동 소리를 냈다.
미친듯이 강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나간 진호는 KTF밴 근처에 서 있는 익숙한 승용차를 보았다. 요환의 차- 그리고 조수석 문은 닫혔다.
진호는 출발하는 차를 쫓아 미친듯이 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정석과 용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진호는 뭔가 알아낸 듯 보여도 이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지금 강민은 정감독의 차에 탄 채 지름길을 달리고 있으리라. 요환이 태운 사람은 살인자이고, 강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차에 탄 사람은 내리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작가 코멘트
이게 문제의 한강변 총격사건의 진상입니다. 어떻게 계획되었는지가 자세히 나오죠. 예전에 살짝살짝 비쳤던 사실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때문에 앞의 내용을 잊어버리셨던 분들은 다 처음 보는 얘기같을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적어 둡니다.
#1(강민의 독백)은 51편 #2
#2는 53편 #3
#3는 54편 #1
#4는 56편 #2
#7는 58편 #2
에 나왔었던 내용에 각각 첨가된 것입니다.
이번 편 짤방은 예전에 온갖 악평을 들었다가("누가 임요환이냐?"등) 오랜만에 등장하는 합성물입니다.-_- 다음편은 일주일 후에.
※다음 편 예고
애당초 그런 상황으로 몰린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 7년 전에 나온 게임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 줄 하나 끊기면 망할 정도까지 이르게 된 방송사들, 한 명의 톱스타를 족쇄로 묶고서 그를 둘러싼 세계에 의지하면 자신들의 영토도 넓어지리라고 판단한 사람들. 그들이 실소도 모른 채 정당이란 단어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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