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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4/15 06:14:30 |
Name |
Bar Sur |
Subject |
[픽션] 지금 우리는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다. |
신사숙녀 여러분,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 우리는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주를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Spiritualized의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아아, 여보세요? 들립니까? 실제로 여기는 우주입니다. 지구가 아주 깨끗하게 잘 보입니다. 지금 저는 히말라야 상공을 지나고 있습니다. 낭가파르바트도 여기에서는 보일지도 모릅니다. 과거 한때 누구에게도 정복된 바 없었던 낭가파르바트를 정복하기 위해 58년간 3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설산은 새하얗습니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습니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이 될 예정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구 어딘가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으셔야 합니다. 이게 마지막이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송의 존재나 시작과 마지막에 대한 것 따위를 알지 못할지라도, 당신들은 잘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다케다 신겐의 실제 사망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따위를 알지 못하더라도 영화 카게무샤를 보는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듯 말입니다.
자, 그런데 당신은 엄마가 되어버린 아빠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집을 나간지 3개월이나 지난, 크리스마스날 아침, 아빠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밖에 서있었던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습니다.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말투도, 사소한 행동들까지도 아빠는 엄마가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이 이야기가 웃지못할 비극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구를 보고 있으니, 그걸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야 말로 비극의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아빠가 엄마가 되기로 한 건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넜던 만큼이나 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혹은 그녀의 아들딸들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왜? 왜 그런 차림을 하고 있나요, 아빠? 왜 엄마가 되어버렸나요? 우리에겐 아빠가 필요한데.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필요한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왜? 어째서냐고만 물었지요. 하지만 다른 식으로 말해줄 사람도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아빠, 그 퍼머는 어울리지 않아요. 안그래도 각진 얼굴이 더 사각형으로 보이잖아요. 그리고 그 땡땡이 무늬의 스커프도 저리 치워요. 막되먹은 센스에요. 잡혀가도 할 말이 없어요. 조금만 신경쓰면 더 나아보일 거에요. 난요, 기왕이면 엄마가 된 아빠도 진짜 엄마처럼 예뻤으면 좋겠어요. 그 치마를 계속 입을 거면 날마다 다리털을 제모하는 것 정도는 잊지 말아주세요.
전 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의미가 없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엄마와 아빠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갑작스럽지만, 제가 지구에 있었을 때, 저는 한 여성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래요. 과거형으로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역시 잘 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 저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농담이나 거짓말이 되겠지요.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지구에서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아니면 정해진 필연이었을까요? 과연 그녀는 정말 그날 혼자 그곳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다케다 신겐은 1573년에 지병으로 죽었습니까?
여기에서 이렇게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고자 했던 소년소녀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중심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으며, 어디에든 있습니다. 당신들이 있는 그곳, 당신들이 사랑하고 있는 그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입니다. 실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곳엔 낮도 밤도 없지만, 낮과 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낮의 어둠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습니까만은, 이곳에서는 그것조차 가능합니다. 저는 낮의 어둠과 밤의 어둠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았습니다.
러브앤피스, 러브앤피스. 저는 우드스탁에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다름아닌 1969년의 그곳에 있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이 또한 저만의 우드스탁이 될 것 같습니다. 러브앤피스, 러브앤피스. 이제 곧 제가 타고 있는 이 이름없는 우주정거장은 지구를 향해 추락을 시작할 겁니다. 대기권에 돌입하며 붉은색 불덩이, 헬리오스의 태양마차처럼 불타오르겠지요. 당신은 아마 오늘 밤 벌거벗은 설산 위로 떨어지는 별동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한편의 좋은 꿈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했었습니다가 아니라 사랑합니다.
이건 농담도 거짓말도 아닙니다. 당신의 창백한 웃음과, 희미한 라벤더 향기와, 지적으로만 보였던 안경테, 얇은 입술이 그립습니다. 천천히 몸이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바닥 없는 늪으로 가라앉듯 서서히 중력이 느껴집니다. 낮의 어둠과 밤의 어둠 사이의 협곡을 지나서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만날 때는 서로 간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겠군요. 방송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들 안녕히.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덧 : 언제나처럼의 영양가없는 잡담 형식의 글입니다만, 달리 실재를 바탕에 둔 이야기가 아니니, 픽션이라고 말머리를 달았습니다. 시험공부를 한다고 밤을 새면서 맨유 경기까지 보았으니 제정신은 아니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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