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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3/24 21:32:21 |
Name |
Sickal |
Subject |
(입 모양) '뜨거운 거' |
설령 여름이라 하더라도 야외 행사는 대개 춥다. 겨울에 하는 야외 행사는 당연히 더 춥다. 그리고 특히 체육관에서 하는 야외 행사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늦은 오후, 겨울, 체육관에서 하는 야외 행사는 당연히 춥다.
물론 난방은 한다. 그러나 난방을 하기 전까지의 무대 세팅을 하는 스탭들의 노고는 단순히 '추운데 고생한다' 차원의 것이 아니다. 차디찬 컴퓨터를 어두컴컴한 체육관 안으로 들어 나르며 손이 시려워지는 것은 당연 한 일. 각종 선과 기계를 연결하다보면 어느새 손이 시리다는 감각조차 잊게 된다.
문득 열심히 pc를 나르다 허리를 펴서 고개를 들어보면, 어둑한 체육관은 더욱 을씨년 스럽다. 처음 행사를 할 때는 '저 자리를 다 어떻게 채우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안오면 어쩌나, 날이 추워서 안오면 어쩌나, 시간을 착각해서 안오면 어쩌나.' 물론 이런 걱정은 기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닥에 차디찬 의자가 깔리기 시작한다. 언제 이걸 다 끝내나 싶었던 무대도 어느정도 구색을 갖춰가고, 끝이 안보이게 실려있던 의자도 어느새 차곡차곡 바닥에 깔리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수십개의 의자를 한번에 지고 바닥에 까는 아저씨들의 능력이 존경스러웠다. 달인은 어떤 종류의 달인이더라도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어느새 1시경. 아침부터 일어나 일했으니 배가 고프다. 도시락이 등장하면 모두 화색이 돌지만, 반쯤은 걱정어린 표정도 섞인다. 이유는? 물론 차갑기 때문이다. 몇가지 다른 도시락이 등장할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무도건 한x 도시락이다. x솥 도시락의 가격대 성능비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체험해 왔기에 의심한 적은 없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꺼낸 캔 음료마냥 시원한 된장국과 본의 아니게 질겨진 닭튀김을 씹고 있노라면 이게 과연 소화가 잘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탈난적은 없으니 다행이랄까. 사실 전 날 술을 마셔 잘 들어갈리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먹어둬야 산다. 암.
리허설이 시작되고, 각종 테스트가 행해진다. 작가들이 최고로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출연진들이 도착하면 대본과 자료 큐카드를 나눠주고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 언제나 가장 먼저 와 계시는 분은 역시 김철민 캐스터.
겨울철이면 어두운 녹색 점퍼를 입고 등장하시는 저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손에는 물론 갓 뽑아낸 (그러나 곧 차가워질게 분명한) 캔커피가 들려있다.
대본 설명이 끝나면 바로 CG를 확인해야 한다. 몇번이고 다시 보고 틀릴리가 없는 자료지만, 그 언제나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서 수십개의 CG가 수정된다. 어쩌면 난 작가라기보다는 스크립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선수들이 도착한다. 절대 선수만 오는 경우는 없다. 팀원들의 응원은 당연하다. 결국 시시덕 거리는 분위기로 대기실은 훈훈해진다. 변변한 난로조차 없던 대기실에 사람이 많아지니 그나마 온기가 좀 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기가 시작되면 대기실은 썰렁해진다. 물론 열기는 무대로 옮겨진다.
난방을 오래전부터 틀었나 보다. 이젠 꽤 훈훈해진 체육관이 낯설다. 아직 모자란 열기는 팬과 선수들이 채워주겠지.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경기 시작. (이 사이에 있는 각종 컴퓨터 세팅 문제 관련 사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정말 소설 한 권이 아깝지 않을 분량일 것이다.)
오늘은 윤열이와 태민이의 결승전. 그 누구도 섣불리 한 쪽의 우세를 점치지 못했다. 대부분 관계자들의 예상은 4:1 혹은 4:3 이윤열 승. 나는 4:2로 박태민의 우승을 점쳤다. 그리고...마침내 1경기가 불을 뿜었다.
명경기의 맵 루나 사상 최고의 테란 대 저그전 중에서도 최고의 경기였을 것이다. 1경기 부터 해설진들의 목이 쉬어간다. 우리 해설진은 경기 내용이 좋으면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TG 삼보 때는 해설진 가운데 '울었다'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흥분해서 소리지르는 사이, 목은 망가져 간다.
1 경기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나는 재빨리 중계진 앞으로 달려간다.
나 : (입 모양) "필요한 거!"
김철민 : (입 모양) "뜨거운 거!"
...굳이 입으로 말 안해줘도 무언가를 마시는 시늉을 하는 손 동작 만 봐도 알겠다. 뜨거운, 뜨거운 커피가 필요하다. 물론 체육관 주위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날 특수를 노리는 노점상들이 파는 꿀물이나 유자차 등이 있다. 하지만 솔직히 질 좋은 음료라고는 말 못하겠다. 잠깐 자리를 맡기고 숨이 턱에 차라 밖으로 뛰어 나간다.
이런...
체육관 근처에는 아무런 가게도 없다. 걸어서는 꽤 오래 들어와야 하는 체육관. 저 멀리 백화점 비슷한 마트가 보인다. 방법이 없다. 죽어라고 뛴다. 지하 매장에 가니 커피를 팔기는 한다. 근데 비싸다. 방법은 역시 없다. 사비를 턴다.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저 커피가 빨리 끓기를 바라는 마음 뿐.
직원이 다 민망해질 때 까지 재촉하고 난 뒤 커피를 들고 잽싸게 다시 체육관으로 향한다. 사실 거짓말이다. 다리가 풀려 힘이 하나도 없다. 커피가 출렁 거릴까봐 뜀박질도 못한다. 그래도 결국 체육관에 다시 도착했다. 입에서 쓴내가 나지만 결국 중계진 앞에 도착했다. 이미 쉬는 시간은 끝나고 2경기 진행 중. 조심스레 선을 피해 중계진들에게 커피를 전달한다. 중계진 모두 '살았다'하는 표정으로 커피를 받아든다.
그저 씩 웃고 나는 다시 경기에 정신 없이 빠져든다. 테란 대 저그 최고의 결승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날 박태민은 4:2로 이윤열을 꺾고 우승했다. MSL 사상 최초의 저그 우승이었고, 결승에서 저그가 테란을 상대로 우승한 유일한 날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리그 출범식 때 '이제 제게 우승이란 건 너무 벅찬 목표인 것 같아요"라고 각오를 밝혔던 그 선수가 우승한 날이었다. 물론 이윤열 선수 역시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었고, 나는 모두에게 감사했다. 지금은 꽤 지나간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야외 행사를 할 때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ps - 픽션이 약간 가미되어 있습니다.
ps 2 - 그 뒤로는 아예 뜨거운 음료수를 미리 챙겨놓기도 합니다. 보온병을 적극 활용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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