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 추게의 스카티님이 쓰셨던 "Boxer's army, 황제의 마지막 라운딩"이라는 글을 보고 왔습니다. 'Hero'는 더 이상 흘러 나오지 않습니다만.
생애 처음으로 일부러 시간 내어서, 경기 장소에 다녀왔습니다. 서른 다섯. 무언가에 열광할 나이는 지나야 한다고들 하는 나이. 남들 눈도 있고 해서, 최대한 젊은 옷 입고 18시 반 쯤 도착하도록 집에서 나섰습니다. 오늘만은 혼자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조급함이 더 컸을 겁니다. 김광석 님 콘써트 한 번 두 번 미루다가 결국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서태지 님 콘써트 한 번 두 번 미루다가 은퇴 소식 듣고 화들짝 놀랐었습니다. 나는 열정과 사랑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여유 속에 사람들이 떠날 수 있다는 걸 너무도 뒤늦게 깨닫곤 했습니다. 박서, 솔직히 다음 기회 없다는 생각에 후회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주섬주섬 챙겨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솔직히 4강만 통과해서, 시드만 받아주길 바랬습니다. 박서는 사실 어느 상대와 대결하든,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안정감이 부족합니다. 몇몇 절대강자들에 비해 물량이 부족하다는 얘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결승 홍보 속에서 12회 리그 진출 중 6회 결승 진출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올드게이머 팬이라 생각해 왔지만, 박서가 결승 무대까지를 반타작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아스러웠습니다. 리치와의 결승 이후 한 동안의 슬럼프가 그만큼 컸었나 봅니다.
며칠 전 '올드게이머' 님의 고백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돌았습니다. 사실 저 역시 작년 에버 때 박서의 눈물을 보고, 뭔가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뭐야, 저 자식 우는 거야? 진짜로 우는 거야?' 울어선 안된다는, 여기서 울면 정말 엄청나게 까일 거라는 생각 속에서도, 한 편으로 이해 가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오늘,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덕대게 차량을 통해 밖에 쭈그리고 앉아 결승전을 보았습니다. 경기 다 끝나고 사람들 빠져 나가는 와중에, 끝까지 앉아 있던 한 분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울지 마라 임마,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분명 말도 안되는 억지이긴 하지만, 잠시 온게임넷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사람 욕심이 끝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4강 때 나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시드를 받아서, 그 치열한 예선 거치지 않아도 한 번 더 박서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결승 무대에 직접 가겠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 삼 세 번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 역시 3이라는 숫자와 황금마우스의 마력에 잠시 빠져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불현듯 '나다와 줄라이보다 먼저'라는 못난 마음을 가졌나 봅니다. 어느 샌가 '최선을 다 하는 박서를 볼 수만 있다면 좋다'라는 애정으로부터, '이기는 박서가 좋다'라는 집착으로 빠져 버렸었나 봅니다.
사실 박서는 게이머로서 더 바랄 것 없이 성공한 선수입니다. 수많은 열혈 팬들(과 번듯한 연인까지)이 있고, 안정적인 스폰서와 억대 연봉도 받고 있으며, 나름 대로의 관리를 통해 같은 선수들 속에서도 인정 받고 있습니다. 반면 제로벨은 무스폰 팀에서 연봉도 없이, 이른바 초특급 테란 유저와의 안정적인 연습 게임도 없이, 정말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선수입니다. 오죽하면 조정웅 감독님의 첫 말씀이 "선수들이 안정적인 여건에서 게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였겠습니까. 제로벨의 우승은 2002년 월드컵 4강에 버금 가는 기적같은 일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피땀 흘린 노력은 누구 못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박서의 패배에 아쉬워 하는 나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아마도 막다른 골목에서야 튀어나오는 박서의 승부 근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코카콜라배 5경기 때의 올인 3 드랍쉽, 815 대첩, 작년 에버배 4경기 때의 테테전 바이오닉, 오늘 3, 4경기 노멀티 올인 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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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최면에 걸리 듯 무언가에 취해 있었던 욕심으로부터, 다시 평온한 BoxeR's army로 남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 리그에서 3패 탈락한들, 듀얼 2패로 PC방 예선으로 간들, 그리고 몇 시즌을 쉬고 군대가서 서서히 잊혀진다고 해도, PC방 예선의 그 한 게임의 승부욕을 찾아 다니는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7년 사귀어 오던 친구가 떠나는 데 크게 일조했던 박서이지만, 이 승부 근성만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습니다. 단 한 게임을 하더라도 이것은 누가 뭐래도 박서의 게임이다라는 각인을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오늘 승리하신 제로벨이나, 결국 모든 프로게이머 분들이 그러했으면 합니다.
오늘 꽤 우울했지만,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서 돌아본다면, 이 시간들이 정말 행복한 날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서, 당신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에게 있어 거대한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