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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11/24 20:07:47 |
Name |
kikira |
Subject |
[손바닥에 쓰는 소설] 초인종 |
초인종
남자의 첫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자의 마지막 사랑뿐이다.
-발자크-
내세울 거라곤 위로 아담하게 솟아오른 작은 산과 그 앞을 조용히 흐르는 금강, 그리고 이제는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린 몇 가지 특산물뿐인 작은 소도시. 지방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이 작은 도시 곳곳에는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따위와 같은 구절의 현수막들이 붙어있어 명절 분위기를 돋우려 애쓴다. 어젯밤 비라도 내렸는지 청명한 하늘아래에 반짝이는 햇빛은 곧바로 자유낙하하다 어느 소년이 있는 곳에 무사히 착지한다. 소년은 햇볕은 만끽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생각이 없는 것인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파트 단지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덧 소년의 발걸음은 집 앞까지 향하고, 문 앞에 붙어 있는 XX교회라는 문패는 이 집의 가풍이 제사와 같은 소위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소름끼치는 듯한 문 여는 소리.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하다. 식탁위에 얌전히 차려져 있는 저녁밥과 그 위에 놓여있는 메모지가 소년을 더욱 소름끼치게 한다. 소년은 식탁 앞 의자에 앉는다. 숟가락도 몇 번 움직여 본다. 그러나 식욕은 없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다시 일어나 이리저리 발걸음을 움직여 보지만, 딱히 갈려고 하는 곳도 없는 듯 하다. 소파에 앉아 TV를 틀어본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딱히 보려하는 채널도 없는 듯 부질없는 손놀림만 계속된다. 결국 손가락은 전원 버튼을 눌러버리고야 만다. 갑자기 나오는 한숨. 소년에게는 습관적인 일이다. 소년의 마음속에 어느새 생겨버린 구멍. 갑자기 나오는 한숨은 이 구멍의 존재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이 구멍이 소년을 적잖이 당혹스럽게 했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다. 어린 소년의 치기일까. 소년은 언제부턴가 구멍 나버린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대해 애써 무신경해지려 노력한다. 외로움일까. 소년은 한순간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외로움과 지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던가. 같은 집안 식구는 물론, 멀리 있는 일가친척들까지 모두 모인다는 추석연휴 첫째 날 홀로 집안을 지키는 자신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소년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사춘기라는 면죄부를 내리기에도 무언가 부족하다. 어차피 정답은 나올 수 없는 문제, 소년은 상념의 끝을 접어버린다. 머리를 몇 번 긁다가, 다시 TV리모콘을 집어 든다. 아무생각 없이 멍한 상태가 되고 싶을 땐, 이 ‘바보상자’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다. 그러나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 소년이 머물 곳은 수십 개의 TV채널에도 없는 것일까. 소년의 손놀림은 초인종이 울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Mozart Symphony No. 40
볼프강 아마데우스
비록 16화음에 지나지 않지만, 소년은 잠시나마 초인종 소리에 취해 본다. 여전히 소년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곧 문 열리는 소리. 부모님과의 몇 마디 상례적인 말이 오가고 소년은 방으로 들어간다. 소년의 방이 어두워진다. 소년은 구멍 나버린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애써 모른척하며 잠을 청하려 노력한다. 소년의 뒤척임은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사랑은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다. 구리를 황금으로, 가난함을 풍족하게 보이게 하는 안경을 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눈에 난 다래끼조차도 진주알 같이 보이고 만다.
-세르반테스-
소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본다. 소년이 심장이 이처럼 세차게 뛰고 있는 것은 하늘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정오의 태양의 열기 때문만은 아닌 듯, 소년은 황급히 집으로 들어온다. 무너져 내리듯 소파에 몸을 눕히고, 소년은 생각해본다. 낯선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해한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은 소년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러한 혼란스러움도 잠시, 소년은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해내려 애쓴다. 여느 휴일과 다름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난 소년이 바람 쐬려 나가던 길에 만난 그 사람. 소년은 그녀를 외지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 아파트에 꽤 오래 살아온 소년이었기에 대충 그 정도 판단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맨 처음에는 소년에게 별로 이렇다할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소년과 그녀가 서로의 갈 길로 발걸음을 향하는 사이, 소년의 마음이 뒤늦게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렇다 말할 수 없는 느낌. 소년은 그녀를 쫓아가려는 마음을 겨우 누른 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한다. 첫 눈에 반했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 유치한, 그러나 사실이기에 소년은 더욱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소년은 자신에게 찾아온 감정을 애써 모른 채 하며 거부한다. 그리고 예전의 외로움 속으로 자신을 맡기려한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 외로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도 집안 홀로 앉아있지만 그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년을 외로움에서 꺼내 주었다. 그렇게 자신과의 심문을 계속하던 소년, 결국 거센 심문을 못 이겨 실토하고 만다. 소년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날이었다.
