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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5/02 22:28:51 |
Name |
불한당 |
Subject |
자랑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 -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 |
1. 자랑스러움 -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 함경도 함흥이 고향이신 할아버지는 한국전쟁당시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셨고, 많은 전투에 참여하시다가 결국에는 오른쪽 엄지발가락 하나를 잃으셨다. 전쟁이 끝난후에도, 할아버지는 스스로 북파공작원에 지원하셔서 고된 훈련을 받으셨고, 휴전선 부근에서 여러 비밀임무를 수행하셨다. 그 덕분에, 지금 살고 계시는 속초에서는 그 당시에 지역 유지와 맞먹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그 당시 할아버지 주위에는 뇌물을 들고 뒤를 봐달라고 찾아오는 날파리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성품이 워낙 곧으신 분이라, 더러운 것들은 일체 받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말하길, 그 때 만약 돈이나 땅을 다 받았으면, 우리 가문은 속초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는 참 아쉬웠지만, 그래도 작은 집에서 조용히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 최근에야 북파공작원 이야기가 나와서 표면으로 드러났을 뿐이지, 할아버지는 전후 5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신다. 내가 물어보면, ' 그것은 나랏님과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어기는 것은 불충이다.' 라는 말을 하시기도 했었다. 요즘에 보상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요즘에는 입을 조금씩 여시고 계시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함이 아닌 손자인 나를 위함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 아버지는 518 광주혁명의 생존자이시다. 아버지는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셨고, 어찌어찌해서 그 사지에서 살아남으신, 아직도 제대로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518 혁명의 참상에 대한 목격자, 그리고 증언자이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계엄의 암울한 시대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으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시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87년 6월, 이 세상에 나온지 4개월도 채안된 나와 엄마를 아무 말없이 놔둔채, 6월민주항쟁에 참여하신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 설날이나 추석때 가면, 자주 볼수 있던 광경이 서로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충돌이었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많이 늙으신 관계로 충돌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진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멱살잡고 싸우는 모습도 봤고, 방의 모든 유리가 깨져있던 모습도 봤다. 그만큼 두 분다, 자신이 걸고 싸웠던 신념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옛날에는 무서워서 그냥 할머니품으로 달려가 울기만 했었는데, 지금 보면 두분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서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 두사람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애국자이시다.
2. 부끄러움 - 나의 모습은?
- 대학교 2학년, 서울의 모 대학 공대의 05학번인 나. 총알을 뚫고 살아나오신 할아버지의 모습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민주화를 외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로 유전되지 않았다. 획득인자는 유전되지 않는다는게 통설이긴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으면서도, 나의 모습은 두 사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나는 어쩔수없이 소시민이었다.
- 내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두 사람의 희생으로 인하여 내가 너무나도 많은 혜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 할아버지는 북파공작원, 아버지는 518 유공자, 아직은 확실하지도 않고, 이런 혜택이 중복수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과분한게 아닌가 싶다.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 콩고물을 얻어먹는 사람은 이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도, 단지 시끄러운게 싫어서, 움직이기가 귀찮아서 행동하지 않는. 소시민이다.
- 얼마전, 광화문 교보빌딩 옆에서, 등록금 문제, 그리고 교육재정 확충을 위하여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전부다 나와 같은 대학생이었을테다. 나도 등록금을 내려고, 과외를 수없이 뛰고, 그 틈에 알바도 하고 그래보았던 학생으로서,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공감이 가고,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모를 일이다. 구국이라던가, 민주화라는 거창한 것이 아닌, 교육제정 확충이라는 나와 가장 밀접한 사안에 대해서도, 나는 침묵하고 돌아서는데... 내가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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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WRITE 버튼이 생겼습니다만,
그동안 시험기간으로 인해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간간히 뻘리플, 욕먹어도 싸는 리플을 남기긴 했지만,
이렇게 '뻘글' 남기기는 처음이네요. 1ㅁ1;;;
Write 버튼 무거운 줄 모르고 이렇게 나서는 애송이에게
조금은 애정어린 비판도 가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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