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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2/06 10:34:53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6]가슴에 새긴 사소하지만 설레는 병



  작년 겨울에 길거리에서 들었던 노래들이 다시금 귓가에 들리는 것을 보니 분명 다시 겨울이다. 피부에 미친 듯이 와 닿는 차가운 바람보다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겨울이라는 자각을 더 쉽게 불러 일으킬 때 즘 이상하게 또 술렁이는 가슴이 나를 심란하게 만든다. 2년 전의 겨울. 그 겨울 이후로 나에겐 병이 하나 생겨버렸다. 나만이 아닌 그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사소하지만 아주 큰 병. 치유할 방법 따위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괴롭지만 몇 번만 더 겪어보면 익숙해지리란 대안이 있기에. 지금은 조용히 적어 내려가고 싶다. 이것 마저 도망가는 짓이라 말하신다면 할 말이 없다. 할 말도 없는 만큼 더더욱 도망가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면 내가 갖고 있는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야 할 듯 싶다. 다들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던 도중 당하는 흔한 부상인 줄 만 알았던 것이 전방 십자인대 파열 및 연골 파열 이라는 조금은 큰 진단이 나와버렸다. 수술을 하자면 한 달은 누워 있어야 하는데 당시 고3이었던 나로선 당장 여름방학 동안 수술을 치르기엔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술을 수능 뒤로 미룬 뒤 더운 여름날 내내 그리고 수능이 끝나기 까지 허벅지까지 메우는 깁스와 목발을 친구 삼아 다녀야했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뒤쳐진다는 열등감은 들지 않았으니까. 정작 문제는 수술 뒤에 터져버렸다. 그 사소하지만 큰 병이…그제서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학교가 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수능이 끝난 후 학생들의 적성에 맞춰 특기 교육을 실시 했었다. 쓸데없이 3시간 동안 자습만 하고 돌아가는 허성세월보단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것을 모른 채 병실에 들어가있던 7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후 전신 마취가 다 풀리지도 않아 손가락 하나 꿈쩍하기 힘든 상태에서 그래도 좀 친하다고 생각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술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귓가에 친구의 어어..라는 말소리가 들리자 마자 다 풀리지도 않은 혓바닥을 놀려 그래도 최대한 잘 끝났다는 말을 발음해보려 애를 썼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한 순간 마취기운이 싹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바쁘거든. 일하는 중이니까 내일 얘기…아 아니다. 내일도 안되는데. 조만간 찾아갈께. 조금만 참아라.”

  참 웃기는 일이다. 친구가 뭣 때문에 바쁜지 당장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놈이 알게 뭔가. 그런데 그것이 왜 그리도 궁금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참 우습다. 작은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것이 그렇게나 부러웠던 것일까. 수술 후 수술부위에 고인 피도 다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고 싶다고 발버둥 치다가 아버지께 호통을 들었다. 그래도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여름에 깁스 속에 차는 땀 때문에 미치도록 간지러운 것을 참으며 감춰뒀던 불안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


