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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11/05 13:09:22 |
Name |
skzl |
Subject |
완벽형 스타일리스트. |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가끔씩 한가지 과목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친구들을 만난다. 이 친구는 수학. 이 친구는 영어. 이 친구는 과학. 이 친구는 국어. 아쉬운 건 그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수험생활을 쉽게 적응해내기는 힘들다는 거다. 수험이 원하는 것은 한가지를 잘 하는 것 보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에서 1등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역시나 그들은 어느 부분이든 모자람이 없는 친구들인 것. 작은 무리에서는 스타일리스트보다는 '완벽형'이 더욱 빛난다는 거다. 단일과목으로 들어가면 그 과목의 스타일리스트들에게 밀린다고 하여도 작은 무리에서는 완벽형에 가까운 친구들이 조금 더 빛을 발한다.
전교 단위로 들어가면 그 분포를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 과목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친구들은 전교 50~100등 군이다. 한 두 과목에 '약한 친구'들은 전교 20~50등에서 그 군을 이룬다. 그리고 반에서 1~2등을 하는 친구들. 이른바 완벽형 친구들이 전교 20등 안의 군에서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정도에서는 들어가면 어차피 빈틈 없는 녀석들끼리 경쟁이기 때문에 성적 올리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전교 300등이 전교 100등이 되는 것 보다 전교 20등이 전교 5등이 되는게 훨씬 어렵다. 극한으로 치닫는 이 우등생 경쟁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시 '스타일리스트들'이다. 이때 스타일리스트란 이른바 '완벽형 스타일리스트'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과목을 부족함 없이 잘 하는 친구들은 매 시험 때 마다 온 힘을 다하여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부족함 없이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친구들 중에 수학, 혹은 영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친구라면? 다른 이들이 한 과목을 공부하는데 들여야 하는 시간의 절대치를 다른 과목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시간 관리의 차이가 있다. 그 수준에서는 공부하는 절대시간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문제는 시간의 간격들. 효율적인 관리에서 오는 '상대시간'이 차이가 난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1~20등의 성적 순위는 5등 정도의 단위로 군을 이룬다. 그리고 20등 안에서 5등 단위로 만들어지는 성적의 군은 쉽게 잘 변하지 않는다.
전국 단위의 경쟁으로 가게되면 완벽형 스타일리스트들의 힘이 더욱 빛나게 된다. 100점 만점에 무한히 수렴해야 하는 극한의 경쟁을 떠나 자기의 특기 분야로 손쉽게 200점 300점의 가산점을 받게 해주는 시험들. 경시대회나 각종 공모전 등이 그것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100점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들은 그 100점에 무한히 수렴한 경험이 있는 '완벽형 스타일리스트'들에게만 허락이 된다.
문득 스타 경기를 보면서 왜 스타를 잘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못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테란이 골리앗으로 갈 때에는 저글링 뮤탈이나 빠른 히드라 업으로 가면 승리할 수 있다. 더블 넥서스에는 땡히드라나 타이밍 좋은 폭탄 드랍. FD에는 불독. 전략과 대응하는 전략. '정석'을 따라가면 이기고, 벗어나면 진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판단력. 센스. 이것 모두가 정확하게 공부하는 것에 적용이 되는 것이다. 매 문제마다 요구되는 '능력'이 있고, 그에 합당한 '공식'이 있다. 공식이 적용되어 답이 떨어질 때 오는 쾌감 또한 상당하다. 그것은 연습을 통해 '전략'에 익숙해진 다음 그것으로 상대를 격파할 때 오는 '승리의 쾌감'과 무척 흡사하다.
또 다시 문득. 요즘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완벽형 스타일리스트'를 요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 강한 홍진호. 후반에 강한 조용호. 맛사지 박경락. 커멘드 베르트랑. 아스트랄 조정현. 저글링의 장진남. 해처리의 주진철. 이들은 한가지 재능에 특출하여 명성을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우승의 명예를 맛보지 못했다. 그리고 항상 좋은 성적을 내는 (전성기의) 김정민과 서지훈. 항상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이지만 그들이 정점에 있다고 느낀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 세대를 이끌었다 여겨지는 이들. 박정석과 최연성, 이윤열, 박성준. 이들은 부족함이 없는 탄탄한 기본기에 토할 것 같은 물량. 신들린 듯한 전투. 어울리지 않는 전략으로 확고부동한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뜨고 있는 프로토스 쌍생아. 박지호와 오영종 또한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것에 더하여 플러스 알파를 가지고 있다.
임요환. 내가 느낀 과거 전성기의 임요환은 그때 개념으로는 이 같은 완벽형 스타일리스트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물량을 포기하고 '타이밍과 전략'이란 스타일에 집착하는 듯 했다. 자기 약점을 극복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금 임요환은 서서히 그 굴레를 벗어나 다시 완성형 스타일리스트로 나아가는 듯 하다. 황제라는 엄청난 압박을 '이기고' 다시 과거의 영광에 닿으려 하는 그를 보면 정말 존경심이 들 정도로 대단하단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고도 쓰고 나니 극한으로 가는 경쟁의 세계에 숨이 막히려 한다. 다시 문득 강민이 떠오른다. '완벽형'의 추구가 아닌 '스타일의 추구'로 최고를 바라보는 설득력 있는 선수는 몽상가 강민 밖에 없다. 최근 1년 사이에 스타를 보면서 가장 감명이 깊었던 건 박성준의 저그 황태자 등극 보다도, 최연성의 괴물같은 플레이에 대한 경악도, 심지어는 피눈물 흐르는 인고의 노력끝에 만나게 된 황제의 귀환도 아니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 정말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던 프로토스의 저그를 압도하는 플래이. 그걸 해낸 강민의 수비형 프로토스였다.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면서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 그를 보면서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을 보는 것일까. 나는 그가 끝까지 지금까지 보여준 여유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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