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의 승리를 원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단 한명이라도, 나의 승리에 웃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악마가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 프로게이머 김 태 호 자서전 ‘악마왕’ 2장 ‘나의 게이머의 길’ 서두 -
2005년 2월 2일 -ps팀 연습실-
“솔직히 이기(게임이) 지가 가장 잘할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심더.
마, 어려서부터 선생님들도 그라고 부모님들또 니는 운동을 제일 잘한다고 운동선수
하라 켔는데 저도 제가 운동을 잘하기는 하는 것 같습니더. 그라도 그럼 머 어떱니꺼.
이기(게임이) 지가 제일 좋아하는건데예. 그럼 언젠간 제일 잘할수 있는게되는 것
아닙니꺼?“
연습생 면담회에서
열여덟 어린 게이머 정식이는 그렇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아직 어려.’
세상에 아직 때 묻지 않은 철부지나 할 수 있는 꿈같은 소리지.
그래도, 나는 그런 철부지 정식이가 좋다.
그는 어려서부터 쓴맛과 좌절을 수도 없이 맛보았던 나에게 남아있지 않은 용기와 패기를
지닌 바른 청년이니까. 그저 좋다기보다도 그의 그런 점을 닮고 싶었다 할까.
그런 정식이는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던 우리 팀이나 나에게 있어 활력소 이자 마음속의
큰 버팀목 되어 주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실패와 시련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옳곧고 긍정적인 정식이라도 그 시기 성장통과 같은 시련을 피해갈 수 없었다.
sobeit : GG
[KTF]chozza : ㅈㅈ
아쉽군.
“정말 잘했는데....두 경기 다 이길 수 있는 경기였는데...”
재용이형(감독님)이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발코니로 나간다.
예선부터 2차 듀얼 토너먼트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간 정식이가, 경험부족과 긴장으로
인한 페이스 난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속 2패를 기록하며 다시 pc방 예선을 치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패배의 충격이 상당했던지. 정식이는 숙소에 돌아와서도 식사를
거르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걸 지켜보던 나와 팀원 몇 명은 의기소침해진 막내를
위로해주기 위해 그를 (억지로) 끌고 포장마차로 향했다.
“저 아직...”
“괜찮아, 마셔. 보호자 있으니까 괜찮아.”
바른생활 사나이구나.
정식이는 술을 몇잔 들이키고 나서야 말문을 트기 시작해, 이내 눈물을 흘린다.
(미성년자인데, 정말 좋은 형들이군요. 여러분들은 미성년자한테 술주지 마세요.)
“지한테는 재능이 없십니더. 이환영이나 최병탁같은 아들은 이기 타고나서 날라 댕기는데
지는 재능이 없단 말 입니더 그런데 게임은 미칠 듯이 좋아하는데 이걸 어떻게 합니까?
형님...!“
“닥쳐”
다혈질인 민이가 정식이의 어린애 같은 푸념이 짜증이 났는지 거칠게 쏘아붙였다.
“다 큰 새ㅁ끼가 고작 한번 떨어진 것 갖고 세상 다 산 것처럼 주정이야? 너 지금 장난하냐?”
이런 와중에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식이를 토닥여주고 있는 우리 팀 에이스 윤우.
냉점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플레이로 유명한 포커페이스 ‘정윤우’는 스폰서가 없는 우리
팀 내의 유일한 메이저 리거다.
윤우만큼만 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희망이 보일텐데.
내 나이 스물 일곱.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막내의 기분 풀어주러 왔다가, 도리어 우울해져 있다니 우습기도 하지.
윤우는 그런 내 기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형, 신경쓰지 마세요. 정식이 녀석, 아직 어려서 그러는 거니까. 금방다시 일어 설거에요.
게이머 생활 하면서. 저 녀석만큼 재능이 뛰어난 녀석을 못 봤거든요.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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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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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말을 하려 했던 건지.
말을 멈추는걸 보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윤우와 술잔을 주고 받기를 10분가량 했을 때 였을까,
혼자 뭔가를 골똘이 생각하던 윤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예전부터 궁금하던게 있는데, 그거 맨날 갖고 다니는데 뭐에요?”
장갑 말인가.
“아아 이거....”
윤우가 가르킨 것은 투박하게 ‘No1’이라 쓰여 있는 수수한 보호 장갑.
‘그녀’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나의 보물이다.
.
.
2002년 8월 21일 코엑스 (3년전)
“게임 좋아 하시나 봐요?”
