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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3/28 19:04:30 |
Name |
Bar Sur |
Subject |
[잡담] 시대의 우울. |
조금씩 풀려나던 날씨가 플레쉬벡 현상처럼 겨울의 한 때로 돌아간듯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그런데도 무슨 깡으로 평소처럼 셔츠에다 얇은 점퍼 하나만 걸쳐입고 나왔으니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통학길의 버스 안과 강의실을 캠프 삼아 고지를 점령해나가는 등산가의 마음으로 학교를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은 그저 주변에 눈돌릴 여유도 없이 태엽인형처럼 바쁘게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바삐 걷던 내 시선이 갑자기 한 곳에 고정된 것은 순전히 뭐라 말 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간의 자력 같은 것이었나보다.
그는 적어도 40세는 넘어보이는 중년남성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모르지만, 길을 걷는 그 짧은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과 움직임은 가히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일단은 직장인처럼 차려입은 양복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르게 후줄근하게 주름이 잡혀있고, 반백발이 된 머리카락은 산발처럼 흐트러져있었다. 뿔테 안경대는 그저 걸쳐져 있을 뿐, 시선은 비스듬히 땅바닥만을 향해있다. 그 남자는 비도 오지 않는 날, 펑퍼짐하게 부푼 우산을 지팡이 삼아서 비틀비틀 신촌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친 뒤에도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단순히 날씨가 아니라, 순간 단절된 공간만이 통째로 플레쉬벡 현상을 일으킨 듯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무언가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메타포인 것마냥 묘한 징후를 품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어딘가가 신체가 불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육신을 일으켜올리고 올곧게 걷도록 하는 그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몸에 연결된 실이 끊어져버린 마리오네트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찌보면 에드가 앨런 포의 <군중 속의 사람>에서처럼 그는 그저 그곳을 걷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치 사방으로부터 조명을 받은 조각상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 달라보이는 조각상이 온사방에서 조명을 받으면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다. 마치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광장으로 끌려져나와 군중 앞에 던져진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무참히 거기 까발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제대로 보고있지는 않은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듯이, 단지 무감각한 타자의 시선들이 그의 초라한 육체를 슬쩍 지나쳐갈 뿐이었다. 내 시선이라고 무엇이 달랐을까.
과연 그에 대해 내가 무엇을 추측할 수 있겠는가. 단지 그는 거기에 있었을 뿐이고, 우리는 눈빛 한 번 주고받지 않고 서로를 지나쳤다. 이것은 단지 나의 되먹지 않은 감상일 뿐, 나는 어느 것 하나 그에 대해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신촌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 이외에 달리 다른 삶이란,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엄습해왔다. 마치 "시대의 우울"인양 바람결에 그것이 섞여있었나 보다. 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재빨리 뛰어올라 자리를 잡은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감겨지는 눈꺼풀과 함께, 문득 "세상"이 덮쳐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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