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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4/25 05:38:15 |
Name |
말코비치 |
Subject |
한 순간도 김정민의 팬이 전혀 아니었던 사람이 본 김정민. |
정석테란, 귀족테란, '약한'테란 김정민... 그가 은퇴했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죄송하지만, 단 1초도 그의 팬인 적도 없고 그의 플레이를 좋아한 적도 없다. 김정민은 물론이고 크게 보아 김정민류라고 할 수 있는 서지훈, 이병민 등의 플레이도 좋아한 적이 전혀 없다.
김정민과 관련된 추억 하나
2001년 나는 고2였고, 본격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 빠져들었다. 매일같이 같은 반 친구들과 gameI와 배틀넷에서 게임을 즐기고 학교에서는 잠을 자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당시 우리들의 스타는 모두들 그렇듯,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었다. 나 역시 그의 팬이었고, 그를 따라 테란을 주종족으로 선택했다. 당시에는 테란을 하는 친구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이 프로토스 유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몽땅 임요환의 팬이었다.
그런데 내 친구 중에 특이한 놈이 한 놈 있었다. 그 녀석은 김정민의 팬이었다. 밑에 항즐이님의 글에 나온 것처럼 테테전이나 테프전에서는 btbtbt vvv ttt iii ooo만 찍어대는 녀석이었다. 아이디도 TheMarine만을 고집했다.
어느 날 그 녀석과 1:1을 붙었다. 고등학교 때는 1:1에서 지면 갈굼을 엄청 당하기에 나름대로 긴장하고 게임에 임했다. 나는 'boxer'로, 녀석은 'themarine'으로 조인했다.
내 친구는 투팩을 선택했고 나는 원팩 원스타를 선택했다. 녀석은 빠른 벌처 마인으로 나의 앞마당을 조이고 탱크와 터렛을 박기 시작했다. 나는 투탱크 드랍으로 본진 scv에 피해를 준 뒤 레이스를 모아 녀석의 본진을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섬에 몰래확장을 한 후 앞마당의 조이기라인을 뚫어 승리를 따냈다.
그 후에도 그 친구는 무조건 정석을 고집했다. 무조건 투팩 앞마당 조이기, 앞마당 이후 3만년 전진. 저그전에서는 무조건 투배럭 후 저그 입구 조이고 전진팩토리.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즐겼다. 모두들 임요환의 결승전에 열광해 있을 때 그는 김정민의 vod를 즐겼다.
김정민과 관련된 추억 둘
2003년, 대학에 들어오고 게임과 나는 잠시 멀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프로게임계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의 우상이던 임요환은 부진에 빠졌고, 나는 종족을 테란에서 프로토스로 바꿨다.
'귀족테란'이던 김정민은 이때 언제쯤인가부터 '약한테란'으로 변해 있었다. 센게임 MSL까지만 해도 3위를 차지하며 나름대로 강한 이미지를 유지했던 그는 이제 소위 '실리'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친구와 당골왕 MSL을 보러 갔었다. 마침 김정민과 이윤열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1경기 Into The Darkness에서 김정민은 초반 몰래 배럭스를 성공시켰다. 나는 상대에게 어느정도 피해를 준 그가 그 사이에 팩토리를 올려 공격을 하거나, 테크를 올려 드랍쉽 견제로 더 큰 피해를 주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테크도, 공격도 선택하지 않다가, 정확히 말하면 엉성하게 이것도 하려하고 저것도 하려다가, 이윤열의 끊임없는 게릴라에 아쉽게 1승을 내어줬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2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컴퓨터와 게임을 했다. 로템에서 1:2로 놓고 한 것으로 기억난다. 입구를 막고 팩토리를 올리고 벌처를 뽑았다. 이때 컴퓨터가 12 질롯러쉬를 감행했다. 김정민은 벌처를 이리저리 컨트롤 하고 마인을 박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컴퓨터에게 입구를 내어주고 팩토리를 장악당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2경기 루나에서 그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이윤열에게 승리를 내어준다.
당시의 스타는 이윤열이었고, 나도 이윤열을 보기 위해 그쪽으로 갔다. 수많은 팬들의 환호와 플래쉬를 받으며 가볍게 웃으며 퇴장하는 그의 모습 뒤에 김정민이 '몇몇' 팬들과 함께 있었다. 친구로 보이는 한 남자와 팬들로 추정되는 몇몇 여성들에 둘러쌓였던 그가 살짝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오늘도 또 졌네."