미래에 대한 희망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던 무직건달시절, 할 일없이 코엑스 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청히 지켜보며 서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작은 키에 앙증맞은 눈동자, 단발머리의 깜찍한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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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사.
“아니, 그다지.”
무슨 심통에서였을까.
그다지 할 것도 없었고, 그저 멍청히 서있던 나를 향한 소녀의 뜻밖의 관심(?)이
내심 기뻤지만, 애써 귀찮다는 듯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뒤로 돌아섰다.
“근데 왜 반말해?”
...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화났나?
소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멋쩍어져, 사과하기 위해 뒤돌아 바라보니
뜻밖이게도
소녀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나는 정수빈이라고 해요. 그쪽은?”
“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이런 상큼하게 미친 아가씨를 봤나.
“태호. 김태호다.”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나에게, 이유모를 관심을 가져준 소녀.
자석이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듯,
정 반대 성격을 지닌 사람끼리 서로 끌린다는 말이 있었던가.
아쉽게도 수빈이와 나는 정 반대는 커녕 남매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성격이 비슷했다.
그녀는 S극으로 표시된 N극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끌리지 않아도 좋았다.
우리는 딱 맞아 돌아가는 시계태엽 같은 사이였으니까.
닮은 성격 탓인지 마치 오래도록 사귀어온 친구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걸 훤히 꿰고 있던 우리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빠르게 친해져갔고,
그렇게 좋은 친구에서, 연인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
가을 오후. 어느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서
"이봐, 뭐 하는거야!“
“글쎄요?”
볼품없는 장갑에, 그녀와의 추억이 깃들었다.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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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좋아하는 거 없어요?”
그녀는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5남매중 4녀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오빠나 언니 보다는.
형이 갖고 싶었다나. 넷째에는 꼭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셨던 부모님이 어려서 남자아이처럼
길렀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호칭이 싫지는 않다.
“만화라던지, 영화라던지 그런거요.”
...만화를 볼 나이는 지났지.
“글세.. 만화라면, 슬램 덩크를 제일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누군데?”
수빈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따라 걸으며 대화를 계속했다.
“...송태섭”
이야기가 그녀가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되지 않았는지,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왜 그래?”
“에이. 보통은 정대만을 좋아하던데.”
“그래 보통은.”
나도 정대만이 좋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닮은 송태섭을 더 좋아한다.
단신에, 머리도 좋지 않은 송태섭.
농구에 대해서라면 뭣하나 타고난 게 없는 코트위의 송태섭이,
꼭 세상속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을 전부 지닌 나의 우상이기도 하다.
단신마저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
최고의 선수를 앞에두고 주늑 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는 승리에 대한 집착,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자신보다 훨씬 큰 거구와 맞서는 용기.
그런 그를 동경 했지만,
나에겐 목숨 걸고 도전할 무대도, 목숨을 걸고 지킬 소중한 것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래. 결정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아끌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뭐, 뭐하는 거야!”
“글쎄요?”
그리곤, 작은 유성펜을 꺼내 내 누더기 보호 장갑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No.1...?’
"이..이건.“
한나가 태섭에게 적어준 것과 같은 즉석 치어링이다.
그녀는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며 빙긋이 웃고 있다가,
“형 말야. 형은 이제, 태섭이야.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을 끊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다.
그리고 한참 뒤에서야 뭔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형의 한나가 될 수 있을까?”
‘무슨 소리지’
태섭의 한나...
그리고 쑥스러운 듯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
그것은 바로,
“그거 너....너....?!”
프로 포즈.
2002년 가을 늦은 오후.
누더기 장갑에 의미가 새겨지고,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소중한 것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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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뭐해요. 갑자기 말이 없고. 취했어요?”
윤우가 내 어깨를 마구 흔든다. 얼마나 지난거지?
‘생각에 잠겼었군.’
윤우는 여전히 나를 어리둥절히 쳐다보고 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얼마나 지났지?”
주위를 둘러보니 윤우 이외에 다른 녀석들은 전부 만취해 뻗어있고,
아직 열한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벌써 가게를 닫을 채비를 하고 있다.
‘둘이서 업고가야겠지.’
윤우가 먼저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팀원들의 물건을 주섬주섬 챙긴다.
이번에도 윤우가.
하긴, 그 이외에 별다른 경제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윤우는,
“열한시에요. 들어가 봐야죠. 일어나요 형”
“으응.” 어른스럽다.
