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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1/27 04:33:26 |
Name |
시퐁 |
Subject |
소설 게이샤의 추억, 말년병장. 파란만장한 인생에게. |
많은 분들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제가 군생활 하는 당시에는 의외로 전역이 다가오는 병장들이 오히려 부대에 남아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즘에야 병장보다 이등별들이 더 편하다고 하는 시대가 왔다고 하니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당시에는 병장이 너무 편했거든요. 저의 경우 상근 예비역이었지만 해안 경계로 빠지는 바람에 현역들과 같이 초소병으로 근무를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듣곤 했는데요, 제가 근무하는 곳이 산꼭대기였고 초소들이 거의 해안과 맞닿은 절벽등의 험한 곳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소초에서 이동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 만큼 순찰이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소초에서 초소로 이동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만큼 한번 이동이 끝나고 나면 긴 밤을 비교적 편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겨울의 밤은 지겹고 그만큼 서로간의 이야기는 많지요.
소위 '말년'이라고 불리우는 병장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많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이등병때의 갖은 모욕을 견디어 내고 육체적, 정신적인 힘겨움 속에서 버티어 가며 보내야 하기에 전역자들을 두고 '군대 갔다오더니 인간되었다'라고 하곤 합니다만 사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에 그런 것일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 앞에 '사회'가 닥쳐오면 조급해질 수 밖에 없지요. 복학을 하더라도 졸업 이후의 인생을 생각하여야 하고 대학을 안가신 분들은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떻게 쓰겠다는 것들을 주로 많이 고민하시는데요, 그러다 보면 차라리 밥 잘주고, 대우 좋은 군대가 좋지 않느냐고 많이들 이야기 하곤 하죠. 뭐, 그런 푸념도 병장쯤 되고 적응 할만큼 한 상태니까 나올법한 이야기지만요.(이등병땐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같습니다. 현역들과 같이 생활하다보니 구타도 있었고 모욕도 있었고 통신 기기로 찌짐도 많이 당했었죠)
부대에서 퇴근하고 나면 저는 책방으로 다시 출근을 했습니다. 부대에서 몸을 많이 쓰니 되도록이면 몸이 축나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선택했고 덕분에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습니다. 좋은 책을 부대에 가져가 병장들에게 권하기도 했죠(당시에는 상병 달기 전까진 책을 못읽게 했습니다). 아부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시간이 남아도는 병장들이 근무 끝나면 텔레비젼의 미녀들이나 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깝더라구요.무협 소설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이상 문학상 수상집이나 베스트 셀러들도 많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 번 가져가면 일주일 정도는 부대 안을 돌아다닙니다. 어떤 책이든 상관 없이 읽더라구요. 사회에서는 책 한권 들여다보지 않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날 전역을 며칠 앞둔 병장 한 분이 저와 초소에 있다가 갑자기 너무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저는 기억도 하지 못했지만 제가 가져다 준 책을 읽고 너무 와닿는 것이 많아 전역 후에도 무얼 하든 열심히 하게 될 것 같다며 내심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그런 이야기는 낯뜨거워서 잘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간의 조그마한 감정들은 술이 들어가야 그 기운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저는 무엇이 그런 쑥스러움까지 감수하게 했는지 궁금했고, 어떤 책이었나 물어보니 말해주더군요.
게이샤의 추억
저는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읽어보지도 못한 책이었거든요. 책방에서 공짜로 가져다 줄 수 있는 책은 구입한지 기간이 조금 지나서 한쪽 구석에서 먼지 투성이인 것들이 주가 됩니다. 읽어보지 못한 경우라도 조금 이름이 알려졌었다 싶으면 가져다 주었기에 못읽어본 것도 많지요. 제가 읽지 못했으면서도 권해준 책에 감동받고 앞으로의 희망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조금의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번역조차 엉망인 책들이 많은데(반지의 제왕이 당시에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래도 좋은 책을 읽게 해주었구나, 라는 안도감도 들었구요.
책방에서 역시 한쪽 구석에 먼지를 안고 있는 책을 발견하고 저 또한 그 책의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한 게이샤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슬픔, 희망을 보게 되었고 과연 훌륭한 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전역을 앞둔 병장들에게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입대하기 전엔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 수도 있고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 하나 하나가 어찌 쉬웠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이 부대낌이 있었을 것이고 견디기 어려운 사랑의 실패를 겪었을수도 있으며 현실적인 결과물에 낙담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생활 자체도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이등병때는 많은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아파도 아프다고 함부로 말 못하며 집안의 어려운 일이 있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면서 책임감을 가지게 되고 어려웠던 것들에 적응해나가면서 '게이샤의 추억'속의 주인공을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속에 투영하고 깨달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힘든 것을 이겨냈을 때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니까요.
물론 기억이란 항상 과거에 있기에 당시의 다짐을 잊거나 하기도 합니다. 아니, 십중팔구는 잃어버립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괜히 있는게 아니니까요. 다짐할 당시에는 뭐든 해낼수 있을것 같지만 잠을 자고 나면 몸을 움직이기 싫어지는 것을 두고 망각의 저주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저 또한 그리하기에 당시의 다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도 기억을 되살리곤 합니다. 프로게이머의 노력을 보며 그런 다짐을 되새기기도 합니다. '누구도 가기 힘든 길을, 누구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은 채 노력하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런 분들을 보며 기억을 연결시키고 다시 마음속에 담아두곤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시는 그 어떤 분의 인생도 쉽진 않았다고 봅니다. 고통이란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이 글을 클릭하여 읽으신 것이 변함없는 자신의 일상속에 머무른 것일수도 있고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일수도 있습니다만, 이곳에 찾아오고 한 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조금의 여유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과거가 힘겨웠다고 생각합니다. 파란만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 모든 분들의 인생 또한 어려웠고 답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힘겨웠던 인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힘든 과거를 자주 자주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그런 역경을 이겨냈거나 이겨낼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겨낼 수 있기에 지금의 여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몸부림과 승리는 종이 위의 물감처럼,
그 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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