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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1/26 18:43:34 |
Name |
김기현 |
Subject |
왕의 남자를 보고 |
나는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영화관에 가기엔 귀찮은데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은 질색이다. 비디오를 보기엔 촌구석 대여점의 대여료가 비싸다. DVD를 볼 수 있는 기계는 집에 없다. 컴퓨터로 다운받아 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취향과 형편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보고 싶었던 영화들마저도 안 봤던 경우가 허다하다. 7개월을 기다리다 영화개봉을 며칠 앞두고 책을 사서 본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앞으로의 글은 왕의 남자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영화 왕의 남자를 봤다.
영화다운 영화 왕의 남자를 봤다.
먼저 짧은 감상을 쓴다.
영화는 시작부터 속도감이 있었다. 흥겨운 가락과 빙글빙글 춤추며 도는 사람들, 주고받는 대화와 함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놀이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끊이지 않고 반복되어졌다. 감정이입이 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너무나 빠른 이야기 전개에 감정이 자꾸만 끊겨지고 억눌러졌다. 하지만 전개과정이 놀이라는 것을 통해 이뤄져 웃음을 자연스레 유발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리게 만들었다. 나는 장생이 두 눈을 잃게 되어 간수에게 금붙이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에서부터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영화가 끝이 날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미 장생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었다. "징한 놈의 이 세상, 한 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 뿐..."
어쭙잖은 영화분석과 나의 생각을 쓴다.
1. 장생과 공길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봤다.
장생(長生;오래도록 살아있다.)과 공길(共吉;함께 하면 좋다. 좋은 일이 있다.)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영화 안에서 장생은 처음부터 죽을 위기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한양에서 왕을 가지고 놀음을 놀다 처선에게 붙잡혔다가 살게 되지만 왕을 웃겨야만 살 수 있었다. 연산 앞에서 놀이를 하다 이미 죽게 되었다고 벌벌 떨고 있는 세 명의 놀이패와는 대조적으로 끝까지 살려 발버둥 친다. 그리고 살게 된다. 이후에도 영화 중 장생은 몇 번이나 죽게 될 위기에서 결국 살게 된다. 하지만 모든 위기의 순간들 가운데는 공길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길은 장생의 생사의 갈림길에 함께 있다. 또한 공길은 장생이 있어 사냥터에서도 녹수의 모함을 받을 때에서도 살게 된다. 처음엔 공길(空吉)이라고 생각했었다. 길한 일,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엔딩씬을 생각하면서 공길(共吉)이라고 확신을 했다.
2.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영화의 도입부분의 위기, 장생과 공길의 도망 이후 위기의 해소방법이 독특했었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숨을 내몰아 쉬면서 쉬던 장생이 갑자기 나무 작대기를 하나 집어 들고 맹인흉내를 내기 시작하고 공길은 단박에 이해했다는 듯이 둘만의 놀음이 시작된다. 잊을 수 없는 대사 중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둘은 그렇게 같이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 영화는 이렇게 위기의 해소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 최고조의 위기에 이르러 진짜 맹인이 되어버린 장생이 올라 있는 줄 위에 공길이 올라서서 줄을 다리로 퉁길 때 그 때의 대사는 없지만, 서로를 확인하게 되고 둘의 마지막 줄타기 놀음으로 위기를 해소한다.
장생에게 있어 최고조의 갈등은 처선이 장생에게 “공길이를 버려”라고 말하며 풀어주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이후 당연하다는 듯 무모하게 연산과 공길 앞에 나타나게 되지만,
3. 똑같은 필체 / 놀이꾼-광대
놀이꾼들을 모집할 때 똑같은 필체라니 좀 의아스러웠다. 아무리 배우고 가르쳤다지만 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써먹었다.
놀이꾼과 광대는 당시 홀대받던, 천대받던 사람들이었다. 약자들 중의 약자들이었다. 하지만 살고자 몸부림치는 그들, 그리고 진정으로 슬픔과 설움을 아는 이들의 꾸밈없는 웃음과 한을 볼 수 있었다. 최초 연산의 앞에서 놀음을 놀 때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 첫 밥상을 받았을 때 주고받던 대화들, 장생의 말 “배고파 죽을 뻔했네!”와 웃음을 참지 못해 밥알을 내뱉는 육갑과 킬킬대는 칠득과 팔복, 미소 짓는 공길을 보며 이것이 약자들의 삶이다. 라고 생각했다. 밥상 앞에서의 장생의 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 명대사였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에서도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 전부 자극적인 대사들 뿐.
4. 장생역의 감우성 / 황산벌의 감독이었던 이준익
알 포인트라는 영화를 통해 감우성을 알게 되었다. 왕의 남자를 본 뒤 감우성이라는 배우를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나 장생이 공길을 버리고 궁을 떠나려 할 때 칼을 휘두르며 줄을 끊으려 하는 장면이 감우성이 제안한 장면이란 사실을 들었을 때 앞으로 지켜봐야 할 배우라고 생각했다. 황산벌을 보면서 킬킬 거렸다. 왕이고 장수고 뭐든 권위를 깎아내리는 이준익 감독은 그 깎아내리는 것을 항상 웃음으로 자연스레 이끌어낸다. 주목해야할 좌파성향의 감독이다. 장생(떳떳한 약자)과 연산(약자를 이용하는 강자)의 갈등을 예로 들어보자. 장생이 줄타기를 하며 연산에게 하는 대사를 보자. “내 살다 살다 별별 잡노옴을 다 봤는데, 이곳에 와서 잡노옴 중에 잡노옴을 하나 봤지.”
5. 영화를 보는 내내 장생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려 연산이나 녹수, 공길의 배역에 자세히 파고들지 못했다. 또한 처선의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기회가 된다면 몇 번 다시 봐야겠다. 영화감독 이준익씨는 네 명(장생과 공길, 연산과 녹수)의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라고 했다. 그만큼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탄탄하다.
6.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준기, 이준기라고 하도 떠들어대서 궁금했었는데, 난 또 뭐라고. 그리고 이준기, 이준기라고 떠들어대면서도 쉬쉬하던데, 난 또 뭐라고. 개인적 이해와 견해의 차를 인정하지만 동성애라고 떠들 만큼의 내용은 없다고 생각된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저것이 바로 공동체의 기쁨이라 생각했다. 존재의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 기쁨을 사랑으로 바꾸어도 되겠다. 마지막 엔딩씬의 존재를 묻는 물음과 그것에 대한 대답을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냐?"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아니, 아니 우리 모두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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