우리는 서둘러 만취한 정식이와 태훈이를 들쳐업고 포장마차를 나와 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요 앞인데 이상하게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윤우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굳은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고,
술자리 후의 어울리지 않는 적막함이 어색하고 무안하게 느껴져 먼저 그에게 말을 던졌다.
“너 말짱한데?”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취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윤우가 팀에 입단한지가 벌써 1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짜 ‘프로’는 다르다는 건가.
내가 말을 건넨 후에도, 윤우는 한참동안 아무 말 않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그거, 소중한건가 봐요.”
“........”
그래. 이젠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니까.
“괜한 소리 해서 옛날 생각나게 하고.”
겨울이 가고 봄에 접어드는 3월 초.
밤길 봄바람이 왜인지 여느 겨울 바람 보다 유난히 시리게 느껴진다.
2005년 7월 21일 (4개월 후)
[파이터포럼 7월20일] PS팀 프로 게이머 이병훈 은퇴
“나이도 들었고, 가장 될 준비를 해야죠. 그냥, 작게 분식점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오늘 병훈이 형이 숙소를 떠난다.
나와 같은 시기에 팀에 들어온 병훈이 형, 스폰서도 없는 팀의 맏형으로
팀과 후배들을 위해 그 누구보다 애쓴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렇게 고생 했는데.
쓰던 물건들을 박스 안에 넣는 형의 모습이 그토록 쓸쓸해 보일 수 없다.
“나이도 먹었고, 이만하면 된거야...이만하면”
그는 가져갈 물건을 모두 정리한 후 자신이 쓰던 자리에 앉아 한동안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반복하더니, 슬슬 팀원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가자, 급히 숙소를 빠져나갔다.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무엇이 그리 급했던 걸까. 하필 이런 시기에.
우리 팀은 창단 이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놓여있다.
프로리그 정규시즌 4위가 확정되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1차전 상대는 정규시즌 3위가 확정된, 전년시즌 우승팀인 SK텔레콤 T-1.
T-1은 초반 5연패를 딛고 10연승을 기록하며, 급속도로 상위권에 진입한
팀으로 최근 굉장한 기세를 달리고 있는 전통 e스포츠 명가다.
'이길 수 있을까. 우리가.'
큰 무대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팀에게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인 기둥이
필요한 시기... 그리고 스폰서가 없는 약체 팀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창단 일대의 기회.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발코니로 나가니.
‘밤공기는 여전히 차구나.’
멀리서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팀 승합차가 보인다. 의외로 경기가 빨리 끝난 모양이다.
-선발 엔트리에 속해있지 않은 나는 숙소를 지켰지만.-
나는 경기로 지쳐있을 팀원들의 짐이라도 들어줄까 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바깥 공기를 들이쉬며, 차가 주차된 곳으로 슬슬 걸어가니 덩치가 큰 민이가 제일 먼저
짐을 들고 숙소로 걸어온다.
“형 내려 왔어요? 병훈이 형은요?”
“갔어.”
“그래요?...”
그때 그때 기분이 얼굴이 그대로 나타나버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 민이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아마도 병훈이 형이 작별인사도 없이 간 것이 내심 서운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주장으로서 팀과 후배들 뒷바라지로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고, 정작 자신은
메이저리그 한번 진출하지 못한 실패한 게이머 였으니까.
단지 게임이 좋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로게이머가 되었다는 병훈이형은,
이렇게라도 뿌리치지 않으면, 도저히 게임을 그만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꿈도 희망도 다 접고, 현실을 택했다.
그에게 있어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게이머 시절은 훗날 어떤 형상으로 기억될까?
그리고, 정말 그것으로 된 것일까? 한 시절, 꿈을 향해 자신을 바쳤다는 것만으로...
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저 병훈이 형보다 한살 어릴 뿐, 데뷔한지 2년,
아직 이렇다할 성적은 없고. 나이는 27세.
슬슬 안정적인 직장에 정착해야 할 나이다.
나는 대체 무슨 미련으로,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걸까.
몇 년째 진급을 미뤄 졸업 하지 못한 나이 많은 학생이 이런 기분일까?
겨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싶었는데 이젠 마음까지 심란해져,
짐을 들어주러 나왔다가 짐은 드는둥 마는둥, 빈손으로 팀원들을 뒤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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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어서자 마자 재용이형(감독)은 대 T1전 엔트리를 짜는데 여념이 없고,
뒤이어 식사를 마친 팀원들이 합류해 엔트리 회의에 참여 하여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연습게임 데이터, 종족별 맵 데이터, 최근 기세, 컨디션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하고 의견을 내놓는 팀원들의 모습이 진지한 한편,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인다. 플레이오프 티켓, 정말 힘들게 따냈으니까.