Mozart Symphony No. 40
볼프강 아마데우스
다시 울려 퍼진 초인종 소리. 소년의 몸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번엔 소년이 미리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어두워지는 소년의 방. 이상한 일이다. 소년은 구멍나버린 자신의 마음이 무언가로 채워져 있는 것을 느낀다. 소년은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낀다. 소년은 자신이 너무 초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초라함, 자신에 대한 모멸감, 오늘도 소년의 뒤척임은 밤늦게 까지 계속된다.
사랑이 있는 곳에 고통이 함께한다.
-스페인 속담-
수척해 보이는 소년의 얼굴,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이룬 듯 하다. 그러나 소년의 굳게 닫힌 입술은 무언가 결심을 정한 듯 하다. 완전한 무시 - 소년이 어제 밤새 내린 결론 인 듯싶다. 이제 까지 소년이 그래 왔듯이, 소년은 자신이 모르는 자신에 대해서 애써 무시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만든 그녀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지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가 소년에게 큰 영향력을 준건 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년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년은 끊임없이 자신을 추스르려 노력한다. 그녀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이 소년을 다소 안심하게 한다. 이제 남은 추석연휴는 내일까지 뿐, 그러나 내일이 지나면 그녀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소년을 불안케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감정이 소년을 혼란스럽게 한다. 어찌할지 모르는 소년, 이럴 땐 ‘바보상자’도 별로 큰 효과가 없다. 소년은 단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이러한 자아를 주장하는 마음보다, 그녀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크다. 결국 소년은 바깥으로 나가기로 한다. 우스운 일이다. 밖에 나간 다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소년은 미소를 지어 본다. 소년은 전날 밤의 다짐을 되새겨 본다. 이렇게 만날 기약도 없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보다 일찍 마음을 정리하려는 소년. 그러한 마음이 더욱 굳어진 듯 하다. 이제 마음도 조금 홀가분해 진 듯, 소년의 발걸음이 다시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혹시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을지 기다리는 소년. 다시 한번 피식 웃고, 소년은 엘리베이터에 탄다. 집안에 들어선 소년, 여전히 아무도 없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TV에 몸을 맡겨본다. 이제 잊혀지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르르 소년의 눈이 감겨 온다. 어젯밤 밀렸던 잠이 이제야 오는 모양이다.
Mozart Symphony No. 40
볼프강 아마데우스
얼마나 잤을까. 초인종 소리에 눈을 뜬다. 방에 들어가 잠을 좀더 청해보고 싶지만,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부모님에게 소파에서 자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가볍고 상투적인 꾸중,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또한 기분 나쁜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내일 친척들 간의 모임이 있어서 가족모두가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별로 반기는 일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이 소년을 더욱 짜증나게 한다. 부모님에게 비토를 몇 번 표시해 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짜증나는 마음에 소년은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년은 오늘 결정한 것들을 다시 한번 상기 한다. 그리고 내일 이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리라는 다짐을 하고 잠을 청해 본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 소년이었다.
사람은 항상 첫사랑으로 돌아간다.
-에티에느-
타인의 의지로 인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불쾌한 일이다. 연휴 마지막 날 아침, 소년은 짜증스러운 얼굴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화장실로 간다. 조금은 나아진 듯한 소년의 몰골. 소년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본다. 밖의 부모님은 이미 나갈 준비가 끝나 있었다. 소년은 부지런히 준비를 하지만, 서둘고 있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양치를 끝낸 소년, 이제 다 괜찮아 진거라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가볍게 자위해 본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다 채워져 버린 마음속의 구멍에 대해선 언제나 그랬듯이 무시하고 있었다. 신발을 신는 소년, 신발 끈을 묶는 것조차 소년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다시 한번 투덜거리며, 소년은 문을 연다. 그리고 그 앞에 등을 보이고 서있는 그녀.
Mozart Symphony No. 40
볼프강 아마데우스
이미 부모님은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초인종 소리가 소년에겐 마취제라도 되는 것일까. 소년을 재촉하는 부모님의 목소리, 그러나 소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소년의 메워진 구멍이 그녀를 보는 순간 공명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결국 소년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고 만다. 의아해하는 그녀와 부모님, 소년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 그 동안의 다짐들이나, 자신만의 모습을 지키려하는 의지 따윈 전혀 없었던 것처럼 소년의 마음은 몸마름을 갈구하듯 하나만을 원하고 있다. 결국 소년은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가기로 다짐한다. 초인종소리가 그치고 소년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 한다.
“초인종 소리, 맘에 들지 않아요?”
그녀는 무슨 대답을 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차안에 조용히 앉아있는 소년, 부모님들도 아무런 말이 없다. 소년은 미소를 지어 본다. 왠지 만족스럽다는 웃음. 무엇이 만족스러운 걸까. 여전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년은 눈을 감아 잠이나 청해본다.
오, 사랑이여! 그대는 바로 악의 신이로다.
하긴 우리들은 그대를 악마라고는 부르지 못 하니까.
바이런 -돈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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