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
2006/04/14 00:22:36 |
Name |
EndLEss_MAy |
Subject |
빙상영웅<4>-암울했던 시기의 강렬하고 짧았던 빛. 민룡 |
민룡
출생 : 1982년 7월 14일
직업 : 스케이트선수
신체사항 키 : 178cm 체중 : 56kg
취미 스타크래프트
학력
경신고등학교 (대구광역시)
계명대학교
수상내역
수상연도 수상내역
1999 쇼트트랙 99(2000시즌 개막대회)월드컵1차대회 남자3000m(금메달)
2000 세계 주니어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 종합 우승
2000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대회 1500m, 3000m 우승, 종합우승
2002 아시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 1500m 금메달
위의 수상경력에서 보시면 아실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짧은 전성기를 보냈었는지.
그는 정말 멋진 선수였습니다.
그에겐 '역전' 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선두를 굳게 지켜 1위로 골인하는 것이 그의 특기
였지요. 비록 드라마틱한 맛은 없더라도, 전성기 그의 모습은 장거리쪽에선 '절대강자'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99년 16살의 어린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세계에서 주목받는 선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원래 피치(발의 빠르기)가 많이 느린 선수였습니다.
(스케이팅에서는, 특히 쇼트트랙에서는 발이 빠르다고 그것이 곧 스피드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고 체중을 실은 킥이면 그것이 느리다고 하더라도 빠른 스피드를 얻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는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 피치를 보완하고 세계무대에 나섭니다.
99~2000시즌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2차 월드컵에서 1000미터, 3000미터에서 2관왕을 차지하며 주목받은 그는, 계속되는 월드컵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의 선수생활의 하이라이트였던 200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동성 선수의 부상으로 인한 부담을 짊어진 채로 1500미터와 3000미터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우승하며 종합우승까지 3관왕, 세계선수권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 시기에는 그의 고향 동료인 이승재선수도 급성장, 개인전의 한 축을 담당할 만한 선수로 성장해, 대구출신선수들의 기량이 절정에 달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민룡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 이전에 펼쳐졌던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까지 석권하며, 한 시즌에 주니어와 시니어선수권대회 모두를 같은 시즌에 제패하는 진기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곧 그의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절대스피드 부족' 이었죠.
김동성 선수와 안현수 선수(김기훈, 채지훈 선수는 워낙 오래된 선수들이라..)의 전성기 기량의 경우 한 바퀴 절대랲타임이 8초 초반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민룡선수는 훌륭한 하드웨어를 보유하고도 절대랲타임이 8초대 중후반에 머물고 맙니다. 아웃코스추월의 경우, 앞 선수보다 순간랲타임이 0.5초 이상 빨라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절대랲타임이 캐나다, 미국 선수들에게 뒤지는 그는 그의 '스타일'을 만들 수 밖에 없었죠.
이것은 곧 선두에 서서 경기를 리드하며 승부를 내는 그의 특성을 만들었고, 그는 그의 '스타일'대로 세계선수권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스타일' 이란 것은 알고도 못막는 안현수 선수의 스퍼트나 김동성 선수의 경기운영과는 확연히 궤를 달리합니다. '알면 막을 수 있는' 전략이었던 것이죠.
또한 순발력이 떨어지는 것도 그의 약점입니다. 결국 순발력과 재치가 필요한 500미터와 1000미터에서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맙니다.
세계선수권을 차지한 것을 정점으로 그의 성적은 조금씩 떨어져 갑니다. 더욱이 김동성 선수의 부상과 다른 대표선수들의 부진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죠.
2000~2001 시즌을 고군분투하며 대표팀을 이끌어 온 그는 마침내 2001년 전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섭니다. 당시 전주빙상경기장은 '이러다가 무너지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2500석의 관중석이 꽉 들어차고도 1000명 가량의 시민들이 계단 등에 서서 경기를 지켜볼 정도로 엄청난 관중이 들어찼었죠.
그러나 열광적인 홈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도 1500미터 2위, 1000미터 3위, 3000미터 슈퍼파이날에서 실격, 5000미터 계주에서도 실격을 기록하며 세계최강이라던 한국쇼트트랙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성적을 거둡니다.
이후 2001~2002월드컵 시리즈, 김동성 선수의 복귀로 인한 상승효과를 본 민룡선수는 1차 중국 창춘대회에서 1000미터 2위와 3000미터 슈퍼파이날 1위를 차지하며 다시 상승세를 타는 듯 했으나 이후 다시 부진하면서 뚜렷한 성적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리고 운명의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월드컵 시리즈에서의 부진으로 개인 종목에서 각 국가별 쿼터가 2명이 된 우리나라. 전문가들의 예상은 민룡선수와 김동성 선수가 개인전에 출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명규 감독 체제하의 한국대표팀은 경험많은 민룡선수를 뒤로하고 2002년 세계주니어 선수권을 차지하며 시니어 무대 경험이 일천한 안현수 선수를 김동성 선수와 함께 개인종목에 출전 시킵니다.
이때 민룡 선수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 부담감과 조바심은 5000미터 계주에서 무리한 추월시도로 미국선수와 같이 넘어지며 실격판정을 받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당한 부상으로 인해 2002~2003시즌 월드컵 1, 2차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고 3차대회에 복귀하나 결승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부진을 보이며 그는 대표팀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92년 후, 세계선수권을 차지하고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유일한 선수입니다.
비록 그는 불운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짝하고 사라진 선수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연결고리' 였습니다. 다른 대표팀 선수들이 부상과 부진의 늪에서 허덕일 때, 그는 혼자 남자대표팀을 이끌다시피 했던 대선수였습니다.
그가 보여주었던 강렬했던 질주는, 비록 짧았지만 쇼트트랙역사에 기록될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편은, <영웅을 넘어선 초인> 안현수 선수편입니다.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