“모두들 정말 열심히구나.”
-후보인 나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해낸 후배들이 정말 대견스럽다.
“뭘 그렇게 웃고 있어요? 형님.ㅁ 아직 우승 한 것도 아닌데, 그거 생각카고 있었습니꺼?”
나도 모르게 멍청히 웃고 있었나 보군. 회의에 집중하던 정식이가 나를 공상에서 깨웠다.
역시 입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이 녀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네가 좋아.
말 없이 팀원들의 열띤 토론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4경기 엔트리까지 맞추어 졌다.
풀 셋트로 밀렸을 때면, 어김없이 한 경기 씩 따내주며 팀을 위기에서 건져 주있던
윤우와 정식이 의 개인전 카드, 그리고 오랫동안 다져온 믿음직스러운 팀플레이,
1경기 네오 레퀴엠 박정식(프로토스)
2경기 우산국 박 민(저그) / 조규진(테란)
3경기 러시 아워 정윤우(저그)
4경기 철의 장막 조규진(테란) / 김도경(저그)
5경기 알 포인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에이스 카드를 정할 차례에서,
“그리고 에이스 결정전은 태호가 나간다.”
“예?”
순간 잘못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재용이형(감독)이 에이스 카드에 대한 토론도 없이 갑자기 나를 에이스로 지목한 것이다.
“형, 무슨 소리세요. 에이스로는 윤우가 나가야죠.”
“아니, 윤우가 성적이 좋다고 해도 아직은 신예. 그런 중요한 무대에서 에이스 결정전을
맡아줄건 너밖에 없어.“
미쳤어..? 후보인 내가, 어떻게 T1의 에이스를 상대해..!
내가 바로 반론하려 하자, 윤우가 나서 재용이형을 거들었다.
“그래요 형. 저도 형이 나가줬으면 해요. 아까 차에서 다 이야기 되었는데. 형밖에 없어요.”
“무슨 소리야! 에이스 결정전이야!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내가 그걸 망칠지도 몰라!
너희들도 다 같은 생각이야?“
단 한명이라도 이 어처구니없는 기용을 반대 해주길 바랐는데,
멍청하게도, 모두들 나를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댄다.
“난 못해. 형 저 못해요.”
자리를 박차고 발코니로 뛰쳐 나갔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중에, 윤우와 정식이가 나를 뒤따라 발코니로 들어왔다.
“윤우야. 형은 못해.”
“아뇨. 형밖에 없어요.”
“네가 하면 되잖아. 넌 우리 팀 에이스야. 난 후보고.”
“도망치는 거에요?”
그래...맘대로 생각해라.
“난 후보니까. 그 자리는 당연히 팀의 에이스가 기용되어야 하는 거고...후보라고.
그래, 농구에선 식스맨이라고 하나? 다른 선수들이 지쳐 있을때 잠깐 들어가 머리수만
맞춰주는, 난 그런 존재야. 이것뿐만 아니라, 항상 그랬다고. 군대도, 공익이었어.
중학 농구팀에서도 식스 맨 이었지. 뭐 하나 잘하는 것 없이, 그저 끼어있을 뿐이었어.
요원이라고? 비장의 카드라고? 젠장 다들 멍청한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해.
후보는 그냥 후보일 뿐이야. 실력이 없으니까 주전이 못된 것 뿐 이라고.“
내가 말을 마치자 윤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말한다.
“그래요? 이상한데요. 우리는 당신을 새 주장이자, 팀의 당당한 조커 카드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보나, 식스 맨이 아니라.“
“내가? 하.“
조커.
너희들은 ‘요원’ 이라던지 ‘비장의 카드’라던지 하는 꿀 바른 헛소리와 다를 바 없는
말장난이지만, 어째 듣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윤우의 헛소리가 내심 기뻤다는게
더 알맞은 표현일까. 마치, 예전 그녀와의 첫 만남처럼.
그리고,
때아니게 빙긋이 웃는 윤우자식도,
“젠장 헛소리 마.” 내 엿 같은 심통까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무언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열정도 없이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날 이곳으로 이끈 것은 역시, 그녀인가.
....오늘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옛날 이야기를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정식이가 그랬던가.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제일 잘 할 수 있는 거라고.”