  내 시계 바늘이 멈춰있는 것을 보기 싫었다. 남들은 하다못해 운전 면허라도 딴다고 돌아다니는데 나는 이게 뭔가. 멍청하게 병실에 누워서 그 전날 했던 드라마 재방송이나 보고 앉아 있고 옆 침대에 누워있는 병실 생활 13년차의 노인네 염세 타령이나 듣고 있어야 했다. 하다 못해 책이라도 읽으려 하면 정자세로 누워있어야 하는 탓에 엉성한 자세 덕에 한 페이지만 읽어도 팔이 아프고 눈이 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불만만 가득 채워져 갔으며 인상은 범죄자 마냥 굳어져갔다. 소변 마저 성기에다 호수를 박아두고 강제로 질질 새나오게 해야 했고 먹지도 못하는데 똥은 왜 그리 마렵던지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간호사를 호출하면 아직 내장이 자리를 제대로 못 잡았으니 배는 아파도 실제로 대변은 나오지 못한다는 매몰찬 대답 한 마디에 속이 썩는 불쾌한 기분으로 그 날 밤을 지세워야 했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입원 한 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 즘엔 용변 정도는 혼자서 처리 할 수 있을 만큼-소변은 침대 밑에 1.5리터 페트병에 싸고 대변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타고 화장실로 가 대변기 문을 열어둔 채 휠체어를 입구에 박아 두고 수술한 왼쪽 발을 곧게 뻗어 휠체어에 걸치고 나머지 오른쪽만 변기에 엉성하게 걸친 채 환자복에 똥이 묻을까 조심스레 해결해야 했다.-기운이 생겼을 즘 친구들이 문병을 오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바로 와서인지 그들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그리 부러워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 앞에 앉아 저마다 지금 자신들이 치르고 있는 일들을 가만히 앉아 듣고 있자니 조금은 가라앉았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해왔다. 간신히 미간에 동요를 보이지 않고 그들을 돌려보낸 후 주먹을 꽉 쥐며 나가고 싶다라는 강한 충동에 어깨를 떨었다. 퇴원하려면 아직은 2주나 남아있다. 내 시계 바늘이 멍청하게 멈춰있는 시간 동안 저들의 시간은 너무나 바쁘게 너무나 빠르게 몇 바퀴고 몇 천 바퀴고 원점을 돌아 지금도 돌고 있을텐데. 이러다 내가 저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할 만큼 멀어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외로웠던 중학교 시절 어두웠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것이 결국은 병이 되고 말았다. 가슴에 병을 담아둔 이가 이것을 치유할 방법이 이 곳 병실에서는 없다고 판단했을 때 답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내 두 다리에 부러져 잘라 내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우선은 오른 손에 꼽혀있는 링겔을 뽑아내야 했다. 간단했다. 주사 핀을 고정시킨 반창고를 떼고 핀을 박힌 방향 반대로 천천히 들어내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5층 병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엘리베이터까지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야 했다. 휠체어. 안타깝게도 당장 병실에는 고장난 휠체어 마저 없었다. 그렇다고 휠체어를 가져다 달라 간호사를 호출하게 되면 분명 내가 가고자 하는 곳 까지 동행해주겠다 나설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온전치 못한 내 다리나마 써야 했다. 걷는다. 여기서 내가 죽어도 어쨌든 나가야 한다라는 생각이 이성을 잠재웠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오른쪽 다리로 먼저 바닥을 내딛고 지렁이가 비가 와 젖은 땅을 기어가듯 수술한 왼쪽 다리를 살며시 움직였다.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에 한 발로 서지 않고 왼 발을 바닥에 살짝 대는 순간 허리가 끊어지는 듯 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아악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괜히 간호사들을 불러모으는 것이 아닐까 외마디 비명을 후회하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왼발은 앞으로 살짝 들고 오른발만으로 심하게 몸이 흔들리면 다리가 아파왔기에 그야말로 꼼지락대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병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는 채 5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만 그 거리를 나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 동안 왼쪽 다리를 칭칭 감아둔 붕대와 고정대 사이에서는 바닥에 닿지 않기 위해 슬쩍 힘을 주고 앞으로 든 채로 나온 덕에 새나오는 피와 고름으로 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나가고 싶었다. 더 이상 거리가 멀어지게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제 두 세 걸음만 더 가면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왔을 때 갑자기 뒤에서 멈춰 하는 명령이 들려왔다. 참 빨리도 등장한 내 담당 정형외과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너무나 무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나의 아버지. 결국엔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조금만 더 가면 성공할 뻔 했던 탈출 작전을 멈춰야했다. 의사는 황급히 달려와 나를 그 자리에 반듯하게 눕히고 피투성이가 된 빨간 붕대를 조심스레 풀어내고 수술 부위를 살폈다. 보기 좋게 벌어져 하얀 뼈가 선명하게 보이는 내 다리를 보며 무섭다기 보단 이런 머저리꼴이 되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가 괜찮으냐며 어깨를 토닥여 주시는 손길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시 병실로 끌려들어가는 이동식 침대 위에 누워 그래도 한 순간 짧은 희망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내 앞으로 걸어나가는 이들과 거리가 조금은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겨울이 더 어색하지 않나 싶다. 그 때의 바보같이 발악하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세월아 내월아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내 자신이 안타깝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한 복잡미묘한 마음에. 스스로 다짐하는 마음에 그 때의 겨울을 생각하면 재밌기도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어쨌든 그만큼이나 발악을 했으니 벌어졌던 거리를 좁혀놨고 지금은 앞서 나가보려 악을 쓰지 않나 싶다. 병을 키워 이제는 약으로 삼았으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스스로 병을 얻고 약을 찾아냈으니 어찌 보면 대견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괜히 자만하는 마음이 생길까 스스로 경계하길 즐기는 나로서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결국엔 자기 자신을 키워나가는 어지러운 시기에 가슴에 남은 이 작은 병이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하나의 기억이 되었음에 감사하며 그러나 잊지 않을 것이라 다시 한 번 경계한다. 걷다 지치면 그 날을 생각하면 된다. 퉁퉁 부어 오른 발바닥이 적어도 붕대로 칭칭 감아 굽히지도 못하는 왼발보다는 걷기에는 편할 테니. 이런 병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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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wall
05/12/06 10:49
수정 아이콘
멋지군요.. 글쓴이가 어떤인물인지 궁금해서 홈에도 들어가봤습니다 ^^
앞으로도 개념 999% 담긴 글 계속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
05/12/06 11:48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수필이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Juliett November
05/12/06 12:1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My name is J
05/12/06 12:29
수정 아이콘
열심히 사는건 너무 어려워요...
05/12/06 15:52
수정 아이콘
pgr21에서 윤여광님의 글이 제일 기다려집니다. ^^
재스민
05/12/06 15:52
수정 아이콘
아..정말 좋은 글이군요..앞으로 넘겨서 1부터 다시 봐야겠습니다^^
아케미
05/12/06 16:05
수정 아이콘
열심히 사는 것, 정말 어렵죠…… 그래서 이 글이 더 멋있습니다.
그러려니
05/12/06 16:22
수정 아이콘
와.. 정말.. ^-^...... 잘 읽었습니다..
예비신랑
05/12/06 17:38
수정 아이콘
이 분의 글은 뭐랄까.. 제가 느끼기에는 읽기 편하고 참 인간적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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