이윤열을 따라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간 세중게임월드에서 '몇몇' 팬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채, 그는 근처의 PC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정민과 관련된 추억 마지막
얼마 전 2005년 프로리그 그랜드파이널이 있었다. 입대하기 전에 게임 결승전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동생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언제부터인가 김정민은 팀리그의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개인전은 양대 PC방리거로 전락한지 오래였지만, 팀전에서 그는 확실한 1승 카드였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IBM 팀리그 승자결승에서 2승, 최종결승에서 2승을 따낸 것을 기억한다.
2004년 KTF가 KOR에게 패할 때, 그는 묵묵히 팀에게 1승을 앚겨주었다. KTF가 2005년 프로리그에서 23연승을 거뒀을 때, 모두들 강민을 기억했지만, 팀플레이에서 꾸준히 1~2승을 거둔 김정민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런 기억들을 가지고 그랜드파이널을 기다렸다. 아차. 김정민이 없다. 그는 이미 이병민이라는 실력있는 후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앉은 상태다.
T1쪽에 앉아 있어서 KTF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자리를 사실상 빼앗은 후배(어떻게 보면 '귀족테란'이라는 별명도 뺏아갔다.)이지만 이병민이 2경기씩이나 승리를 따냈을 때, 자신이 승리한 것마냥 기뻐하던 그 모습, 결국 6경기를 패하고 준우승에 머물렀을 때, '준우승의 사나이' 홍진호보다도 더욱 더 침울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7경기에 김정민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그냥 믿고 지나갔다.
모든 스타크래프트 팬들의 영원한 우상 임요환이 은퇴했다면 어땠을까? e-sports에서 있었던 여러 차례의 '감동적 상황들'을 돌이켜 봤을때, 김정민의 은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양은 정말 작다.
2003년 임요환이 챌린지리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 2004년 에버배에서 3연속 벙커링으로 결승에 진출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최연성이 엄청난 레이스로 이병민의 골리앗, 터렛을 짓밟았을 때 희열을 느꼈다. 그랜드파이널에서 준우승 꽃다발을 받으며 '10회 준우승'의 기록을 세운 홍진호의 모습에서 안습을 느꼈다.
김정민. 최연성의 무지막지한 레이스에 배틀 발키리가 격추된 것 이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경기도 없다. 그는 다만 나에게 일반 게이머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추억을 안겨 준 게이머일 뿐이다.
그런데 그를 생각하면 애뜻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항상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항상 패배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 바로 나의 삶이 떠올라서였을까?
그는 조용하게 그 누구보다도 팀에 높은 공헌을 했다. 다른 팀원들이 부진해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고, 심지어 혼자서 활약한 적도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홍진호, 박정석, 강민, 조용호와 같은 스타들에 가려 관심의 대상 밖이었다. 속으로는 우승의 꿈을 많이 꾸었다고 하지만 결국 꿈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 '1위'의 꿈을 꾸지만, 대개 늙어 죽을 때까지 꿈만 꾸다 끝난다. 노력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1위'로 선택되지 못한 인생들이다. 김정민이 하루에 16시간 연습했을 때, 그보다 뛰어난 선수들은 24시간을 연습할까? 우리의 입장에서 한없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진짜로 하루에 1, 2시간만 자고 남은 모든 시간을 자기계발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지만, 선택받은 소수만이 성공의 반열에 오른다.
은퇴한다니 갑자기 김정민에게 들어닥치는 관심도가 높아진 느낌이다. 나 역시 그에게 무관심했다. 화려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사람은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 올드 게이머의 은퇴를 아쉬워한다. 그를 잘 모르던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의 전성기를 찾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나마 그를 조금 알던 사람들은 나처럼 과거를 회상한다.
솔직히 나는 김정민 선수가 KTF에 입단한 시점에서 이미 전성기가 지나고, B급 선수에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최연성, 임요환과 같은 최고의 선수들보다 그에게 더 공명한다. 왜냐하면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결국에는 (한때 A급이었더라도) B급 인생을 살다가 끝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몇몇 S급 선수들의 노력, 몇몇 뛰어난 사람들 덕분에 e-sports가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덕택이 80~90%나 되는 양 여겨서는 안된다. 더 큰 몫은 김정민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B급 선수들, 그리고 스갤과 pgr에서 뻘글, 뻘플 한 개 달아주는 것 말고는 딱히 e-sports계에 공헌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는 일반 스타 팬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새삼스레 이 세상은 뛰어난 기업가, 정치가, 영웅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딱히 주의를 끌지는 못하지만 자기 영역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B급 인생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진리가 떠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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