“예 그렇심더.” 철부지.
“... 나는 좋아서 이걸(게임) 시작한 게 아닌데.”
“그러면 어째 프로까지 되었습니꺼?”
“글쎄.....몰라”
그냥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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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거 아는데 죽어도 아닌 척 하고, 조그만 부탁 하나도 제대로 못하던, 멍청한 여자.
“오래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예전에 너, 처음 보는 나한테 친한 척 한적 있었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소심한게-
항상 할말을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다니는 것처럼, 장황한 이야기도 바로 바로 늘어놓던
수빈이가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냥. 형이 너무, 뭐랄까. 사실 거기서 서있는 거,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스타리그 끝나고 혼자 밖에 서있는데, 한자리에 서서 사람 드나드는 문만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요. 누구든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그냥 나만의 상상일수도 있지만.“
...남들은 보통 뭐라고 하는지, “오류다. 너는 너무 소심하군.”
“형도요.”
나이도 어린 게, 생각이 너무 깊어서 가끔은 그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다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좀 솔직해져 보는 건 어때.”
“형도요.”
그보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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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31일
그녀는 나와 만나기 전부터, 해외 유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다.
“형, 정말 안 갈거에요? 오랫동안 못 볼지도 모르는데.”
“대학교도 안간 놈이 거기 가서 뭘 하냐. 그냥, 조심히 다녀 와.”
평소엔 조그마한 부탁하나에도 그렇게 주저하던 게,
‘경비는 대줄테니 함께 유학 가지 않겠느냐’ ‘그곳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며.
그날따라 왜 그리 제안을 거두지 않는지,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리라고는.
2002년 12월 22일 공항 행 택시 안에서, 수빈은 스무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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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능숙하지도 못한 주제에 겁 없이 홀로 유학길에 나선 어리버리한 동양인 여자아이.
떠중이 같은 범죄자들에게 있어, 그보다 더 좋은 사냥감이 있을까.
귀국길 공항 행 택시 안에서, 몇일 기회를 엿보고 있던 범죄자에 의해 살해당한 것 이다.
그리고, 당시 지니고 있던 현금은 고작 미화 200불이었다고 한다.
“그 사람 이름이, 정수빈. 맞습니까?”
말없이 듣고 있던 윤우가 이야기 도중에 말을 꺼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지?”
“아, 아닙니다. 뉴스에서 본적이 있어서요.”
내가 알고 있는 한 ‘정 모양(20)’등으로 표기 되어있을 뿐 본명이 공개된 기사는 없었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부터다. 원래 현지 적응을 위해 당분간 국내에 들어올 예정 따윈
없었다더군. 그런데, 갑자기 집에 전화해서 연말에 국내로 들어오겠다고 바득바득 우겼다는
거야.“ 아마도 내가 뭣도 모르고 보낸 빌어먹을 카드 때문이겠지. 병ㅁ신 같은 년
이야기 도중, 윤우가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화장실이 급해서’라던지 하는
이유는 아닐 터, 지레 짐작 하던 게 있긴 한데, ‘역시 윤우는.......’
“형님, 근데 그거 형님 게이머 된 거랑 무슨 상관 입니꺼?”
‘정식이가 아직 있었군.’ 나는 열려있던 발코니 문을 닫으며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그녀가 사망한지 얼마 후, 내 집으로 우편물이 하나 배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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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주소와, 귀국예정일 이전의 소인이 찍힌 작은 소포.
“멍청하게... 우편물보다 일찍 도착 하는 게 어디 있어.“
도저히, 뜯을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 안의 무언가가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할지, 그게 너무도 두려워서.
나 때문에 죽은 여자.
내가 조금만 솔직했더라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솔직하게
함께 가고 싶다고 말 했더라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텐데.
목숨을 걸고 지킬 소중한 것 이라고...? 정작, 가장 필요로 할 때에는 곁에
있어주지도 못 했으면서.
-형, 나 정말 좋아하죠? 나는 형이 너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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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크. 김태호. 이제 와서까지 도망치는 거냐...!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솔직해지라고? 너부터 솔직해져. 이 겁쟁이 자식“
나는, 우습게도 그녀에게 고작 좋아한다는 말 한번 해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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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내용물을 꺼내 볼 수 있었는데,
소포에는 수수한 크리스마스 카드와, 팜플렛 두개가 들어있었다.
From 수빈
선물은 필요 없어요. 다만, 형이랑 꼭 함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To 태호형
Welcome to starleague at the Christmars 2002....
“이건...”
- 게임 좋아하시나요? -
처음부터, 그녀와 나를 만나게 해 주었던 계기, 그리고, 그렇게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이런 건 그 전에도 얼마든지 부탁하면 되었잖아!! 멍청하게!!”
고작 케이블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리그 라는 것 이었다.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말에, 조금만 더 귀 기울였더라면, 그녀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 해답을, 더 일찍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하루, 한달, 해답을 찾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이곳에
속해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정식이가 손가락을 동원해 계산하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그럼 형님, 도대체 게임시작한지 얼마만에 게이머 된겁니꺼? 그거 말 되는겁니꺼?”
“....글쎄.”
어떤 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일까. 가끔은, 그것이 한 맺힌 그녀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팀의 운명을 거머쥔 이 어울리지 않은 상황이,
그저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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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5일 메가 웹 스튜디오
내가 그랬던가?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누구도 그것을 피해 갈 수 없다고.
캐스터 : GG!!
시련은 이미 충분히 거칠 만큼 거쳤다고 생각 했는데.
아쉽게도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도 않은가보다.
캐스터 : 아! 풀 셋트까지 가는군요! 정말 치열한 승부입니다. T1, 4경기 팀플레이 잡으면서
경기를 에이스 결정전까지 끌고갑니다!!
“태호야. 준비 됐어?”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날 다그치는 재용이(감독님)형.
“예, 예”
토할 것 같다.
곧이어, 선수들을 자리에 앉히라는 AD의 지시에 따라 경기석으로 가기 위해 일어서니,
이미 자리에 앉아 손을 풀고 있는 상대팀의 에이스가 보인다. E 스포츠의 황제.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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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야! 왜 그래! 정신 못차려?”
그리고 내가 경기석에 앉자 대부분의(거의모든) 관중들이 일제히 상대편 에이스의
이름을 외쳤다. 하나 둘 셋, 임요환 파이팅!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이거였어? 수빈아’
숨이 가빠져 자리에 기대 앉아 막연히 천장을 바라보니, 뭐라고 소리치는 AD와,
감독님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제 상관 없어. 신경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체념하고 눈을 감았을 때, 그 수많은 인파의 함성 속에서.
“형 실망인데요.”
또렷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인가?’
....아니다.
어떻게 착각할 수 있겠는가. 몇 년동안, 되뇌이고 또 되뇌였던 그 그리운 목소리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바라보니, 그녀가 아니라.
[ PS 광안리로 가자! ]
조잡하게 만들어진 우리팀 치어풀을 들고 있는 작은 무리가 서 있었다.
있었구나, 이곳에도 우리를,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이걸...보여주고 싶었던 거였어?”
프로는 어찌하여 존재하는가
‘팬’
내가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무슨 미련으로 아직 이곳에 있는지.
이보다 더 확실한 해답이 있을까.
‘오래도록, 잊고 있었어.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료들이 있다.
“형 괜찮아요?” 윤우. “잠깐 타임아웃입니다! 태호야 괜찮아?” 재용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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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 듣고 있어? “좋아해!! 정말로.... 정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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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익 웃으면서 “그럼 된겁니더. 가서 이기이소” 긴장한 맏형을 격려해주는 막내 정식이,
민이, 규진이. 도경이...
그녀는 나에게 이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이다.
팬과 선수가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내는 이 열정의 하모니를. 이 모든 것을.
그리고 나는, 그녀가 감동하고, 동경했던 그 세계의 일부로써,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
“재용이형, 저 괜찮아요. 게임 시작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 ... 그런데, 저번 시합에서, 우리가 KTF 이겼을 때 게시판에 글 하나도 안올라 온 것 알아?“
“지금에 와서 무슨소리에요?“ / ”악역이다. 저들은 너의 승리에 관심이 없어. 너는 저들에게
있어, 악마가 되는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어디서..많이 듣던 대사인데.
“마왕이라도 되어 줄 수 있어요.”
그러자 재용이형이 내 등을 탁 치면서 말했다.
“좋아 가라, 마왕. 용자를 물리치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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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알 수 있다. 내 볼품 없는 장갑에 쓰여진 No.1의 의미를, 어째서 그 뒤가 공란으로
남겨져 있는지.
No.1
Progamer.
but Not yet. 아직, 나의 클라이 막스는 오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일 뿐.
마왕 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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